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40화 (40/85)

〈 40화 〉 5. 소설 TS 빙의

* * *

사람은 도망친다.

꿈으로부터 도망친다. 하영도 그랬다. 방송의 꿈을 키웠음에도 시작도 하지 않고 회사에 취직했다.

취직한 이후로도 같았다. 시간만 잘 쪼개면 취미로라도 할 수 있음에도 늘 내일로 미뤘다.

회사에 잘 정착하면, 월급이 오르면, 연인이 생기면, 노후가 보장되면.

내일이 오늘이 될 때마다 항상 도망칠 길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꿈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은 다를 거라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성공시키는 주인공 같은 사람이라도 결국 끝은 찾아온다.

실패에서 오는 두려움. 기회비용으로 소모되는 것이 부담되기 시작하면. 그들도 하영처럼, 평범한 사람들처럼 도망칠 것이다.

그렇기에 하영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궤변이지만. 하영에게 있어서는 정론이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벨의 말에 하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하영과 일행은 지금 비밀통로를 걷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입구가 막혀있던 지하라 그런지 조금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코가 막히니 그냥 지하철을 타러 가는 느낌과 비슷했다.

‘저택에서 자신만만하게 앉아있을 만하네.’

하영은 자신이 걷고 있는 주변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만들어진 지 오래된 거 같지만. 먼지는 거의 보이지 않아.’

벽돌 사이에 먼지는 끼어있었지만, 벽돌에 먼지는 있지 않았다. 이 지하통로의 연도를 생각해보면. 최근까지도 청소를 열심히 한 것이 분명했다.

‘아델라가 청소한 거려나?’

하영은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아델라를 바라봤다. 일행의 제일 선두에 서 있는 아벨이 아델의 기사인 만큼. 이 통로도 아델라가 제일 먼저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설마. 직접 청소한 건 아니겠지?’

아델라는 고상한 표정과 발걸음으로 아벨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황이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직접 청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통로의 상태가 깨끗하다는 건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는 행동과 다르게 영악하고 용의주도하다 이건가.’

하영이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릴 때였다. 아델라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졌다.

“아벨. 그런데 이런 통로는 어떻게 알았나요?”

아델라의 말에 아벨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아가씨, 아니 아델라님께서 알려주신 거 아닙니까?”

“네에? 그게 무슨 말인지…”

아델라의 말에 아벨은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10일 전, 후작님의 명령으로 근신을 막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저는 아델라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밤이 되자마자 근신처분을 무시하고 감옥에서 탈출하려고 했었죠.

하지만. 제 앞에 놓여있는 두 개의 종이를 발견한 저는 그대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델라는 그 말을 끝으로 쪽지 하나를 아델라와 하영에게 건넸다.

[약속의 때가 왔으니, 기사는 그곳에서 기다려라.]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쪽지를 받아든 아델라는 말이 안 된다는 듯. 종이에 적힌 글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지하에서 어떻게 쪽지를 보겠냐 싶겠지만. 통로의 벽에 붙어있는 양초 덕에 통로는 글씨체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밝았다.

“제 글씨가 맞아요. 하지만 전 이런 기억이 없는데…”

쪽지를 끝까지 확인한 아델라의 손이 작게 떨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크게 소리쳤다.

“아! 그래요! 이 지하 통로에 대한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아델라의 말에 아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델라님께서 남에게는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가주 전용 통로라 적어주셔서 보고 바로 없애라 해서 삼켰습니다.”

아벨은 조금 전까지 얼굴에 나타났던 혼란이 거짓이라도 되는 양, 아델라라는 이름이 내린 명령에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다.

하영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이게 기사인가? 굉장하네.’

정작 그 믿음의 주인인 아델라는 말이 안 된다면서 아벨에게 따졌지만 말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 애초에 제가 가주 전용 통로를 알 리가 없죠! 그건 가주인 아버지만 알고 있을 테니까요! 아 점수 까였다.”

