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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02)화 (102/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02화

“레일라!”

소네트는 레일라가 제 근처로 오자 그녀를 제 등 뒤로 숨기며 훌쩍였다.

“네 약혼자 간수도 못 한 게 어디 그런 말을 지껄이느냐!”

아비에르 백작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레일라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레일라는 소네트의 뒤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말했다.

“언니가 제 약혼자들을 유혹한 게 어떻게 제 잘못이죠?”

“레일라, 너 나한테는 날 축복한다고 했잖아.”

“그때는 아이가 불쌍해서 그런 거고.”

레일라는 생각했다. 이상하게 연기가 너무 잘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시베르에게 쌓였던 울분 때문인지, 울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말할 때마다 눈물이 주룩주룩 나고 있었다.

“막말로 소네트가 당한 거라면? 내가 아는 소네트는 실수할 사람이 아니야. 언니가 또 무슨 수를 썼겠지!”

“레일라!”

“휴고한테 다 들었어! 언니가 휴고를 유혹할 때 키스했다며!”

그 말에 아비에르 백작가의 사람들도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휴고가 그러더라. 언니가 키스만 안 했어도 그렇게 미치지 않았을 거라고.”

“너, 그, 그런 헛소리를……!”

“소네트한테도 똑같이 한 거 아니야?”

레일라가 말을 끝내자, 소네트는 스스로가 증오스럽다는 듯 몸을 떨면서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난 소네트를 믿어. 소네트가 언니한테 진심이었을 리 없다고.”

“레일라.”

소네트도 그 말에 무너질 듯 울며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아이는 낳아. 대신 우리가 키울게. 내가 소네트랑 그 아이를 우리 아이처럼 키울게.”

레일라는 이 촌극이 싫으면서도, 시베르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기뻤다.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언니는 숨어서 아이를 낳아. 그럼 되잖아?”

“그래, 그렇게 해.”

소네트는 레일라의 말이 옳다는 듯 울던 것도 잊은 채 시베르를 바라보았다.

“영애의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잘 키울게.”

“어차피 나는 몸도 약하고…… 이렇게 아이가 미리 생긴다면…… 나야말로 소네트의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키울 수 있어.”

레일라가 눈시울을 적시며 그렇게 말하자, 오히려 그 말에 감동한 건 브루스 후작이었다. 그는 레일라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조건만 보아도 완벽한 며느리였고.

그런데 이렇게 심성까지 곱다니.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

“브루스 후작! 그럼 내 딸은 어떻게 됩니까! 아이를 낳은 여인은 결혼 전에 검사하면 다 알아요! 우리 시베르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한 마디로 혼삿길이 영원히 막힌다는 말이었다.

귀족들은 결혼 전에 서로의 신체검사를 해서 서류를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 여인들의 경우 서류를 조작해서 넘기곤 했었다.

그러나 출산 경험이 있는 여인이라면 서류를 조작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출산 후에는 겉으로 보이는 징후들이 여럿 있었으니까.

“애초에 몸을 함부로 굴린 건 그쪽 딸 아닙니까! 우리 가문에선 레일라 외엔 싫습니다! 조건이 기울어도 레일라가 참해서 맞춰 주려 한 걸 모른답니까?”

브루스 후작이 호통 치듯 말하자 아비에르 백작이 울며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 딸이 너무 가엽습니다. 이제 막 스물한 살인 제 딸은 홀로 이렇게 살아야 한답니까?”

“출산한 영애들도 결혼은 하더군요.”

과거가 깨끗하지 못해도 결혼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시베르가 바라는, 저보다 높은 직위의 사람과는 아니었지만.

한참 직위가 낮거나 한참 나이 많은 사람의 부인으로 들어갈 순 있었다. 병환 혹은 나이가 들어 아내가 죽은, 노인에 가까운 사내들이 주로 그런 영애를 찾았다.

“브루스 후작 각하! 어찌 이러십니까! 제 딸이 가엽지도 않으십니까!”

“대체 어느 부분을 보고 가여워해야 한단 말입니까? 레일라도 당신 딸입니다! 제 언니가 돼먹지 못하게 몸으로 달려든 것 때문에 약혼자를 잃을 뻔한 레일라가 훨씬 불쌍합니다!”

그 말에 소네트가 레일라를 품에 꼭 안았다. 안 그래도 훌쩍이느라 숨이 모자라는데 그가 너무 세게 안아서 레일라는 숨이 막혔다. 갈빗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도 겨우 소네트의 팔을 붙잡고 아련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먼저 소네트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야. 나는 둘째라도 좋아. 레일라 네가 낳은 아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줄 수 있어.”

소네트가 그렇게 말하며 레일라의 허리를 꼭 안았고.

시베르는 제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당황해 아비에르 백작을 보았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레일라와 치르겠습니다.”

소네트가 결심한 듯 그렇게 말했고.

시베르는 이번엔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르멘 아비에르도 이 상황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대로 제 남편만 응시했다.

“가자, 레일라.”

“레일라는 데려가지 마시죠. 아직은 제 딸입니다.”

아비에르 백작은 레일라를 설득하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이젠 저희 가문 며느리죠. 시베르 영애가 품은 아이라도 거둬 주는 걸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브루스 후작이 한숨을 쉬며 소네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생각보다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리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듯.

소네트는 안도하듯 부은 눈으로 레일라를 바라보았고.

레일라는 울어서 부은 소네트의 얼굴이 제가 알던 그의 얼굴에 비해 심하게 다른 걸 보고는 일부러 땅만 보았다.

“레일라, 제발. 결혼 전이라도 백작저에 있거라! 나는 네 아비가 아니더냐!”

물론 레일라 역시 진짜로 소네트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기에.

“저희 결혼을 반대하실 거라면…….”

“안 하겠다. 그러니 남거라.”

제 아버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절대로 안 하시기로 해요. 저는 소네트가 정말 좋아요. 지금까지 이렇게 제 운명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한 번도 없어요.”

“……레일라.”

“저도…… 저도 소네트와 결혼하지 못할 바엔…….”

그녀가 나쁜 말을 하려 하자 소네트가 부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러마.”

아비에르 백작의 말에 안도한 듯, 브루스 후작과 소네트는 서로를 마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일 다시 오죠.”

“내일 봐, 레일라.”

소네트는 레일라만 두고 가는 게 불안하다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브루스 후작은 자신이 중앙 귀족이며 가진 힘이 막강함을 잘 알았기에, 아비에르 백작이 무언가를 더 꾸밀 리 없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방으로 올라가거라, 레일라.”

레일라는 눈물을 참는 척하며 제 방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1층의 응접실에 남은 아비에르 백작과 백작 부인, 그리고 시베르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일라가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자 창을 타고는 응접실의 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듯했다.

울며 악을 쓰는 시베르.

그리고 화내는 아비에르 백작의 목소리.

거기에 말리는 듯 우는 백작 부인의 목소리까지.

“하하하.”

레일라는 어딘지 모르게 웃음이 나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 어느새 나타난 레이니어가 묘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이지 않나요? 저 지금 웃었는데.”

“안 괜찮으니 제가 나타났죠. 그런데 웃고 계셔서요.”

그녀가 손수건을 보고만 있자, 레이니어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뺨을 닦아 주었다.

“안 괜찮으시다면 최후의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뭐죠?”

그러자 그가 목을 긋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의미를 깨달은 레일라가 픽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선 넘지 말아요.”

“예, 조심하죠.”

그녀가 말할 때마다 방울져 떨어진 눈물을 닦아 주던 그는 심란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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