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37화 (37/85)

〈 37화 〉 5. 소설 TS 빙의

* * *

“으음. 이 옷은 꼭 챙겨가는 게 좋겠죠?”

악녀는 파란 드레스를 자신에게 가져다 된 채 빙그르르 돌았다.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는 푸른 드레스와 그녀의 적발이 같이 펄럭였다. 단순한 움직임인데도 예쁜 춤을 보는 것 같았다.

하영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그래. 그것도 챙겨…”

하영의 말에 악녀는 방긋 웃으며 하영에게 옷을 건넸다. 그러고는 다시 드레스가 있던 드레스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영은 멀어지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 집에서 탈출할 준비를 한다며 필요한 거를 챙기기 시작한 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맨 처음, 그녀가 준비한다는 말에 기껏해야 10분 정도면 될 줄 알았던 하영은, 이 길어지는 시간을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만! 너 남자라며. 뭐가 이렇게 필요한 게 많아!”

하영은 다시 돌아온 미녀를 보며 소리쳤다.

그녀는 이번에도 드레스 룸에서 여러 옷을 들고 나온 상태였다.

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옷들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한시가 급한 지금, 이렇게 시간을 소모하는 건 그녀가 보기에도 좀 너무한 거 같긴 했다.

“아하하 그럴까요?”

하지만 일단 힘들게 챙긴 만큼 이것까지는 가져가기로 했다.

“에잇!”

미녀는 손에 들려있던 옷들을 전부 하영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화장품은 다 챙기셨나요?”

전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허겁지겁 옷을 집어넣던 하영은 현실감 없는 목소리에 잠시 멍 때렸다.

“언니?”

“어, 어. 화장대 서랍장에 있는 건 다 챙겼어.”

미녀의 되물음에 정신을 차린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말이 안 되는 외모와 목소리다. 가까이에서 보고, 들을 때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위험했다.

‘조심해야겠어.’

까딱하다가는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았다.

“많이 지루하셨죠? 이제 금방 끝낼게요.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하지만 이는 하영이 조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외모는 로맨스 판타지에 나오는 메인 등장인물답게, 외모 빼고는 장점이 없던 정하영과 동급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거기다가 남자라는 녀석이 진짜 고귀한 아가씨처럼 행동하는데. 이게 또 의외로 잘 어울렸다. 마치 평생 아가씨로 살아온 사람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봐온 여자들보다 훨씬 여자다워.’

하영은 초점 없는 눈으로 미녀를 쳐다봤다.

미녀와 하영의 상성 관계는 미녀의 압승. 그러니 앞으로 편하게 지내려면 최소한 주도권이라도 다시 잡아와야 한다.

“으음. 역시 화장도 좀 더 챙겨야 할 거 같아요.”

맞대결로 승부하는 건. 답이 없다. 저 외모에 저런 행동은 남자인 하영이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하영은 따지듯 미녀에게 물었다.

“아니, 아무리 14개월이라도 그렇지 너무 적응한 거 아니야? 너 원래 남자 맞아? 사람들 놀리려고 거짓말한 거 아니야?”

“정확히는 남자였었죠. 지금은 전부 교정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하영의 물음에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슬픔에 축 쳐진 눈매와 그간 심정을 대변하는 듯 내려앉은 작은 어깨, 가련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 하영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어질어질하네.’

하영은 인지 부조화가 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냥 자신이 남자라는 착각에 빠진 여자가 빙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니 이것들도 넣어주세요!”

하영이 상념에 사로잡혀있는 사이, 그녀는 또 어디선가 들고 온 각종 화장품을 하영의 앞에 가지런히 모아 놨다.

“흐흐흥~”

콧소리를 내며 물건을 조신하게 챙기는 것이, 소풍을 떠나는 준비를 하는 귀족 아가씨 같았다.

‘안 된다. 이대로 가면 안 돼.’

하영은 악녀고 나발이고 일단 정신 상태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악녀, 아니 악녀에게 빙의한 남자는 너무 오래된 빙의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같은 동료로서 자신이 나서야만 했다.

“그것들 다 집어치워! 싹 다 두고 와! 진짜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버려! 그리고 화장품은 이미 잔뜩 챙겼잖아!”

하영이 진심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그, 그런! 아직 옆방에서 남아있는 장신구도 가져와야 하는데…!”

미녀는 울상을 지으며 방에 있는 장신구들을 급히 주워 담기 시작했다.

