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4. 문어, 악마, 나. 곤란.
* * *
문을 열고 들어가자,큰 통로가 보였다.
“으리으리 하구만.”
하영은 멋스럽게 생긴 돌기둥을 만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외국 건축물이랍시며 이미지로만 보던 기둥이 눈앞에 있으니 신기했다.
“그렇지 않냐? 새태창아?”
하영은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에 군기가 바짝 든 새태창이 답했다.
「호애애애! 맞는 것이새요!」
“조용히 해 새태창아.”
하영이 새태창이 들어 있는 손을 살짝 때렸다. 새태창은 억울했지만 참았다.
지금은 기분이 좀 괜찮아 보이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하영은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
“옳지, 그래. 앞으로는 내 말 잘 듣자.”
「호애…」
힘없는 대답에 하영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퉁명스럽게 굴긴 했지만, 사실 하영은 상태창의 실종에 아쉬움을 어느 정도 달랜 상태였다.
아니, 달랬다기보다는 단념에 가까웠다.
하영은 정신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미 지나가 버린 기회를 따지지 않았다. 후회해봤자 기회는 돌아오지 않고, 정신만 피폐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호애애! 저만 믿는 것이새오!」
…사실 하루 12시간만 자도 충분하다며 큰소리로 자신의 변화에 대해 어필해온 새태창의 덕이 컸다.
“그래, 그래 알았다. 새태창아 이제 좀 조용히 좀 해라”
하영은 멋들어진 금빛의 문양이 새겨진 문 앞에서 서서 말했다. 튜토리얼 때부터 그랬지만, 하영은 될 수 있으면 이 새태창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외모와 복장 때문에 시선이 끌리는데 이런 묘한 말을 내뱉는 새까지 같이 다닌다면 너무 이목이 확 끌릴 것 같아서였다.
“이목이 끌리면 좋을 게 없지.”
하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망설임은 없었다. 아까 통과한 대문보다 크고 멋진 걸로 봐서는 이곳이 가야 할 목적지 맞았다.
소설 속에서도 대문보다 큰 문을 지나 강당으로 들어갔다며 적힌 부분이 있었다.
“와. 노골적인데?”
안으로 들어온 하영은 주변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족히 만 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서서 단상 위의 사람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상급자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회귀한 주인공이 왜 1층부터 깽판을 쳤는지 알만해.”
의자도 없이 설명을 들으라는 이 거만한 태도. 누가 봐도 자신들은 위고 너희는 밑이라는 시선 처리. 힘을 가진 미친놈이 깽판을 안 치려야 안칠 수 없는 구조였다.
‘대체 누가 이런 방법을 생각해낸 건지 원…’
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설 속 윗대가리들은 기고만장한 초보 등반자들의 기를 죽여 나대다가 죽는 이들을 줄이기 위함이라며 좋게 포장하긴 했지만.
하영이보기에 30일 동안 데스매치를 치르고 온 이들에게 이러는 건 그냥 똥 군기였다.
‘뭐, 효과가 아예 없어 보이진 않지만.’
하영은 터덜터덜 걸어가 사람들의 줄 맨 끝에 섰다. 하영이 오기 전까지 꽤 많이 갈굼을 당한 듯,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주변인들은 단상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는 얼굴은… 안 보이네.’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는 사람이 없나, 조금 찾아봤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찾을 수 없었다.
같은 포탈에서 나온 사람끼리 줄이라도 세워두면 좋았을 것을…
하영은 배려심이 없다며 투덜거리면서도 단상 위에 서 있는 남자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튜토리얼은 끝이 났지만! 우리는 인정하지 못한다. 탑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튜토리얼은 형편없다! 그러니 탑을 오르기 전에! 이 1층에 있는. 3개의 탑 중 하나를 오르는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다!”
