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2. 그녀가 골드를 버는 방법.
* * *
“아. 더럽게 춥네.”
하영은 얇은 이불을 옆으로 치우며 일어났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내 방이 이렇게 춥던가? 하영은 밀려오는 졸음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를 따뜻하게 해줄 전기장판을 찾았다.
‘이쯤에 있었던 거 같은데.’
하영은 최근에 구매한 전기장판의 버튼을 찾기 위해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전기장판의 버튼은커녕 장판과 연결된 콘센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분명 이제 곧 겨울이라 구매했었던 거 같은데. 왜 손에 잡히지 않는 걸까.
“엄마. 전기장판 어디 뒀는지 아…”
밀려오는 졸음에 눈도 뜨지 못한 채 전기장판을 찾다, 시원한 풀의 향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씨발.”
방안에서는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대자연의 향기가 어제의 일들이 모두 현실임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집안에서 스마트폰을 하다 잠이 든 것이 꿈이고 소설에 빙의한 것이 현실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 누가 봐도 후자가 꿈이고 전자가 현실이어야 하는데. 왜 이 둘이 뒤바뀐 것일까.
하영은 깊은 허탈함을 느꼈다. 꿈속에 있었던 일들이 현실처럼 느껴져 더욱 타격이 컸다.
‘꿈인 줄 알았으면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인사라도 하고 올 걸 그랬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평소에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지 못했었기에 더욱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 자면 꾸던 꿈을 이어서 꿀 수 있을까.’
하영은 반쯤 뜬눈으로 위를 바라봤다.
익숙한 전등과 벽지 대신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햇빛이 그녀를 내리쬐고 있었다.
“따뜻하네.”
하영은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돼서 그런지 햇볕의 따뜻함이 더 잘 느껴졌다.
“잠시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지친 자신의 마음을 달래주는 듯한, 자연의 포근함에 하영은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다.
햇빛이 점점 강해지고, 주위의 온도가 올라간다.
찬바람도 어느 순간부터는 불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새벽이 지나갔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아. 이제 좀 살겠네.”
졸음이 좀 가신 하영은 잠에서 빨리 깨어나기 위해 눈을 비볐다.
조금 강하게 비벼서 눈곱도 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곱은 떨어지지 않았다.
“와, 뭐야 미녀는 눈곱도 없는 거야?”
하영은 천천히 눈 주변을 만져봤다. 매끈했다. 눈곱은커녕 흔하디흔한 기름기도 하나 없었다. 원래 내 몸이라면 눈곱이 여러 개 있었을 텐데, 이런 조그마한 변화에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미녀 대단해.”
미녀는 노폐물도 없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역시 미녀는 인간이 아닌 건가.”
잠기운을 어느 정도 몰아낸 하영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주변을 정리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뻗친 머리를 대강 정리한 후, 옆에 있는 이불을…… 이불을? 이불이 아니네?
“어쩐지 춥더라.”
하영은 이불이라 생각했던 것을 바라봤다. 이불의 정체는 어제 구매한 로브였다.
“하, 꿈속에서는 두꺼운 이불과 따뜻한 침대에서 자서 엄청 따뜻했는데.”
꿈속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푹신푹신하고 따뜻했는데. 알고 보니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싸구려 로브라니. 이것이 원효대사의 해골 물?
「주인님 안녕하새오!」
하늘에서 상태창이 내려왔다. 어디가 있나 했더니 하늘에서 구름인 척 돌아다녔었나 보다.
“오냐.”
시간이 좀 지나 상태창에 익숙해진 하영은 로브를 어깨에 걸치고 나무에서 내려가기 위해 상태창의 등에 올라탔다.
깃털은 여전히 푹신푹신해서 기분 좋았다. 따뜻하고 푹신한 게 마치 꿈속에서 덮었던 이불 같았다.
‘이 새는 혹시 털갈이 안 하려나.’
하영은 농축된 구름처럼 상태창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만약 털갈이한다면 이 깃털을 모아 최고의 침대를 만들고 마리라.
그렇게 작은 다짐을 하고 나니 어느새 지상이었다.
“고맙다 새태창!”
새 모양의 상태창이니 이제부터 넌 새태창이다.
하영은 상태창의 등에서 점프해 지상에 내려왔다. 확실히 내가자던 나무가 높긴 했나 보다, 지상에 내려오자 온도가 확 올라간 느껴졌다.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지상에 내려와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해진 하영은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시청자들을 위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바른말만씀: 이 씹련 입은 거 봐라 정자도둑년이네.
미션석세스: 하영이 어서 오고~
꿀벌아넣을게: ㄹㅇ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다 왜 이리 오래 자냐.
내이름은야스머신: 새랑 야스시 300골드.
낭만검객: 어허 여기 그런 방 아닙니다.
하영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채팅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채팅 중간마다 모르는 닉네임들이 조금 있었다.
아무래도 자는 사이에 시청자가 추가로 들어왔나 보다.
“새로 오신 시청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정하영입니다.”
하영은 일단 첫 만남이니만큼 산뜻하게 출발하기로 했다.
올라오는 채팅들을 보니 더 이야기 안 해봐도 정신 나간 이들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인사는 나누고 싶었다.
