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30화 (30/85)

〈 30화 〉 4. 문어, 악마, 나. 곤란.

* * *

하영은 소설 속 내용대로 흐를 것이라는 걸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소설이 주인공의 시점 위주로 흘러가는 만큼. 다른 점이 몇 개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큰 틀은 이어져 갈 줄 알았다.

“이건…말도 안 돼.”

그렇기에 믿을 수 없었다.

하영은 혼미해질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모험가 길드주변을 돌아봤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나였다. 시체는커녕 핏자국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순찰의 효과가 있었나 보군.”

“하하하. 기껏해야 2층의 악마 아니겠습니까? 이래봬도 저는 투쟁의 탑을 뚫고 온 남잡니다.”

“이런! 악마가 누구에게 겁을 먹었나 했더니 이게 다 자네 때문이었구만!”

다른 이들은 순찰이 소용이 있었다며 좋아했지만, 원작 하나만을 믿고 버티던 하영의 입장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달라진 거지?’

숨겨진 보상의 획득은 7일 차에 마을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두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원작이 틀어졌는데 틀어진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설마… 소설에서는 12층이었고 지금은 2층이라 다른 걸까?’

하영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층은 다르니 난이도도 다르겠지만. 기본적인 틀은 변함이 없을 터였다. 이 층에 관한 이야기는 동화로 원작이 존재하는 층이니까.

“혹시 다음 층에 올라갈 때 나도 데려가 줄 수 있나?

“아, 죄송합니다. 저는 후방에서 딜을 넣는 마법계열이라… 저를 지킬 능력이 있는 무림인과 같은 팀을 이루고 싶거든요.”

투쟁의 탑을 클리어했다며 으스대는 등반자가 하영을 그윽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악마가 활동하지 못한다 생각하니 이제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저층에서 여자나 꼬시려 하는 거 보니, 미래가 딱 보이는구나.’

진실을 아는 하영의 입장에서는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하영은 자신을 바라보며 으스대는 남자 등반자를 지나쳐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저런 놈을 보며 생각을 정리 하는 것보다는, 자연의 풍경을 보며 하는 게 더 좋다고 판단해서였다.

‘시골 마을이라 그런가, 확실히 외곽으로 갈수록 사람이 급격히 줄어드네.’

처음은 아무 생각 없이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에서 산책하듯, 돌로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걸었다.

터벅. 터벅. 터벅…

그러다 이상함을 눈치 채고 걸음을 멈췄다.

마치 두 사람의 발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 같은 소리에, 하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작은 나무 몇 그루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었나?’

하영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방향은 마을의 중앙 쪽이었다.

“이봐! 아가씨.”

하영의 걸음은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깨를 잡혀 멈췄다. 역시 나를 따라온 사람이 있었나.

“용건이 뭡니까.”

하영은 지팡이를 든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랑 같이 탑 올라갈 생각 없어?”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말에. 하영은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애, 아까 그 으스대던 놈이잖아.’

하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여성취급을 당하는 건 서준영 이후로 처음이었다. 기분은… 아주 개 같았다.

“좋은 말 할 때 저리 꺼져.”

하영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게 헌팅을 받은 터라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우린 아주 좋은 조합을 이룰 수 있어!”

남자는 아쉬운지 계속 하영을 쫓아왔다. 하영의 몸만 한 지팡이를 들고 걷는 것이. 마법 계열의 등반자치고 육체적인 능력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를 무시했다.

그런 하영의 강렬한 수비에, 체력이 다한 남자 등반자가 포기를 선언했다. 쉽게 지치는 것을 보니 근력은 높지만 체력은 낮았나 보다.

“하아, 실패인가. 이것 참. 다른 여자 등반자가 있었으면 들 억울하기라도 할 텐데…”

멈칫.

중요한 단서가 될 거 같은 말에 하영의 다리가 멈췄다.

“뭐라고?”

하영은 돌아보며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하영의 반응에 불쌍한 척하며 투덜거렸다. 좀 비참했으나, 남자는 이렇게 해서라도 눈앞에 있는 미녀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등반자 30명 중에 여자가 두 명인 건 좀 그렇지 않아? 하아. 이런 성비면 내 사랑의 동반자는 어디서 구하냐고.”

“게다가 한명은 어제 시체를 보고 충격을 먹었는지 방안에서 나오지도 않더라니까?”

남자의 말에 하영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고맙다!”

하영은 남자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넨 후 급히 마을 쪽으로 향했다.

“어? 어, 이봐!”

뒤에서 누군가가 애절하게 하영을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

생각해보니 12층이 아닌 2층의 시련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등반자들의 차이였다.

‘바보 같았어. 등반자들이 소설 속과 같은 사람일 리 없는데…’

하영은 자신의 짧은 생각에 반성했다. 골드에 너무 미쳐있었나. 요즘 골드에서 주제가 멀어지면 바보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 방송계의유니콘: 나

­ 낭만검객: 락

­ 미션석세스: 나

­ 천신대가리멈춰: 나

­ 군침도는사람: 락

­ 아가리롤스타: 사람이 틀릴 수도 있지 ㅅㅂ럼들아. 뭐하나 건수 잡으면 ㅈㄴ 지랄하네.

­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 즉석나비탕24시: 락

하영은 난리 난 채팅창을 쳐다도 보지 않고 큰 도로 쪽을 걷기 시작했다.

등반자들이 전부 남자인지 확인하면서 계속해서 마을 주민들의 시야에 모습을 비췄다.

