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4. 문어, 악마, 나. 곤란.
* * *
정신 없던 튜토리얼의 마지막 밤이 지났다.
하영은 자신을 감싸는 서늘한 감각에 눈을 떴다. 30일 동안 지냈음에도 자연에서 느끼는 새벽은 너무 춥다.
“하. 얼어 죽겠네.”
하영은 일어나면서 투덜거렸다.
모든 내성을 갖추고 있는 스타킹 덕분에 다리는 따뜻했으나. 제일 중요한 얼굴은 추위에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냥 다음부터 노숙할 일이 있으면 스타킹을 얼굴에 써버릴까.’
하영은 변태로 몰리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영님. 기침하셨습니까.”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 정동일이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언제 들어도 든든한 친구였다.
“안녕하세요.”
하영은 인사를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주변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하영님을 제외, 나머지 인원 모두 탑이란 곳으로 향했습니다.”
“호오.”
“던전처럼 포탈이 생기더군요. 하지만 붉은색 포탈이었던 던전과 다르게 색은 파랬습니다.”
“신기하네요.”
하영은 놀랍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현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소설을 열심히 읽은 덕분이었다.
‘아니, 잠깐만. 소설을 안 읽었으면 이 썅년에게도 빙의 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영은 문득 든 생각에 머리를 붙잡았다.
지금까지는 소설을 읽어놔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던 하영이었으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읽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영님?”
갑작스러운 하영의 이상 행동에 동일이 걱정을 해왔다.
은근슬쩍 내 어깨를 잡았으나 특별히 용서해주기로 했다. 난 아량이 넓으니까.
“아. 너무 추워서 순간적으로 두통이 왔었습니다.”
하영은 그렇게 말하며 동일의 손을 슬쩍 내쳤다. 그럴듯한 변명에 동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다행입니다.”
동일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하영을 걱정했던 거 같다.
“아! 그런데 동일님은 왜 포탈로 안 들어가셨나요?”
하영은 잠기운도 몰아낼 겸 동일과 수다를 떨었다.
아니, 수다를 떨려 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하영님 이쪽입니다!”
하영의 말에 잊고 있던 게 깨닫기라도 했다는 듯, 동일은 하영을 붙잡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잠에 취해있던 하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하며 멍하니 따라갔다.
“여기가 바로 1층 포탈의 위치입니다.”
동일은 두 손을 모으더니, 정중히 포탈을 가리켰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뭔가 대접받는 느낌이었다.
“혹시 길을 잃으실까봐, 제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동일은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볼일은 없다는 듯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럼 다음번에 또 봅시다! 하영님!”
포탈 속으로 사라지는 동일의 몸에 하얀색 빛이 스며들었다.
“어… 그래 다음에 보자. 다음에…”
하영은 동일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하얀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듣고 싶은 말인지 몰랐다.
“…드디어 얻는구나.”
잠시 멍때리던 하영은 뒤늦게 전율했다. 하얀색 빛, 그것의 정체는 현대의 모두가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믿고 있었다고 상태창!”
하영은 신문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포탈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렇게 돌아다녀도 하얀색 빛이 안 나오는 걸 봐서는 들어갈 때 상태창을 받는 시스템 같았다.
“하하하! 선생님들 모두 보고 계십니까!”
하영은 미친년처럼 허공을 보며 소리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포탈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면 다들 쳐다봤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아아. 오랜 모멸과 핍박의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주도권을 가져올 시간이다!”
하영은 망설임 없이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바로 하얀색 빛이 나왔다. 하얀색 빛은 하영을 한 바퀴 맴돌고 하영의 몸속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보다 한 발 앞서 새태창이 나오기 시작했다.
「호애애! 맛있는 먹이인 것이새오!」
하영은 불길함을 느끼고 재빨리 반대편 손으로 새태창이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호애애! 상태창 먹이 먹고 성장할 것이새오!」
역부족이었다. 이미 새태창은 반쯤 나왔다. 꽤 큰 크기를 자랑하던 포탈이 새태창을 다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안 돼!”
하영은 소리쳤다. 이럴 수 없다. 하루에 20시간은 자는 이런 아기 새대가리에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뺏길 수는 없었다.
「호에에에! 냠!」
쓸데없는 발버둥이었다. 새태창은 기어코 부리를 벌리더니 하얀색 빛을 게 눈 감추듯 삼켜버렸다.
「옴뇸뇸! 상태창! 먹이 먹고 진화한 것 이새요!」
새태창은 하얀빛을 날름 먹고 다시 손으로 사라졌다.
“아……”
포탈은 벙찐 하영을 그대로 탑의 1층으로 이송시켰다.
***
아파트 15층의 크기의 큰 성당. 그곳에서 하영은 눈을 떴다.
“말도 안 돼.”
정신을 차린 하영의 첫 말이었다. 악몽 같은 상황에 놓인 하영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모두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다.