바른말만씀: 너 때문에 내 분신도 안녕했잖아 ㅅㅂ련아!
병신을보면짖는개: 월! 월월! 월화수목금토일! 월!
천신대가리멈춰: ㅈ같은 채팅 멈춰!
악질방송만보는사람: 그럼 ㅈ같은 미션은 ㄱㅊ음?
방송계의유니콘: 뒤지기 싫으면 우리 하영이 건드리지 마라. ㅇㅇ
“음… 혼란하네.”
채팅창을 보던 하영의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닉네임을 보니 이번에 들어온 이들도 기존 시청자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거 같아 마음이 심란했다.
군침도는사람: 하. 애 표정을 보니 군침이 싹 도노.
천신대가리멈춰: 군침이 돌면 니M2한테 가서 밥 달라해라, 하영이한테 뭐라 하지 말고 ㅋㅋ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아니, 닉네임 때문에 마음이 심란하니까 싸우지 좀 말아줘 봐요 선생님들.”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리는 하영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기존의 악질 시청자들이 새로 들어온 시청자들에게서 자신을 지키려는 상황에, 오히려 묘하게 기분 좋을 정도였다.
뭔가 여왕벌의 기분을 살짝 알 것 같았다.
하영은 채팅창을 살피다 슬쩍 모인 골드 확인했다. 예상대로 어제 자기 전보다 딱1,000골드 늘어났다.
“상태창아 혹시 상점에 영약처럼 능력치를 올려주는 소모품은 안 팔아?”
하영은 이어서 상태창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다. 채팅창은 서로 싸우기 시작해서 무시했다.
「호애애. 물품이 있긴 있지만 무언가 조건이 있는 것이 새오. 현재는 구매가 막혀있는 것이 새오.」
상태창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구매는 불가능하지만, 능력치를 올려주는 소모품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희망이 생겼다.
“그럼 스킬이나 특성은 팔아?”
능력치를 보완한다 해도 재능 없는 몸에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려면 좋은 스킬과 특성이 꼭 필요했다.
하영은 잔뜩 긴장한 채 상태창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상태창의 부리에서 대답 대신 글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 역시 존재했구나!”
허공을 메우는 글자들을 본 하영이 신이 나 소리쳤다.
시청자들이 보고 있으니 자연적인 감정은 자제하려 했지만, 자신의 목숨 줄이 점점 단단해지는 이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반 스킬 알약. 10,000골드 현재 구매 가능 수량 10개」
「고급 스킬 알약. 현재 구매 불가.」
「특별 스킬 알약. 현재 구매 불가」
「일반 특성 알약. 10,000골드 현재 구매 가능 수량 10개」
「고급 특성 알약. 현재 구매 불가.」
「특별 특성 알약. 현재 구매 불가.」
“어. 좀 비싼데.”
하영은 상점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스킬 구매 방식이 가챠인 건 한국화 됐다 쳐도, 생각보다 가격이 많이 나갔다.
“하지만 특성은 못 참지. 이렇게 된 이상 스킬은 어제 얻은 걸로 당분간 사용한다 치고 특성에 모든 골드를 사용한다.”
하영은 현재 유일하게 구매 가능한 특성 알약인 일반 특성 알약을 구매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흠칫.
구매 버튼을 누르려던 하영의 손이 멈췄다.
‘아니, 잠깐만. 이거 꼭 내가 살 필요가 있나?’
하영은 고개를 슬쩍 돌려서 채팅창을 바라봤다.
낭만검객: 아, ㅆ2발 또 눈깔 저 따구로 뜨네. 여우같은 씹련.
꿀벌아넣을께: 하영아 아니지? 그치?
야스마스터: 이거완전 골창년이네;
즉석나비탕24시: ??? 뭐임? 무슨 일인데 갑자기 이럼?
여신따먹고싶다: 뉴비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채팅치자. 나 화내기 전에.
“으음…”
생각해보니 이렇게 나를 위해줄 사람이 많은데 직접 골드를 사용하는 건 손해 같다. 채팅도 그렇게 나쁜 분위기는 아닌 거 같으니 못 먹어도 한번 떡밥을 던져 봐야겠다.
“자! 어제의 콘텐츠는 옷을 입히는 거였죠?”
낭만검객: ??????
아가리롤스타: 하영아. 이 씹련아. 또 뭘 하려고…
야스마스터: 그냥 우리가 거는 미션 얌전히 받아먹자 하영아.
여신따먹고싶다: 이게 맞다.
생존게임좋아요: 저기… 싸움은 언제 하시는 건가요?
미션석세스: 아. 잠깐만. 나 애 뭐하려는지 알거 같아. ㅅㅂ
어제의 콘텐츠가 취향에 맞은 덕분인지 시청자들이 금방 관심을 가져 줬다. 뭐? 불안해 보이는 거라고? 어허. 내 시청자들을 얕보지 마. 그들은 악질 중의 악질이라고.
채팅을 뚫어져라 확인하던 하영은 자본주의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옷을 입혔으면 이제 벗겨야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어제와 반대로 옷을 벗기는 게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