애장품이라며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장신구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걸 보면. 그냥 하영이 이 방에 있는 것들을 통째로 집어넣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위험이라고는 정말 조금도 느끼지 않는 태평한 모습에 하영이 살짝 욱했다.

그러나 울상을 짓고 있는 미녀에게 뭐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고, 남자인 자신은 예쁜 여자에게 너무 약했다.

“그냥… 그냥 내가 다 가져갈게. 너는 그냥 빙의 된 이후의 이야기나 해줘봐.”

하영은 설득을 포기하고 방안에 있는 것들은 전부 쓸어 담기 시작했다.

외출용 드레스부터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드레스까지 수십 벌. 거기에다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 같은 보석과 각종 화장품, 그리고 실생활에 필요한 용품부터 여성용품까지.

과연 이 작은 아공간 주머니에 다 들어갈지 의문이 들었지만.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이것들을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아팠는데,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지는 거 같아요! 아. 지금 손에 들려있는 그거! 그게 무슨 보석인 줄 아시나요? 그 보석은…”

열정적이다 못해 미친 사람처럼 마구 물건을 담고 있는 하영의 모습에 미녀가 말했다.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주니 감사한 마음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나 보다.

“흐아아.”

여자들은 이런 쓰잘떼기없는 잡담이 재밌는 걸까. 하영은 의문을 조용히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난 남자다.

“됐고. 부탁이니까. 빙의 이야기나 좀 해줘. 제발.”

“아, 네!”

간절함이 담긴 하영의 말에 미녀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거절하기에는 하영의 얼굴이 너무 피로해 보여 양심이 아팠다.

“으음. 그러니까…”

미녀는 처음 보는 진지한 표정으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하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만족하고 계속 물건을 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억을 정리한 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빙의 된 건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어요.”

미녀의 이야기는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듯 잔잔한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

화려한 불빛이 주변을 비추는 무도회.

아델라는 그 곳에서 처음 눈을 떴다.

낮선 풍경에 아델라는 급히 몸을 움직였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중무장을 한 기사들에게 양 쪽 어깨를 잡힌 채 바닥에 엎드려있는 상태였다.

“아델라, 아니 아델라 폰 클로비스! 넌 선을 넘었다!”

차가운 바닥 너머로 처음 보는 남녀가 이쪽을 향해 소리치는 게 보였다.

“쯧, 쯧 결국 이렇게 가는군.”

“그런 짓을 할 거면 들키지나 말지…”

그들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뭐라 말했지만, 당시에는 상황이 상환인지라 큰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클로비스! 넌 이제 내 약혼녀가 아니다!”

그가 상황을 이해하고, 차가운 현실을 받아 들였을 때는 이미 모든게 늦은 후였다.

소설 속에 나온 최후를 피하기 위해 노력해도 지난 일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때 한 말들이 주변에 퍼지며 미치광이라는 평판만 얻을 뿐이었다.

“소문 들었어? 그 영애 말이야…”

“자신의 성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 미쳤다며?”

빙의 특전도 도와줄 이도 하나 없다.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

아델라는 부질없는 노력 속에서 점점 가라앉았다.

.

.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ts 빙의자를 위한 선물 도착]

소설 속으로 들어온 그에게 소설에서 볼법한 일이 또 벌어졌다.

­ [강한 귀족 영애 만들기]

[첫날 점수표]

우아한 티타임 가지기 (+10점)

바르고 고운 말 사용(+10점)

여자답지 못한 행동(­5점)

.

.

.

비속어 사용(­1점)

비속어 사용(­1점)

이상한 표정을 지음 (­1점)

총점 : 55점.

획득 보상 : 무력을 얻을 단서 1.

“미친!”

아델라가 처음으로 시스템의 힘을 맛본 날. 그는 행동거지만큼은 완벽한 귀족 영애가 되었다.

“적응했구나.”

하영의 말에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평판을 좀 더 퍼트려 시민들의 동정도 얻었고, 스승님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벨의 도움으로 정신도 많이 괜찮아졌어요.”

“잠깐? 뭐라고?”

“네? 소문 들으셨다면서요? 그거 사실 주변 시선을 의식하게 만들려고 아벨이 일부러 하인들에게 퍼트린 거거든요.”

이걸 왜 모르냐는 듯한 아델라의 말에 하영이 발끈했다.

***

“아니 소문 말고. 그, 아벨이란 애는 누군데?”

하영의 말에 아델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벨은 저의 호위기사에요.”

“호위기사 이름이 아벨이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아델라의 호위기사.