통로를 울리게 할 정도로 큰, 아델라의 외침에 모두 행동을 멈췄다. 이야기가 서로 맞지 않는 상황. 그러나 둘 다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통로에 있는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그, 그러고 보니 제가 탈옥을 했는데도 아무도 저택에 오지 않은 건. 좀 이상하다 생각합니다.”

아벨이 말했다. 이에 아델라가 말을 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동안은 제 저택에 아벨 말고 다른 기사가 온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아델라의 말에 하영은 이 저택에 처음 온 순간이 떠올랐다.

후작가의 성내가 좀 많이 크긴 하지만 자동차보다 큰 새태창이 착륙하는 것을. 가문에 상주하는 다른 기사들이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기사들은 전부 오러를 이용해 몸을 강화시킬 수 있는 초인들이다. 평범한 병사들도 본 새태창을 못 봤을 리 없다.

“이상합니다.”

“이상하네요.”

“그래, 생각해보니 좀 많이 이상하긴 하네.”

통로에 있는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델라는 무언가 알았다는 듯 하영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영님. 빨리 나가시죠.”

“그, 그러자.”

그러거나 말거나 하영과 아벨은 빠르게 이 통로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

“후작님. 오늘 오후 3시. 인간과 유사한 생명의 파장이 느껴지는 존재는 2,284명 어제보다 1명 많습니다. 그리고 약 1시간 전. 새 모양의 구름이 막내 아가씨의 저택으로 떨어졌고 그곳에서 전투의 파장이…”

“됐네.”

“예?”

“그대가 할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고,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라네. 알겠는가?”

후작. 루타르 폰 클로비스는 손을 저어 가신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콧수염이 긴 가신이 무릎을 꿇었다.

“네.”

후우. 루타르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아델라의 저택이 보였다. 루타르는 저택과 자신이 있는 곳의 거리가 아델라와 자신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아델라는 정신병이 다 나았네. 그리고 방금 가문에서 퇴출당했지.”

뜬금없는 루타르의 말에 그의 가신이 당황해 되물었다.

“네? 가주님 그게 무슨.”

가신의 물음에 루타르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가신은 말없이 들으라는 뜻이라는 걸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다.

“아델라는 과거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어디를 가든 적이 있을게야. 그래서 결국 아델라를 싫어하는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거지. 우린 그걸 방관한 거고.”

이미 내용이 정해진 책을 읽듯이, 평온한 루타르의 목소리에 가신은 루타르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면 아델라의 처형식은…”

“아델라는 처형전날 실종 당했어. 그런 걸로 치자고. 10여 년 전 우리 가문을 방문한 검은머리의 그녀가 말했던 대로.”

루타르의 말에 가신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루타르는 허락하지 않았다.

“공작 쪽은 점점 위세가 강해지고. 영지도 없는 신흥 귀족은 성장해 우리 가문을 위협하지. 아델라가 정상적으로 처형당해도 가문의 몰락은 피할 수 없어.”

공작, 영지도 없는 신흥귀족, 각각, 원작의 주인공과 엑스트라에 빙의한 주인공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루타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책상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겨울이 아님에도 빨간색 목도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9개월 전 겨울, 그의 딸이 준 생의 첫 선물이었다.

“하여튼. 제멋대로인 성격은 제 엄마랑 아주 똑같단 말이지.”

루델라의 머리카락색을 떠올리게 하는 빨간 목도리. 루타르는 그 목도리를 쓰다듬었다.

루델라의 어미도 그랬다. 비록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한 정략결혼이었음에도, 그들은 짧게 끝나기를 알기라도 하듯 바짝 타올랐다.

막무가내인 그녀에게 루타르가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그 둘은 행복했다.

‘그립군.’

어미의 마지막 선물 역시 아델라의 것과 같은 빨간 목도리였다. 빙의자인 아델라는 외전으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잘 봐달라고 보낸 선물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루타르는 그 목도리에서 운명을 느꼈다.

“운명. 운명이라…”

루타르는 목도리를 쓰다듬기를 멈췄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어두운색으로 빛나고 있는 돌을 만졌다.

