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5. 소설 TS 빙의
* * *
“언니. 좀 창피한데요.”
방송 시작하기 전. 하영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받은 아델라가 몸을 배배꼬았다. 원래대로라면 하영이 말을 하자마자 인사를 해야 했지만. 해야 할 인사가 평범하지 않아서 문제였다.
“어허. 이제 와서 그러면 안 돼. 그런 연약한 정신으로는 이 험한 방송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하영의 단호한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에는 좀 무뚝뚝해도 친절하던 하영이 방송이 시작하자마자 돌변했다.
‘이게 방송?’
아델라는 하영이 살짝 무서웠다.
“어? 왜 수금할 때만 방긋방긋 웃냐고? 어허, 선생님들. 그건 음해에요. 내가 평소에도 얼마나 웃고 다니는데.”
하영이 허공을 쳐다보며 웃었다. 인상을 쓰다가도 순식간에 미소를 보이는 것이 확실히 미친 사람 같았다.
“자, 어서 선생님들께 인사해봐!”
하영이 가만히 서 있는 아델라를 불렀다.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인데도 손이 벌벌 떨렸다.
이건 잘못됐다. 왜 아벨이 자신을 말렸는지 알 거 같았다.
하지만 배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이 상황을 도와줄 아벨은 잠들었고. 자신은 하영의 방송을 열심히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아델라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방송은 일종의 서비스업이다. 시청자들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청자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그게 꼭 원래의 성격과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델라의 롤 모델이었던 밝은 분위기의 여캠들도, 평소에는 꽤 어둡거나 사납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 그녀들처럼, 언니도 방송하실 때만큼은 웃으려 노력을 많이 하셨겠지.’
아델라는 필사적으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하영을 바라봤다. 얼마나 열심히 웃는지. 연민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저게 내가 꿈꾸는 프로 방송인.’
하영은 방송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영의 방송이 평범한 방송과는 다르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내가 저 정도가 되어야지 우리 아벨이 편히 먹고살 수 있어.’
아델라는 저것이 방송의 진짜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영애처럼 행동하기로 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나약한 자신을 채찍질했다.
“언니. 지금 인사하면 되는 건가요?”
하영에게 가까이 다가온 아델라가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었다.
‘나도 언니처럼 뛰어난 방송 이미지를 만들어서, 반드시 놀고먹는 생활을 할 거야.’
***
“언니. 지금 인사하면 되는 건가요?”
어느새 다가온 아델라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델라가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아아.”
목소리가 점점 맑고 청아해졌다.
‘이건…’
하영이 맨 처음 아델라를 만났을 때의 목소리 톤이었다.
‘제대로 해보겠다. 이건가.’
하영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곳에 언니, 언니 거리던 말괄량이 여자는 사라졌다. 대신 한 명의 귀족 영애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갑습니다, 주인님들. 저는 여러분의 하인이자 전 후작가의 영애. 아델라 폰 클로비스라고 합니다.”
아델라가 치마의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낭만검객: 이것이… 방송?
야스마스터: 으앗! 이봐! 존슨 진정해!
즉석나비탕24시: 고양이 귀 귀족 메이드. 이건 양보 못한다.
악질방송만보는사람: 응 꺼져.
내이름은야스머신: 자자, 다들 싸우지 말고 서로 야스해.
아델라가 처음 인사했을 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확연한 반응 차이에 하영의 생각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대체 뭐야?’
아델라의 인사가 약간 그들의 취향으로 바뀐 것? 충분한 이유지만, 근본적인 이유로는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더 있다.
나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방송에 관련된 무언가가.
하영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낭만검객: 하영아. 눈 똑바로 떠라.
채팅을 보고 도로 눈을 풀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청자들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선생님들! 어떻습니까! 참. 참한 사람 아닙니까?”
하영의 말에 채팅창이 조금 빠르게 올라갔다.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방송계의유니콘: 슬슬 시작해봅시다.
낭만검객: 쩦, 고위 귀족 메이드는. 새벽에 밥도 볶아주나?
미션석세스: 자 드가자~
어린이애호가: 눈매가 날카로워서 별로.
바른말만씀: 닌 그냥 어리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님?
