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99화
“지난달 대비해 신규 고객이 500퍼센트 정도 늘었습니다. 이대로 1년만 유지하면 중앙은행도 이기겠군요.”
레이니어는 건조하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일라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이곳은 몬트의, 둘만 출입하는 집무실이었다.
“아가씨?”
“아, 네.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했어요.”
비셔스 은행은 정말 잘 되어 가고 있었다. 3개월만 이자를 10퍼센트씩 준다고 하니, 너도나도 은행에 돈을 예치했다.
신규 고객이 마구 밀려들어 와서 그런지 이자는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레이니어가 제 아버지에게 귀띔해 두었기에, 황제파의 인원들은 비셔스 은행에 큰돈을 입금하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비셔스 은행의 인지도만 올려 두기 위해 도운 것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귀족파, 그것도 아나시스의 세력 쪽은 돈이 묶일 확률이 높았다.
다만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황후의 비자금이 이대로 빠져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뭔지 알려 주면 도와줄 건가요?”
“저는 항상 아가씨를 도울 생각을 하고 있죠. 그래야 아가씨의 기분 안에 제가 들어갈 테니까요.”
그의 음모가 가득한 미소를 보자,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 웃었다. 그가 제게 무언가 의도가 있는 건 분명한데, 어쩐지 제게 그리 위협적인 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뭣보다 이대로라면 레이니어가 황제가 되었을 때, 레일라는 공신으로 이름이 높아질 게 뻔한 위치였고.
“소네트가 요새 이상해요.”
“어떻게 이상합니까?”
“저를 풀어 주는 듯하면서도 집착이 심하네요.”
“집착이 심한 사내는 매력이 없죠.”
레이니어는 레일라 때문에 천 번을 회귀해 놓고도 뻔뻔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레일라는 그 사실을 알 수 없기도 했고.
“왜 매력이 없어요?”
“그게 다 인생의 주체가 여인에게 둬서 그런 겁니다. 자기 인생이 중요했다면 그렇지 않겠죠.”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전혀 찔리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레일라가 주체였고, 자기 생보다는 그녀의 생과 행복이 더 중요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오히려 첫 회귀 때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회귀를 거칠수록 그녀에 대한 감정이 점점 더 커져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매력이 없죠? 전 그런 사람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방금 모욕한 사람이요?”
“스스로를 모욕한 거죠.”
그의 말에 그녀는 농담이라 생각하며 웃었다. 그로선 절대 농담이 아니었지만.
“아가씨는 만약, 이대로 소네트 브루스와 결혼하게 되면 어떡할 겁니까?”
“그럼…… 어쩔 수 없긴 하겠죠. 만약 그렇게 되면 소네트와 잘 살도록 노력해 봐야겠네요.”
그러자 레이니어의 여유롭던 웃음이 사라졌다.
“그것 참.”
“화나죠?”
“예.”
그녀는 그가 대체 왜 제게 본심을 말하지 않는 걸까, 싶으면서도, 오히려 이 편이 더 재밌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우스웠다.
대체 원작에서는 어떻게 시베르와 그렇게 절절하게 이어진 것인지 신기하기도 했고.
“레인은 우리 언니를 어떻게 생각해요?”
“시베르 아비에르 영애 말씀이십니까?”
“네.”
“못생겼고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면서 남 탓만 하고 음침하면서도 염치를 모르고 열등감이 심하면서도 귀족이 되고 싶은 평민으로 생각합니다.”
“아니, 무슨 모욕을…….”
이러니저러니 귀족으로 산 레일라는 살면서 들었던 모욕 중 최상위에 속할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이성적인 매력을 느낀 적은 없나요?”
“만약 제가 천 번을 회귀한다 해도 없을 것 같네요.”
“갑자기 왜 이렇게 숫자가 커져요? 그리고 회귀라뇨?”
회귀라니. 이전 생을 기억하는 레일라로선 그 주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이니어는 그녀의 표정이 토끼 같다 생각하며 말했다.
“전설에는 그런 이야기가 종종 나오니까요. 예를 든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위의 다른 존재라면, 진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일 테니까.
“혹시 인간적으로 이성애를 느끼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요?”
“네.”
“사랑해 본 적은요?”
“있습니다.”
“아직도 하고 있죠?”
“네.”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계속할 거죠?”
“그건 제 의지가 아니라서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며, 다를 주제로 넘어가고 싶다는 듯 서류를 건넸다. 레일라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그가 넘긴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나저나 황후의 비자금을 하루 만에 뺄 정도로 여유 자금이 있긴 한 거죠?”
“물론입니다. 없으면 중앙은행에서 빼 와서 돌려 막아도 됩니다. 어차피 중앙은행도 제 아버지의 소유거든요.”
“하지만 대주주의 이름은 황제 폐하가 아니시던데요……?”
“차명, 이죠.”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제 주위의 모든 게 자신이 꽃길을 걸을 수밖에 없도록 짜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면서도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니어와 자신이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그가 제게 호감이 있고, 이제 막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이렇게 도우려면, 일련의 모든 일이 만약 치밀하게 짜인 계획이었다면, 저와 만나기 이전부터 이 판을 짰다는 말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레일라가 기억하는 건 고작 이전 생이었기에.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잘 끝나서 황후가 다시 예금을 한다면요.”
레일라는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고자 그렇게 말했다.
“레이니어가 저를 씻겨 주도록 허락할게요.”
“저는 씻기기만은 못 합니다.”
“이미 제 몸을 다 보지 않았던가요? 레인 때문에 전 누구한테도 시집 못 가요.”
그녀가 장난치듯 그렇게 말하며 레이니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기쁘다는 듯 웃으면서도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너무 붉었다.
“그때 제대로 못 봐서 유감이군요.”
“지금이라도 제대로 보여 줄까요?”
“네.”
“농담인데.”
“그런 농담하지 마시죠.”
순간적으로 그는 표정을 되돌렸다. 그러면서도 귀는 몹시 붉었고.
“요새는 왜 피를 안 주나요?”
레일라 역시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사실 이미 그녀의 몸은 해독이 다 되어서, 굳이 그의 피가 필요하지 않았다.
인어의 눈물에 중독된 후 황족의 피를 마시면 금강불괴가 된다는 말은 헛소문이었으니까.
그는 그녀와 처음 만나 약을 건넸던 그 날, 이미 그녀를 회복시켜 두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완전히 회복된 건지 알 수 없어서 계속해서 제 피를 먹였다.
그래서 지금의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건강한 상태였다.
“지금 드실래요?”
하지만 레이니어는 굳이 그 점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입술을 겹칠 때마다 그녀가 저를 의식하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오늘은 자기 전에요.”
그녀의 거절이 아쉽다는 듯, 그는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다가오자 레일라가 먼저 팔을 뻗었다.
그녀는 소네트와의 결혼식이 가까워 오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였다.
어쩐지 레이니어와 입을 맞출 때마다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쓸데없는 생각을 날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이런 행위가 싫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입술을 대자, 그는 능숙하게도 그녀를 점령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