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97화
“할퀼 거예요.”
“예.”
레일라가 그렇게 말하고는 손톱을 세웠다. 그런데도 레이니어가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고.
“조신한 사람이 이렇게 유혹하고 그래도 되나요?”
“조신하게 한 사람한테만 그러니 괜찮습니다.”
“저 안 좋아한다면서요.”
“예.”
“정말요?”
“……예.”
레일라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다가 이내 다시 그녀에게로 돌렸다.
“제 시중들려고 그런 차림으로 있는 거죠?”
“예.”
“그럼 시중들어 봐요.”
레일라는 지금은 평민인 척하고 있으나, 실상은 황자인 그가 제 시중을 드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기분 나빠 할 줄 알았건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까이로 와서 레일라 옆에 섰다.
“자, 잠깐만요. 캐서린이 올 수도 있는데…….”
“캐서린은 설렁줄을 당기지 않으면 안 옵니다.”
“아, 그렇죠.”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왜 캐서린에 대해 말한 건가 싶으면서도 이 상황이 조금 긴장됐다. 싫으냐고 묻는다면 싫은 건 아니었다. 좋은 거냐고 묻는다면 좋은 것 같긴 했다.
이상하게 자꾸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녀가 지금껏 만났던 수많은 사내들과 있을 때와는 다르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았다. 그 긴장감이 불쾌하진 않았다. 묘하게 가슴이 떨리면서도, 레이니어를 신경 쓰게 하는 그런 긴장감이었다.
이전에 만났던 남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던 때와는 다르게.
오히려 그가 제 눈치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러지 않게 하려고 더 신경 쓰게 된다는 게 이상하기도 했고.
“옷시중부터 들어드릴까요?”
“예? 아…… 아, 네. 그래요.”
레일라의 허락에도 레이니어는 그녀를 기다리듯 빤히 보기만 했다. 정신이 든 레일라는 그의 쇄골에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그가 레이스로 된 그녀의 장갑을 손으로 잡고선 쭉 당겼다. 오른손 장갑이 벗겨지자 묘하게 시원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레일라는 왼손도 뻗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왼손 장갑도 끝을 잡아서 쭉 벗겨 냈다. 그러고는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한번 보더니 레일라의 뒤로 갔다.
“머리카락을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네. 그런데 이런 일은 정말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하는 건데요.”
“오늘은 평민입니다.”
“평민이 되면 뭐가 좋나요?”
“뭐가 좋을지 모르시겠습니까?”
레일라는 알 것도 같았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머리카락을 들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이 그녀의 목을 스쳤다.
“흣…….”
“정말 모르시나 봅니다.”
그녀 곁에 선 그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레일라는 그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내려가 심장에 맴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는 아주 느릿한 손으로 목 뒤에 있는 초커를 하나둘 풀었다. 초커가 풀릴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 뒤를 스쳤다.
옷 위로 스치던 손은 이내 맨살에도 닿아, 그녀를 간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상했다. 간지러우면서도 온몸은 점점 긴장하게 되었으니까.
“레인은 제가 기분 좋으면 알아요?”
“예.”
“기분 나쁜 것도요?”
“예.”
“무서울 때도요?”
“네.”
“어떻게요?”
레일라가 뒤돌아서 그를 보자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씬 티가 나거든요. 얼굴에요.”
“아…… 그래요? 혹시 독심술 같은 건 못 해요?”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럼 비슷한 건 할 수 있나요?”
“비슷한 게 뭐죠?”
“조종이라든가 최면이라든가 그런 거요.”
“글쎄요.”
레이니어가 말을 얼버무리자, 그녀는 그 태도가 확답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다. 종종 보이던 붉은 눈의 다른 사람들. 어쩌면 그때마다 조종한 건 아닐까?
“변장도 해요?”
“그건 특기죠. 아주 잘합니다.”
“어느 정도로요?”
“저는 아가씨 모습으로도 변장할 수 있습니다.”
“한 적 있어요?”
“네.”
“언제요?”
레일라가 계속 물어보자 그가 다시 돌라는 듯 바라보았고, 레일라는 애써 웃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잡고선 가만히 있었다.
이제는 척추에 닿는 그의 손길이 간지러우면서도 옷이 점점 풀리는 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요. 누가 아가씨 방에 난입했을 때요.”
“제 침실로요? 소네트가요?”
“아뇨. 아나시스가 그런 날, 소네트 브루스에게요.”
“소네트는 속던가요?”
그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흘러나왔고.
“속지 않아도 말은 못 할 테죠. 아가씨께도 별말 안 하지 않았던가요?”
“……네.”
레일라는 허리까지 풀어진 옷 덕분에 조금씩 숨 쉬는 게 나아지고 있었다. 이내 그가 허리춤까지 단추를 다 풀자 바닥으로 옷이 훅 떨어졌다.