“앞으로 그대들이 오를 탑은! 이 세 개의 탑을 모두 포함, 다양한 시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알겠나!”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소리가 잘 들리는 걸로 봐서는 마이크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스킬을 보유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이제 이 1층에 있는 탑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단상의 남자가 하는 말을 듣던 하영은 다 아는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귀를 닫았다. 소설에서 나오지 않던 뒷이야기라던가 왜 올라야 하는지 연설을 하기 시작했지만, 솔직히 알고 싶지 않았다. 하영은 자신에게 필요한 알짜배기 정보만을 원할 뿐이었다.
“우선, 이야기의 탑이다. 이 탑은 공상의 이야기를 무대로 한다! 그대들이 들어 왔던 이야기, 또는 다른 세계에서 널리 퍼진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어 그대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하영이 농땡이를 피우거나 말거나, 단상의 남자는 열심히 연설했다.
“다음은 과거의 탑이다! 과거에 실제 일어났던 일들이 지난 역사가 아닌 현실이 되어 그대들을 시험한다. 만약 그대들이 이 탑을 고르게 된다면! 대규모 전쟁 같은 위험한 과거를 집적 경험하게 될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하영은 채팅창을 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생긴 흑역사로 자신을 놀리고 있을 게 했기에, 채팅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남자가 하는 말이 다 아는 이야기인 탓에 영 재미가 없었다.
솔직히 몇 시간을 떠드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처럼 들릴 정도로 지루하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보다는 악질 채팅이 재미있겠지.’
훈화를 들을 때 하는 친구와의 메신저처럼. 참기에는 너무 힘든 유혹이었다.
낭만검객: 와 저 나이에 대머리라니. 이건 좀 많이 불쌍하다. 하영아 미션 걸게. 제랑 야스 해라. 10,000골드 줄게.
아가리롤스타: 여기 그런 방 아닙니다.
악질방송만보는사람: 그럼 반대로 대머리를 놀리는 건 어떰?
인방인생하급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천잰데?
tyam442: 이 방 좀 맵네요;
천신대가리멈춰: 대머리 머리 만지면 3,000골드 드립니다.
낭만검객: 받고. 대머리 문어라 놀리면 3,000골드 추가.
생존게임좋아요: 오오. 재미있을 거 같네요! 저도 미션 걸게요! 대머리에게 웃으며 욕하면 4,000골드입니다!
야스마스터: 모든 미션을 전부 하면 총 10,000골드? 미쳤다! 하영아 이건 해야 한다! 이거 하면 야스랑 동급으로 골드 벌어!
대머리? 채팅창을 보던 하영은 대머리라는 말에 의문을 느꼈다. 대체 대머리가 어디에 있다는 거지?
하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대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낭만검객: 아니. 저기 단상 위에 있잖아.
단상 위에? 하영은 고개를 들어 단상을 올려다봤다. 잠을 잘못 잔 탓인지 목이 좀 뻐근했지만, 육체 능력치 덕분인지 참을 만했다.
‘아, 그러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단상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빛을 발견한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봤을 때는 조명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의 머리에서 빛이 반사되고 있는 것이었다.
‘크흠 왜 하필 제일 위에서 저러고 있는 거야, 헷갈리게 시리.’
지금 까지 남자의 존재를 몰랐던 하영은 괜히 무안해져서 대머리의 남자에게 책임을 전가 했다.
내가 저 남자를 찾지 못한 건 저 남자가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어서 그런 거다. 내 잘못은 없다.
“마지막은 투쟁의 탑이다! 오르는 이에 맞는 시련을 부여하는 탑으로 오로지 혼자서 올라가야만 한다! 이 탑을 오르겠다는 건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조심하도록! 자신과의 싸움은 혈투 그 이상일 테니.”
남자는 이후 자신들이 있는 이 탑에 대한 시련에 대해 알려줬다.
본 탑은 3종류의 시련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시련이 섞여 있다며 강하게 주의를 주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미 책속에서 본 내용이기에 하영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투쟁의 탑이라…’
투쟁의 탑, 그건 주인공이 오르기 꺼렸던 탑이었다.
대머리를 보던 하영은 자세히 아는 탑이 나오자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잊고 있던 친구를 만난 느낌이네.’