‘진짜로 한 명도 여자 등반자가 없잖아…’

약 1시간 후. 마을을 전부 돌은 하영은 모험가 길드의 앞에서 좌절했다. 무기를 소지한 채 걸어 다니는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 본 결과, 남자의 말대로 걸어도, 걸어도 보이는 건 등반자는 남자뿐이었다.

‘이게 현실?’

하영은 그 잔혹한 풍경에, 엑스트라로 빙의했던 소설의 주인공이 한 말이 떠올랐다.

[왜 소설 속에서는 강하고 예쁘고 착한 여자들이 많냐고? 그건 다 주인공 주변으로 그런 사람이 모여서 그래. 오히려 조금이라도 잘난 여자들은 주인공에게 몰린 터라 여자 찾기가 더 어렵다니까?]

맞는 말이었다.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지금 이곳과 같았던 12층만 생각해도. 조연으로 여자 캐릭터들만 5명은 나왔던 거 같다.

‘괜히 주인공이 아니다, 이건가.’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인물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하아.”

­ 낭만검객: 와 ㅅㅂ 악마 년이 악마 새끼 잡겠다고, 악마 같은 놈들을 유혹하고 있네. 이게 세상이냐?

­ 야스마스터: ㅋㅋㅋㅋㅋㅋㅋㅋ 하영이 걷는 게 보는 사람 미치게 하긴 하는듯

­ 미션석세스: 하영으로 이행시 해봄.

­ 꿀벌아넣을게: 하.

­ 미션석세스: 하영이 걷는 거 거보니까.

­ 바른말만씀: 영.

­ 미션석세스: 영영 밖으로 못 나가게 가둬서 평생 사랑을 나누고 싶다.

­ 아가리롤스타: 넌 그냥 나가라.

하영은 마을을 순회할 때 구매해둔 빵을 씹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반찬은 하영 놀리기 떡밥으로 한창 번창 중인 채팅창이었다.

“선생님들. 제가 오늘 마을을 계속 돌아다녔으니, 이제 제가 말한 대로 흘러갈 겁니다. 그러니 음해를 멈춰주세요.”

하영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 기레기는무슨새일까: 속보) 정하영, 온갖 음해에 시달렸다며 선언.

­ 미션석세스: 정하영으로 3행시 해봄.

­ 내이름은야스머신: 정.

­ 미션석세스: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 내이름은야스머신: 하.

‘역시 쉽게 멈추지는 않으려나.’

하영은 아공간 주머니에 침대를 넣어 보며 멈추기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여론이 잠잠해지면 스킬을 개봉하면서 수금을 할 생각이었다.

­ 아가리롤스타: 하영아, 오늘은 그냥 채팅 보지 말고 쉬면서 할 일 해라. 이거 내가 봤을 때 오늘 안에 진정 안 된다.

­ 악질방송만보는사람: ???: 성의를 보이면 스포해드립니다.

­ 꿀벌아넣을게: 아가리말이 맞는 듯.

­ 기레기는무슨새일까: 속보) 정하영 진짜로 채팅 안 봄.

­ 인방인생하급신: 하영아. 힘들면 참고해라. 아 ㅋㅋ 참고 하라고 씹련아 ㅋㅋㅋㅋㅋ

“음 그러게요, 선생님들. 오늘은 날이 아니네요.”

골드를 받아먹고 푼 정보가 빗나가서 그런가. 성난 분위기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영은 소통을 포기하고 대강 시간을 보내다 일찍 잠이 들었다.

‘?’

하영은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30일간 노숙을 한 터라, 침대가 주는 편안함에 쉽게 맛이 들려 버린 것이었다.이 침대.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갈 수 있으려나

***

악마가 사는 마을에 온 지 4일이 흘렀다.

“꺄악!”

유일한 여자 등반자의 비명에 눈이 떠졌다. 응? 여자 등반자는 2명이 아니냐고? 난 정신이 남자니까 제외다.

“선생님들 들으셨죠?”

하영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 밖은 첫 살인이 일어난 날보다 배는 시끄러웠다.

정하영의 외모가 뛰어난 덕분에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았던 거 같다.

­ 낭만검객: 응. 주작.

­ 아가리롤스타: 하영아. 그만 하면 됐어. 넌 힘냈다.

거짓말이라 생각된 것의 여파 때문인지, 아직도 말을 믿지 않는 시청자가 있었다.

“오케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영은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자, 그럼 확인 들어갑니다.”

하영은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봤다. 모험가 길드 근처는 시체가 없었지만. 그 주변은 마을 사람으로 추정되는 시체 두구가 쓰러져 있었다.

“자, 보세요 선생님들. 이게 사건이 살짝 꼬여서 그렇지. 제가 말 한대로 흘러간다니까요?”

하영은 채팅창을 바라보며 어깨를 티 나게 으쓱였다. 시청자들은 잔인한 창밖의 풍경에 너도나도 하영의 말에 동의했다.

­ 낭만검객: 하영아. 난 믿고 있었다.

­ 악질방송만보는사람: 나도.

­ 인방인생하급신: 나도 믿었음.

­ 천신대가리멈춰: 젠장! 믿고 있었다고 하영쿤!

­ 미션석세스: 하영이 못 믿은 놈 누구야! 방송 볼 기본이 안 된 놈 누구야! 다 나가!

­ 아가리롤스타: 와 씨, 이 새끼들 어제 하루 종일 지랄하던 애들이랑 같은 신들 맞음? 진짜 소름 돋는다.

하영은 아가리롤스타의 채팅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방금 저분도 날 의심 하지 않았나?’

빰빠밤.

­ 아가리롤스타님이 100골드 기부.

하영아.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다.

순간 불순한 생각을 품었던 하영이었지만. 이어지는 기부에 불순한 생각이 솜사탕 녹듯 풀려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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