중반부 악녀를 배신하고 주인공의 편이 되는 서브 남주.

자신이 원하는 복수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대충 넘기기 시작해서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디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하영은 이상함을 눈치 채고 아델라에게 질문했다.

“악녀의 호위기사는 아벨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아니야?”

“그런가요?”

하영의 말에 아델라는 두루뭉술하게 대답을 회피했다. 계속해서 물어봐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아델라는 이름을 교환하자고 해왔다.

“이렇게 갑자기?”

“누님께서는 제 이름을 아시겠지만. 전 모르니까요.”

“음 그렇긴 하지.”

질문에 답이나 하라고 하려던 하영은 아델라의 말에 살짝 뒤로 물러났다. 솔직히 살짝 뜨끔했다. 워낙 상황이 촉박한지라 정신이 없던 탓에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제 이름은 아델라 폰 클로비스에요.”

아델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이전과 다르게 아델라에게 집중하고 있던 하영은 그 미소에 살짝 움찔했다.

하영은 고양이상의 미녀를 좋아했다. 그래서 주인공이 정하영을 범했을 때도 살짝 흥분했었다.

‘같은 계열의 미녀라도 이렇게 차이가 있을 수 있구나.’

정하영이 육감적인 몸매의 미녀라면, 눈앞에 있는 아델라는 약간 호리호리해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미녀였다.

한마디로 고양이상 미녀에게 익숙해진 하영조차 당황시킬 정도의 미녀라는 소리다.

‘역시 미녀는 미녀인가. 속이 남자라는 걸 알아도 계속 설레네.’

그 모습을 본 아델라는 손에 들려있던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호호거리며 웃었다.

‘저건 또 어디서 난거야.’

하영은 깃털로 잘 꾸며져 있는 아델라의 부채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단지 웃기위해 없던 부채를 찾아 입을 가리다니, 이쯤 되면 대단할 정도다.

“언니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언니라 하지 마라.”

“어쨌든요.”

아델라의 말에 하영은 잠시 생각했다. 아델라의 성격상 솔직히 대답하면 좀 귀찮은 질문을 많이 해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이 몸의 이름으로 대답하기로 했다.

“정하영이야.”

“예? 거짓말하지 마세요. 누가 봐도 여기 이름이 아니잖아요.”

“아니 진짜 정하영이야.”

“아! 이 세계에서도 동방대륙이 있었나 보군요!”

묘하게 핵심을 찌르는 아델라의 말에. 하영은 물 흐르듯이 질문을 회피했다.

“으음… 뭐 그런 걸로 치자고.”

“으으. 같은 빙의자끼리 이야기를 숨기다니 너무해요. 전 거의 다 알려드렸는데.”

하영의 대답에. 마음이 들지 않았던 아델라가 살짝 볼을 부풀렸다.

갸름한 턱선에도 불구하고 살짝 말라보이던 볼이 부푸니 묘하게 귀여웠다.

아니 이게 진짜 나랑 같은 남자라고?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언니 진짜 같은 빙의자끼리 이럴 거예요? 자기소개를 진짜 이름만 알려주는 게 어디 있어요.”

“언니라 부르지마라.”

아델라의 투덜거림에 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뒷북일수도 있지만. 남자에게 계속 언니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생각하니 소름이 좀 돋았다.

특히 이 미녀가 사실 근육질에 털이 수복한 건장한 청년이라고 상상을 하면. 과거에 잘못 클릭해서 본 돈고충의 악몽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아무튼 부르지 마.”

“왜요?”

아델라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눈물도 안 흘리고 호흡도 정상이라 한눈에 봐도 슬픈 척이었지만. 겉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탓에 무시하기가 좀 그랬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면. 저도 저의 비장의 카드인 아벨에 대해 알려 드릴게요. 어때요?”

하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숨긴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천하일미에 가까운 아델라의 미모가 하영을 쓰러트린 것이었다.

“나, 나도 같아…”

하영은 끓어오르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더 길게 말하면 창피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네?”

짧고 간결한 대답에 이해하지 못한 아델라가 되물었다. 하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대답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TS 빙의라고 시발! 진짜 좆같네!”

토마토 같은 하영의 얼굴을 살짝 본 아델라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하영을 위로했다.

“아… 그. 힘내세요?”

갑작스럽게 화냈음에도, 먼저 사과를 받은 상황. 뭐라고 말이라도 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하영은 몰려오기 시작한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충격적인 두 남자의 대화 이후, 방에서는 물건이 움직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