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04화
“아까는 안 된다면서요.”
실상 레이니어는 그녀가 열쇠를 쥐고 번개를 치려 할 때, 그냥 자신이 나타나서 대신 번개를 내릴 생각이었다.
“어렵고 까다로워서 그렇지 할 수는 있습니다. 비싸게 군 겁니다.”
“줘요, 열쇠.”
레일라가 거절할 걸 알았기에 일부러 그런 조건을 걸어 둔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 왜 하필 초커예요? 기왕이면 팔찌라든가 그런 게 낫지 않나요?”
“팔찌는 제 마음을 전하기엔 부족하죠. 저는 아가씨께서 열쇠를 버리신다면 영원히 순결을 지키며 살아야 한답니다.”
“아깐 순결을 안 지키면 풀린다면서요.”
“전 열쇠로 푸는 거 아니면 영원히 차고 있을 거라서요. 참고로 일부러 보이는 곳에 찬 겁니다. 매일 보시라고요. 그리고 가죽띠라 한여름이 되면 힘들지도 모릅니다.”
가벼운 열쇠였건만, 그 말에 갑자기 열쇠가 무겁게 느껴진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제가 실수로 잃어버려서 영원히 못 풀 수도 있어요.”
“그럼 그런 거죠.”
“레인은 그게 아무렇지 않아요? 평생 이걸 달고 살 텐데요?”
“육체적인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는 제가 살아온 수천의 세월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있었다면 회귀도 끝났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지금 생이었다. 비록 그녀의 정부가 될 수도 있고, 그녀가 저를 온전히 사랑해 주는 첫 번째 생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단편적으로나마 사랑받을 수 있다면 모든 걸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레인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저보다 훨씬 어른같이 느껴져요.”
“그럼 안 되는데요. 동등하게 느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처럼 말하면 동등해 보여요.”
“그렇군요.”
그가 조급하다는 듯 말하자,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번개는 어떻게 쓰는 거예요?”
“일단 저를 생각하시고요.”
“……이거 반지랑 원리가 비슷한데요?”
“제 힘이니까 제 생각을 해야죠.”
그녀는 수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가 웃자 마저 들어보기로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레인을 생각한 다음엔 어떻게 해요?”
그녀는 어찌 되었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다.
지금껏 남자들에게 매달렸을 때는 하찮은 취급을 받았더라도 선을 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생과 다르게 행동하자 다들 이상하게 변해 갔고.
지금껏 몇 번이나 위험할 뻔했는지를 떠올린다면, 그녀도 이제 더는 남자 같은 건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건지, 독심술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레이니어는 레일라를 안심시켜 줬다. 마치 믿어도 된다는 듯, 그렇게.
“시동어를 정하면 됩니다.”
“어떤 걸로 정하죠?”
“레인이 최고야? 보고 싶어요, 레인?”
“둘 다 별론데요.”
“상처받았습니다.”
레이니어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레일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제 턱을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나와라 번개?”
“제 힘인데 왜 번개만 강조됩니까?”
“그럼 나와라, 레인 번개?”
“…….”
“농담이에요.”
레일라는 그가 또 거짓으로 웃는 걸 보고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레인 본명이 레이니어죠?”
“예.”
“그럼 레이니어 어때요?”
“그건 별로네요. 애칭으로 안 부르니 멀어진 느낌입니다.”
“레이니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긴 해요?”
“제 아버지요.”
“아…… 황제 폐하요. 그럼…… 음…….”
레일라가 고민하는 사이, 레이니어는 제 본명을 다 부르는 사람이, 이번 생에선 제 아버지밖에 없음을 떠올렸다. 그러자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레이니어 좋네요.”
“아깐 싫다더니.”
“제 진짜 이름이 허락된 사람이 세상에 단둘뿐인 것 같아서요.”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해 봐도 돼요?”
“예.”
그녀는 몬트의 집무실 옆으로 섰다. 커다란 창이 보였고, 그녀는 밖을 보며 말했다.
“레이니어.”
그러자 뒤에 있던 레이니어가 몰래 손을 튕기며 능력을 발현했다.
-우르릉쾅쾅!
“세상에.”
그는 그녀를 어쩐지 속이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위급할 때 저를 불러 주길 바랐기에.
“이건 한번 쓸 때마다 충전해야 하는 거니, 쓰고 꼭 제게 말하시죠.”
“그럴게요. 어떻게 충전해요?”
“이렇게요.”
그는 레일라의 손을 꼭 잡고는, 그녀가 무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제 힘의 일부를 그녀의 몸으로 이동시켰다.
레일라는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기운이 제게 도달하는 것 같아 이 돌팔이 같은 행동이 실상은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고.
“든든하네요.”
그렇게 기쁘게 웃었다.
다음엔 절대,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