하영은 친구와 즐거웠던 추억을 회상하듯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저 탑을 오르면 어떤 투쟁이 기다리고 있을까.]
[원혁은 우뚝 솟은 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1회차 때 내 트라우마가 투쟁의 시련으로 나왔던 걸 보면… 아마. 높은 확률로 99층의 시련과 본색을 들어 낸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이제는 존재 할 리 없는 미래와의 만남. 멈춰있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만약 탑을 끝까지 오르고도 다시 1층에 내려올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올라보고 싶군.’]
[원혁은 피식 웃으며 투쟁의 탑을 지나쳤다.]
“크, 그립구만.”
복수물 마니아의 가슴을 뛰게 하는 내용에 하영은 무심코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영은 저 부문을 읽는 순간 힘을 전부 키운 주인공이 외전으로나마 저 탑을 올라가 주는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그때 그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사건을 사이다로 뒤집어 주는 거지!’
하영은 주인공이 그런 일을 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울 자신이 있었다.
‘아! 내가 이런 썅년이 아니라 힘 있는 엑스트라도 빙의 됐으면, 주인공 곁에서 같이 복수를 즐겼을 텐데!’
30일간 농축된 스트레스 탓일까. 오랜만에 즐거운 상상을 한 하영은 쉴 새 없이 소설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그 부분에서 더 재미있던 점은, 저 3개의 탑 중에서 투쟁의 탑이 평균적으로 난이도가 제일 낮다며 투덜거리는 부분이었지!’
떠오르는 소설의 내용에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투쟁의 탑은 주인공은 가길 꺼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인들에게는 가장 쉬운 탑이었다.
투쟁의 탑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지구인들이 겪는 시련은 지구에서 일어날 법한 시련이었기에 난이도가 엄청 쉬웠다.
빠라밤.
갑작스러운 빵빠레 소리에 하영이 정신을 차렸다.
낭만검객님이 100골드 기부.
이 씹년아 딴생각 그만해.
하영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채팅창을 다시 쳐다봤다.
군침도는사람: 나는 애가 이럴 때마다 먹고 싶어서 침이 줄줄 흐른다.
내이름은야스머신: 같이 드실?
야스마스터: 좀 봐줘라. 애 멘탈도 약한 거 같던데.
꿀벌아넣을게: 미션할거면 고개를 끄덕여봐.
미션이라… 하영은 조금 전에 봤던 미션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대머리 남성에게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끌리는 제안이었다.
능력치 성장 보너스를 받고도 능력치를 거의 올리지 못한 나는 정상적인 성장 방법으로는 쉽게 성장할 수 없다.
능력치가 높을수록 올리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하영은 단순히 탑을 오르는 것만으로는 성장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30일 후에 들어오는 주인공이 내 몸을 간절히 원하고 있단 말이지…’
현재 상황상,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미안합니다.’
하영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대머리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우연일까?
대머리 남자의 시선도 내게로 향했다. 하영은 묘한 운명을 느꼈다.
‘여기 있는걸 봐서는, 어차피 당신도 주인공에게 당할 운명이야. 그러니 미리 살짝 경험한다고 생각해.’
하영은 결단을 내렸다.
터벅 터벅.
하영은 천천히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단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대화 소리가 줄어들었다.
이윽고 말을 하던 단상의 남자마저 말하기를 멈췄다.
“…”
조용해진 강당 안. 하영은 까치발을 들었다.
눈앞에 있는 대머리 남자에 대한 미안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와 시발! 요즘은 문어가 육지를 걸어 다니네!”
말을 내뱉는 순간, 묘한 쾌감이 느꼈다. 난생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안녕? 육지문어새끼야?”
하영은 환하게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정하영의 몸에 빙의한 여파가 있는 것 같다. 멈추고 싶은데, 기쁨에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
웃고 싶지 않은데 자동으로 입 꼬리가 씰룩인다.
“어휴, 만질만질해라.”
정말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