그가 이제는 코르셋을 풀기 위해 끈을 쭉 잡아당기고 있었다.
“레인, 전에는 레인이 저보고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예.”
“그럼 사람이었다가 다른 존재가 된 건가요?”
그러자 레이니어의 손길이 멈추었다.
“아가씨는 어쩌자고 이렇게 무방비합니까? 저도 다른 사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짐승인데.”
말을 돌리는 걸 보니, 확실했다.
“입이 무거운 짐승인가요?”
“그 짐승은 소유하시면 뭐든 진실만을 말할 거랍니다. 입은 당연히 무겁습니다.”
“소유는 어떻게 하는 건데요?”
레일라가 순진하게 물어보자 레이니어가 웃었다. 그는 평점심을 찾은 듯 웃으면서도 전혀 여유로워 보이진 않았다.
“레인?”
“네.”
계속 그녀가 처음일 터였다. 실상 이전 생에서도, 계속, 계속. 그녀가 저를 만지지 않는다면 계속.
“제가 만약 소네트랑 결혼하고 레인을 정부로 둔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저는 정부로 시작해도 본 남편이 될 자신이 있답니다.”
“……어떻게요? 설마 또 죽인다고…….”
“키스해도 됩니까?”
“말 돌리지 말고요.”
레이니어가 그녀를 향해 웃었고, 레일라는 다시 코르셋이나 벗기라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코르셋의 줄을 쭉 당기며 끝부분을 풀어 냈다.
“죽이고 싶겠지만, 죽이지 않을 겁니다.”
“정말요?”
“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가 저를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을 죽이면 레일라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레일라가 다른 사내와 결혼했을 때 제 머리를 쐈었다. 그러나 몇 번은 그녀의 남편들을 죽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레일라는 슬퍼하면서도 다른 사내를 찾았다.
자신은 남편 후보에 한 번도 들지 못했지만.
“아가씨.”
“읏……. 살살 해요.”
“네.”
그는 줄을 살며시 느슨하게 풀고는 다시 코르셋을 풀기 시작했다.
“아가씨께 저는 어떻습니까?”
“훌륭한 파트너요.”
“그 이외에는요?”
“저 안 사랑한다면서요. 그런데 그런 걸 확인하고 싶어요?”
“네.”
그녀는 그에게 모든 걸 순순히 말해 주고 싶진 않았다. 그는 매번 비밀이 있었고, 제게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눈에 문득, 그가 가지고 다니던 발칸어가 쓰인 붉은 표지의 책이 들어왔다.
“저 책이 뭔지 알려 주면요. 저거 그냥 그림책 아니죠? 레인이 볼 때마다 뭔가 다른 거죠?”
그녀는 여전히 그 책이 수상했다. 그저 그림책이라기엔 그가 열심히 보던 모습을 자주 보았으니까. 그저 그런 그림책을 그가 그렇게 열심히 볼 리도 없었고.
“저 책은 예언서입니다.”
“예언서요? 그림책 아니었나요?”
“아가씨는 주인이 아니니까요. 주인에게만 특별히 글이 보이는 책이랍니다.”
“누가 쓴 건데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어디서 얻은 거죠?”
레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다 풀어져 끝에 걸려 있던 코르셋이 훅 풀리며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순식간에 숨쉬기 편해진 레일라는 숨을 제대로 쉬며 레이니어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릅니다. 돌아왔을 때 생겼습니다.”
“수상한 물건 아닌가요?”
“수상하긴 한데 저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높은 기운이 느껴져서요. 그렇다고 제가 만든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가 만든 물건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을 못 해요?”
“그러게요.”
레일라가 계속 날카롭게 질문했다. 레이니어는 최선을 다해 대답하고 있었고.
“주로 어떤 걸 알려 주나요?”
“아가씨가 오래 살 수 있을 방법이요. 저도 이번에 처음 본 거랍니다. 그전까지는 못 봤던 거고요.”
그 말은 진짜였다. 그가 천 번의 회귀 동안 이 책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치 그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등불과도 같은 책이었다.
“제가 오래 살면 레인에게 뭐가 좋은 거죠?”
“저는 아가씨가 죽으면 저도 죽고 싶거든요.”
그는 언제부턴가 그녀가 제 눈을 통해 감정을 확인하려 드는 것을 부정하게 않겠다는 듯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레일라는 네글리제만 입은 채, 레이니어의 팔을 잡았다. 마치 그가 달아날 수 없도록 꽉 잡으며.
“이젠 아가씨가 말해 주시죠. 아가씨께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레일라는 그가 제 행동보다도 오히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하는 듯하면서도 떨고 있었다.
“레인은 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그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고요.”
“그리고요?”
레이니어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듯 레일라에게 진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