7개월 전, 아델라의 운명을 변하게 해주겠다며 찾아온 여자가 주고 간 돌이었다. 여자는 이 돌을 아델라에게 주면 멸망으로 향해가는 아델라의 운명이 변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저물기 시작하는 가문을 다시 떠오르게 해준다고도 했다.

이는 별것 아닌 행동으로 루타르의 꿈을 전부 이룰 기회였다.

아델라는 태어나자마자 어미가 죽어 부모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다. 사랑을 모르는 아델라의 끝은 딸을 모르는 루타르가 보기에도 너무 뻔했다.

가문은 그의 증조 때부터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딸의 사랑마저 이용해가며 가문을 성장시키려 했지만. 결국, 이야기는 절망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여자는 겨우 이 돌 하나로 그 모든 고민을 해결해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통로로 가서 그 돌을 아델라에게 건네십시오. 아니면. 소원을, 쓰러져가는 운명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겁니까?]

돌을 만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치고 나약해진 정신 때문일까. 루타르는 알 수 없는 여자의 환영을 보았다.

모험가 길드의 접수원 복장을 같은 것을 입고 있는 여자는 루타르가 보기에도 예뻤다. 하지만 예쁘다는 것 외에는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여자였다.

“흐엑!”

그의 가신이 환영을 보며 갑자기 소리쳤다.

“환영이 아니로군.”

루타르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소드마스터인 그가 가까운 거리를 내줬음에도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강적이다. 그녀는 어쩌면 그의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인물일지 모른다.

[소원을. 무너져 가는 운명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겁니까?]

여자는 루타르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마지막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루타르는 허리춤에서 그의 검을 빼 들었다.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신도. 그 무엇도 정할 수 없다.”

루타르는 한때 자신에게서 연인을 뺏어간 운명을, 신을 증오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병을 몰랐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한다.

“현재와 미래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지는 것. 아델라가 개심한 순간부터.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할 때부터. 운명은 변했다.”

루타르는 14개월간 아델라와 행동한 순간을 기억했다. 남자라며 반항하는 그녀에게 소리치는 기억뿐이지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아델라와 오래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개척해 나간다. 그길이 예정된 몰락이라 할지라도, 그러니 내 딸의 앞길을 막으려는 네년의 도움은 필요 없어.”

루타르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파삭.

책상에 있는 빛나는 돌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윽고 검게 빛나던 돌이 불길한 보랏빛을 내뿜으며 먼지가 되었다.

불길한 빛에 잠깐 한 눈이 팔린 루타르가 다시 여자 쪽을 봤을 때는 환영 같았던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루타르는 작게 떨리는 손을 붙잡아 진정시켰다. 이후 벌벌 떨고 있는 가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창문을 바라봤다. 무언가 변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군.”

어째서일까. 안 그래도 멀게만 느껴졌던 저택이. 이전보다 더 작아 보였다.

마치 점 같았다. 아무리 커다란 성이라 해도, 성 안인 만큼 이 정도로 거리가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저택이……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루타르의 앞이 흐릿해졌다. 아무래도 기가 허해진 모양이었다.

“벌써 가버린 거냐…”

루타르는 저택과 자신이 있는 곳의 거리가 아델라와 자신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나의 딸아.”

루타르의 책상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적은 비조차 막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내일 아침이 오는 대로 가문의 건물을 수리해야할 것 같았다.

***

다음날, 클로비스 가문의 막내딸이 가문에서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돌았고,

클로비스 가문은 사실이라며 당당하게 진실을 밝혔다.

시민들은 근신중인 막내딸과 그녀의 기사가 가문에서 동시에 납치당한 것이 이상하다 떠들었지만.

귀족들은 냉철하기로 소문난 후작이 가문에 문제를 만들면서까지 막내딸을 지킬 리 없다 믿었기에, 클로비스 가문은 범인으로 지목받지 않았다.

그러나 죄인을 잃어버린 죄는 피할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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