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36화 (36/85)

〈 36화 〉 5. 소설 TS 빙의

* * *

엑스트라 빙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복수물을 좋아하는 하영이가 복수물이라는 말에 봤다가, 남자가 질질 짜는 후회물이라는 걸 깨닫고 중간에 탈주한 작품으로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다.

주인공은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원작에서 한 줄 정도 등장한 엑스트라에 빙의한 여자다.

악녀는? 주인공의 노예 수준으로 전락하는 미남들에게 호되게 혼나고 가문에서 퇴출당하는 역할이다. 심지어는 후일담으로는 빈민가로 끌려가 빈민들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처형당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악녀를 구해야 한다. 그것도 소설로 보던 악녀가 아닌, 누군가가 빙의 된 상태인 악녀를.

“빙의물에 빙의라니. 좀 흥미롭긴 하네.”

번화가라 불려도 될 정도의 크고 멋진 거리에 냅뜸 던져진 하영은, 거리의 중심에 있는 분수대 앞 의자에 앉아서 사탕을 쪽쪽 빨아 먹었다.

사탕은 이름 모를 불량배가 예쁜 소녀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걸 도와주고 답례로 받았다.

“역시 로맨스 판타지라 그런가. 때깔이 다르네.”

하영은 사탕을 빨아 먹으면서도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몰랐는데. 비교적 한국과 비슷한 외형의 사람들이 많았던 탑과 다르게 다들 눈에 띄는 머리색과 눈을 가지고 있었다.

­ 검은콩둘기: 로판이 뭐예요?

­ 인방인생하급신: 로맨스 판타지라고 있음.

­ 꿀벌아넣을게: 인기 있는 소설 장르 중 하나라 보면 됨.

­ 낭만검객: 인기 소설 장르? 로판이?

­ 야스마스터: 여자들에게 인기 있음. 너는 여자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 악질방송만보는사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강두병이네 씹련들 ㅋㅋ

“아, 다 먹었다.”

잠시 채팅에 한눈을 팔던 하영은, 입에서 느껴지는 빈 느낌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달달한 맛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 왜 차원상점에서는 먹을거리를 팔지 않는 거야.”

하영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도 파악했겠다, 휴식도 취했겠다.

이제는 악녀가 있는 곳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저기요. 혹시 클로비스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시나요?”

하영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클로비스는 악녀가 사는 지역의 이름이었다.

“클로비스라면 왕도인 이곳과 가까우니 마차를 타고 저쪽으로 3시간 정도만 가면 될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영을 무시하거나 미모에 반해 수작을 부리려 들었지만, 십여 번 정도의 실패 후, 하영은 클로비스가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차로. 3시간이라.”

하영은 이미 지나가 버린 행인이 알려준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돈이 없는 지금 무작정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저번처럼 부서진 창날을 바꿔먹기에도 상황이 마딱치 않았다.

마차를 운행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손님 태울 자리를 차지하는 창날들은 그저 자리를 차지하는 짐덩이에 불과할 테니까.

하아, 어쩔 수 없나.

“미안하다 새태창아.”

「호에?」

“고생 좀 해라.”

하영은 자신의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불길한 미소에 새태창은 자신의 미래를 깨닫고 구슬프게 울었다.

「호애애애앵.」

***

클로비스.

지금으로부터 수 세기 전. 왕이 직접 통치하던 위대한 땅.

동시에 소설에서 악녀로서 본분을 다하던 여자가 살던 영지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늘 위에서 대강 내려다봤던 거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 그 정도면 왕도와 비교해도 되겠는 데. 아니, 그 정도로 거대한 영지는 아닌가? 네가 보기에는 어때 새태창아?”

「호, 호에…에」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하영은 새태창의 힘없는 외침에 오른손을 쓰다듬었다. 자신을 태운 채, 약 1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날았으니 힘들만 했다.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하영은 입을 닫았다.

“정말 이쪽으로 구름이 날아온 거 맞아?”

“네! 정말입니다.”

“하, 씨 아무것도 없잖아.”

“아닙니다! 정말 구름이 떨어졌습니다!”

“맞습니다! 기사님! 저도 똑똑히 봤습니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하영은 숨을 삼켰다. 구름 같았던 새태창을 믿고 성에 침입했것만, 구름의 침입도 용서치 않는 열혈 경비병들이 있을지는 몰랐다.

‘와, 주옥 될 뻔했네.’

하영은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얇은 벽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숨 막히는 탐색전이 일어났다.

“으음. 이곳에도 없다면……. 저 벽 너머에 있다거나 너희가 잘못 본 건데….”

“기사님 저희가 똑똑히 봤습니다!”

기사의 말에 한 병사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기사는 못 믿겠다는 듯, 크게 소리친 병사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아씨, 그래도 임마. 구름이 내려온다는 게 말이 되냐?”

“마법으로 구름을 조종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새 모양의 거대한 구름을?”

“네!”

“마력 호수가 사방을 둘러싼 이 저택으로? 그것도 감지마법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마법사가?”

“네!”

“어이구 씨발! 그게 말이 되냐! 이 병신새끼들아!”

번갈아 가며 대답하는 두 병사의 말에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기사가 병사들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그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 씨. 내가 어쩌다 좌천을 당해서…”

하영은 멀어져 가는 기사의 목소리에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와. 역시 로맨스 판타지 속 후작가야. 경비도. 기사의 농땡이도 으리으리하구만?”

구름의 침입을 보고하는 병사나, 병사가 하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쉬러 가는 기사나,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 덕분에 일이 쉽게 처리됐으니 불만은 없지만.”

