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08)화 (108/108)

쓰레기 남주는 필요 없어 108화

“제가 저 다음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일라가 확신에 찬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잘 믿지 않았다. 스스로에게야말로 실망한 적이 많았으니까.

그렇지만 자신을 제알 잘 아는 이는 역시 자신이고, 그런 저를 아껴주는 레이니어도 믿고 싶었기에.

그녀의 말에 레이니어가 황홀하게 웃으며 레일라를 바라보았다.

문득 황제의 시선이 레이니어에게로 가 있었기에, 레일라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니어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따스하면서도 읽기 어려운 감정을 담은 그 표정.

마치 제게 집중하는 듯하면서도, 사물의 움직임을 느리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 여유로운 눈웃음까지.

그녀는 레이니어의 눈을 보자마자 안도하듯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런 둘을 보자 황제도 온화하게 웃었다.

자신이 떠나면 세상에 레이니어의 편이 아무도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을 종종 했었다.

황제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황후는 떠났고, 이제 그 자리에는 레이니어를 아껴 줄 듯했으나 실상은 죽이려 했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황제는 그 일이 매번 레이니어에게 미안했었다.

제 실수로 그가 죽을 뻔했으니까.

‘폐하, 꼭 우리 아들을 지켜주세요.’

죽은 황후의 유언을 처절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오래 알던 사이인가?”

“아, 아닙니다. 저희가 안 지는 오래 안 되었습니다.”

“시간과 깊이가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있죠.”

레이니어의 말에 레일라가 부스스 웃었다.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그래, 나도 알지.”

레이니어가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자, 황제는 또 마음이 약해지며 웃었다.

“저를 이렇게 불러주신 데에 감읍하여, 소정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받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레일라가 긴장한 듯 말하자, 황제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말해도 된다네.”

“아닙니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 어찌 그러겠습니까!”

레일라가 들고 있던 상자를 황제에게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녀의 토끼 같은 모습을 보자 껄껄 웃었다.

레일라가 건넨 상자는 가벼웠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문서가 들어 있었다. 문서들을 눈으로 훑은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영애에겐 모든 걸 말했나 보구나.”

“네.”

황제는 레일라가 건넨 서류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레일라 아비에르 영애.”

“레일라라고 불러 주세요, 폐하.”

그녀가 황제에게 여전히 고개 숙이고 있었기에, 레이니어가 그녀가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어깨에 손을 올렸다.

“레일라, 레이니어의 계획이 실패하면 그대는 죽을 수도 있느니라. 그래도 괜찮은가?”

레일라는 그 말을 듣자, 조금 두려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유를 물어도 되는가?”

황제의 말에 레일라가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생각을 차분히 입 밖으로 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는 지금까지 저를 믿어 준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레이니어 황자 전하께서는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황제는 제 아들을 응시했다. 레이니어는 온화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말을 들어주려는 사람을 본 적 없고요. 그리고 저를 가장 소중하다고 해 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레일라는 그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우면서도 창피했다. 그러면서도 감정이 울컥 올라와서 목소리가 떨렸다.

“레인이 저를 소중하게 대해 줘서, 저도 레인이 너무 소중해졌습니다.”

동업자라는 걸 밝히러 온 것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상견례 자리에 나온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그녀가 건넨 서류는 라미엘라 황후와 아나시스 황태자가 비셔스 은행에 예치한 자금을 법적으로 묶어 버릴 수 있는 증거 자료였건만.

제출한 자료는 무척이나 사무적이고 레이니어 황자의 복권을 돕는 영역을 논하는 걸 텐데.

황제도 레일라도 무척이나 감정적인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내겐 그거면 됐구나.”

황제가 안도한 듯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손을 한번 잡아 보고 싶구나.”

레일라는 황제가 뻗은 손을 천천히 잡았다. 병환으로 온기가 거의 없는 손과 앙상하게 마른 손목, 그리고 세월이 보이는 눈가의 주름까지.

레일라는 죽은 제 친엄마가 생각났다. 그녀의 엄마도 이렇게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으니까.

“우리 레이니어를 잘 부탁하겠소, 레일라.”

“네.”

“부디 아껴주시게.”

“물론입니다.”

황제는 레일라가 가짜로 울먹이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보이는 것은 사람의 진심이었으니까. 황제만큼 사람의 가식과 진심을 구분하는 데 능해질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기도 했고.

“믿겠소.”

“네.”

그렇게 레일라는 이상하지만 따스하고 안도감이 드는 알현을 마칠 수 있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