야스마스터: ???: 하하하! 선생님들 모두 보고 계십니까!
낭만검객: 네 보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악질방송만보는사람: ???:아아. 오랜 모멸과 핍박의 시간이었다. 이제 다시 주도권을 가져올 시간이다!
미션석세스: 모두 도망쳐! 상태창을 뺏겼어!
검은콩나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군침도는사람: 하영이 커여워서 군침이 돈다.
눈의 초점이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많은 사건으로 견고하게 쌓인 하영의 멘탈이 살짝 흔들렸다.
“이 쪽으로 오시죠.”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미녀가 하영을 반강제로 끌고 가지만 않았어도 하영은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영은 자신을 손을 내려다봤다. 새태창이 잠들어 있는 손에 이상한 낡은 주문서 같은 게 들려있었다.
튜토리얼의 클리어 보상 중 하나인 귀환 주문서였다.
“왜, 보조 보상은 잘 왔는데. 메인 보상은 오지 않은 거야? 탑의 의지? 해명해라.”
하영은 귀환 주문서를 허리춤에 매단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눈매의 미녀는 그런 하영의 모습에 혀를 찼다.
“쯧, 이 문을 통해 강당 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미녀는 큰 문 쪽으로 하영을 밀어 넣고는 검은 돌 같은 것에 입을 대고 말했다.
“321회차 187튜토리얼 지역. 마지막 분 들어갑니다.”
[포탈이 사라지는 건 확인했나?]
“네 확인 했습니다.”
[수고했다.]
***
탁.
조금 전 마지막 튜토리얼 클리어자가 포탈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가 수신용 마석을 큰 탁자에 올려놨다.
“올해도 많이 모였군.”
남자는 자신의 앞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이게 튜토리얼 지역 100부터 200까지의 사람 수라 이거지…”
남자의 이름은 김길태. 치유 불가능 판정을 받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탓에 초보 등반자를 인도하는 신세가 됐으나, 그전까지는 중층이라 불리는 50층까지 등반했던 남자다.
“이제 곧 인가.”
영광스러운 과거 탓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던 길태는 포탈이 열리고 5시간 이 넘도록 오지 않은 지각자를 기다리며 이를 갈았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했는지 얼굴 좀 꼭 봐야겠다.”
진짜 얼굴만 볼 생각은 아니었다. 길태는 지각자가 남자라면 두들겨 패고. 미녀라면 설명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좀 불러서 재미 좀 볼 생각이었다.
“흐. 개인적으로 미녀였으면 좋겠군.”
길태는 이제 곧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며 씩 웃었다. 하얀 이와 머리털 하나 없는 머리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끼익.
길태가 웃고 있던 그 순간, 거대한 문이 열렸다.
“드디어 왔나.”
길태는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검은 머리의 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복장을 보아하니. 무림인인가. 얼굴도 예쁜 게 꽤 쓸 만하겠어.”
길태는 자신의 부하나 다름없는 이들이 탑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대강 들으며, 이제 막 들어온 검은 머리 미녀를 쳐다봤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미모와 복장이었다.
다리를 전부 밖으로 내놓은 미녀는 설명을 듣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덕분에 얼떨결에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예쁘잖아. 이거 횡재 했네.”
정면에서 미녀를 보게 된 길태가 속으로 환하게 웃었다.
상상 속에서 그는 이미 저 미녀와 오 한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응?”
그런데 상상속의 그 미녀가 갑자기 길태가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생가하지 않고, 두 다리를 딱 붙어 걷고 있는 미녀의 걸음걸이에 툭 튀어나온 골반이 씰룩거렸다.
‘순산형 골반인가. 이거 미치겠군. 몸짓 하나하나가 다 야해빠졌잖아.’
길태는 계속해서 고이는 침을 삼키며 걸어오는 미녀의 자태를 구경했다.
중간에 그의 후배가 ‘제지 할까요?’라고 물어봤으나 길태는 고개를 저었다. 저 음탕한 미녀가 무슨 짓을 하러 이쪽으로 오는지가 궁금했다.
“안녕. 예쁜이.”
길태는 자신에게 바짝 다가온 미녀를 보며 인사했다. 그들의 만남에 어느새 강당은 조용해졌다.
탑에 대해 설명을 하던 남자도 말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길태는 코웃음을 쳤다.
너넨 손가락이나 빨라고. 난 탐스러운 이 과육을 빨 테니.
이런 미녀를 공유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 우리 예쁜이는 아직 설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이 곳으… 로?”
우선 찔러 보기 식으로 말을 던져서 미녀를 먹어보려던 길태는 그녀가 하는 행동에 황당함을 느꼈다.
미녀, 아니 하영은 까치발을 들어 길태와 키를 비슷하게 맞추더니, 길태의 대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길태는 멍하니 하영을 바라봤다. 하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와 시발! 요즘은 문어가 육지를 걸어 다니네!”
후일 무대포 썅년으로 불리는 하영의 첫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