하영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은 로브를 꺼냈다. 튜토리얼 2일 차에 구매했던 그 로브였다.

“얼굴이 팔렸다가 귀찮아지는 전개는 소설로 충분하단 말이지.”

하영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소설에서 묘사했던 대로 악녀의 방을 찾기 시작했다.

위치는 빙의되기 전까지 읽었던 책이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게 주인공에게 미움 박힌 영애의 말로인가…….’

하영은 예쁘게 장식된 방문을 바라봤다. 저택의 중앙. 거기다가 이렇게 열심히 꾸며놓은 흔적까지 있음에도, 저택을 지키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새태창을 타고 내려 봤을 때 봤던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주변은 조용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은 건물에 들어 온 것 같았다.

터벅 터벅.

하영은 힘없이 걸었다. 악녀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저택의 맨 위층까지.

‘악역의 말로란 참 씁쓸하네.’

활기찬 주변 속, 조용히 남겨진 악녀의 방.

비슷한 빙의를 당했다는 것에서 작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던 하영은 그 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감각이 뛰어나지 않아 확실치는 않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영은 잽싸게 문을 열었다. 열기 전에 몇 번 두드리는 게 예의였으나 구름모양새라 안심했다가 큰일 날 뻔한 전적이 있었기에 작은 위험성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누구신가요?”

눈매가 날카로운 적발의 미인이 물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와 다르게, 낯선 인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방문했음에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뿐, 무언가 다른 행동을 취하려고 는 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 모습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 같아 마음이 쓰렸다. 소설 속에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악녀라 나왔기에 더욱 그랬다.

소설의 내용과 다른 모습에 눈앞에 있는 그녀가 악녀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확 와 닿았다.

‘씹년들. 지들이 개 같은 짓을 했으면 지들이 벌을 받아야지. 왜 아무런 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느냐고.’

하영은 악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괴롭힘을 시작한 후로 빙의해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고역을 당한 거 같은데, 남 일 같지 않았다.

“도망가자. 내가 특별히 도와줄게.”

하영은 눈앞에 있는 미녀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었다.

“…제가 이곳을 벗어나 갈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러시나요.”

악녀는 손을 멀뚱히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하영이 보기에는 이미 반쯤 삶을 포기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처음부터 이러기는 싫었지만 이젠 귀찮음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너 진짜 악녀가 아니라, 빙의자잖아.”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하영의 말에 악녀의 눈이 뜨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하영이 원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빙의 초기 자신은 본인이 아니라고 설득을 시도했나 보다.

“네가 읽은 책. 엑스트라 빙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맞지? 나도 빙의자야.”

빙의된 소설은 다르지만.

하영은 뒷부분은 의도적으로 잘라먹었다. 쓸데없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저, 정말인가요?”

하영의 말에 악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납던 눈매가 저리 되니 반전 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주변에 막 꽃이 피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게도 봄이 오는 건가?

적발의 미녀는 손을 뻗어 하영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제가 남자라는 것도 믿어주시는 건가요?”

“뭐?”

생각지도 않은 말에 하영의 머리가 굳었다. 이 미녀가 지금 뭐라고 말을 한 거지?

굳은 하영의 모습에 이상하다는 듯 악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음?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게 아니신 건가요?”

“무슨 소문?”

“왕자에게 버려진 여자가 미쳐서, 자신은 남자고 다른 사람이라고 현실을 부정한다는 소문이요.”

“아! 그 소문.”

악녀의 말에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일단 아는 체를 하는 게 상황상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 알지. 나도 그 소문 듣고 나랑 같은 빙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흑. 저를 위해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오시다니. 감동이에요 언니.”

하영의 말에 악녀가 눈물을 흘리는 척하며 대답했다.

‘어, 언니?’

언니라는 낮선 단어에 잠시 멍 때리던 하영은 그녀가 내뱉은 말을 뒤늦게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게 진짜 남자라고?

적발의 고양이상 미녀가 우는척하며 사내의 애간장을 태웠는데. 이게 남자? 진짜로?

“언니! 병사나 기사들은 저녁이나 돼야 저를 찾아와요. 늘 저녁을 주러 오시거든요.”

악녀는 두 손으로 하영의 손을 꼭 잡으며 일어섰다.

하영이 보기에는 일어서는 모습마저 아름다웠고 품위가 넘쳤다. 귀족가의 여식이라는 단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들이 오기 전에 도망칠 준비를 하죠! 나갈 방법은… 소리소문없이 들어오셨으니 미리 준비해두셨죠?”

악녀가 오른쪽 눈을 살짝 윙크하며 말했다.

남자는 겉모습이 바뀌어도 영원한 남자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던 하영은 그 충격적인 모습에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너… 빙의 한지 몇 개월 됐어.”

악녀는 하영의 말에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생각하는 척을 했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그녀가 귀여운 척을 하니 파괴력이 발군이었다.

하영은 너무도 가녀린 그녀의 행동에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미녀는 기억났다는 듯, 두 손을 모아 작게 짝 소리가 나도록 박수를 치더니 발랄하게 말했다.

“개월 수로 따지면… 14개월 정도 된 거 같아요!”

“허어…”

하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자신도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ts빙의자의 말로?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건. 상상하기도 싫은 악몽이었다.

“응? 왜 그러세요? 언니?”

하영은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아! 혹시 빙의하신지 얼마 안 되셨나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입던 드레스가 많으니 몇 벌 드릴게요. 소중하게 입었으니 무도회라도 참석하지 않는 이상은 물려 입었다는 사실이 티 나지는 않을 거예요.”

끔찍한 악몽이었다. 하영은 악몽을 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그냥 꾸기도 싫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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