소드마스터거품임: 하영아 나 궁금한 게 있음. 이번에도 부위별로 하나씩 따로 할 거야? 아니면 원하는 것을 시청자 한 명을 추첨할 거야?
시청자들의 채팅을 보는 중에 소드마스터거품임의 채팅이 눈에 들어왔다.
‘흠.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소드마스터거품임이 언급한 두 방법은 서로 장단점이 명확했다.
부위별로 추천하는 것은 승자가 여러 명이라 비싼 아이템을 구매해도 대금의 처리가 빠르게 끝난다. 하지만 그만큼 방송 시간이 오래 걸려, 지금 사용하면 오늘 아침이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아침에 피곤한 것은 싫은데.’
그렇다고 빠르게 끝내기 위해 한명을 추첨하게 되면 대금의 처리가 너무 지체된다. 한 시청자당 하루 기부 가능 금액은 20,000골드가 한계이기 때문이다.
‘역시 방송의 레벨을 어떻게든 올려야 할 것 같네.’
받을 수 있는 골드는 한정되어있는데, 파이는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 하영은 방송의 레벨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물론 평소에 20,000골드는커녕 그 절반도 못 뽑아내는 하영이었지만. 그녀의 물욕은 그런 걸 따질 정도가 아니었다.
‘앞으로 또 게스트를 얼마나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게스트들에게 옷을 입혀 줄 때마다 내가 원하는 장비를 구매할 시간은 늦춰질 거야.’
「토룡의 포효(창) 557,600G」
발이 땅에 붙어 있을 때 모든 능력치 + 10
부서진 창날은 모래나 흙, 또는 바위로 채울 수 있다.
이 창으로 투창할 경우. 창에 토룡의 포효가 씌워진다.
토룡의 포효, 투창 시 무슨 효과가 발휘되는 것 중에서 가장 저렴하고. 가성비가 높아 보여 하영이 노리고 있는 창이었다.
“크흠.”
하영은 탐욕을 애써 가라앉히며, 다시 깊게 생각에 빠졌다. 두 방식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영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자. 아델라가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방송을 의식해서 일부러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델라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악녀에 빙의하기에는 애가 너무 순하고 착했다.
이렇게 착한 애에게는 상을 줘야지.
“그럼 선생님들 이런 건 어떨까요?”
하영이 아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왕 선심 써 주는 거 아델라에게는 크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옷 갈아입기를 했을 때처럼, 부위별로 승자를 나누는데 날짜별로 부위를 정해서 승자를 추첨하는 겁니다.”
바로 두 방법을 섞어버려 최대한 좋은 장비를 뽑아내는 것.
낭만검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서 더 시간을 끌겠다고? 오케이. 난 찬성.
꿀벌아넣을게: 1따봉 드립니다.
닉네임은10글자까지: 아니, 너무 방송 끄는 거 아님? 아직 올라야 할 층이 얼마나 많은데.
아가리롤스타: 하영이가 좋다면. 난 좋다.
군침도는사람: 캬. 골드 쓸 생각에 군침이 팍 도누~
건강한언어습관짝: 아주 ㅈ같은 생각이네요. 아 오타 좋은 생각입니다.
생존게임좋아요: 하영님. 그런 거 말고 이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게…
바른말만씀: 응 비밀, 응 ㅈ까. 난 몰라.
시청자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중간에 다른 의견도 좀 보였으나. 이는 다수결의 힘으로 잘 처리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가리롤스타님. 1따봉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말한 대로 방송 진행할게요.”
하영의 말에 빵빠레가 울렸다.
닉네임은10글자까지님이 100골드 기부.
할 것도 많은데 옷 갈아입히기는 대강 끝내자.
“아 닉네임님 100골드 기부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하영은 불만이 담긴 기부 메시지를 회피했다. 그러자 다시 빵빠레가 울렸다.
닉네임은10글자까지님이 100골드 기부.
아니, 왜 내 채팅은 안 봄?
“아니! 무슨 소리세요 닉네임님. 저는 다 보고 있습니다.”
기부 메시지의 말에 하영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메시지를 귓전으로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고 있었던 건 맞으니까,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닉네임은10글자까지: 아 ㅇㅋㅇㅋ ㅈㅅㅈㅅㅈㅅㅈㅅ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조심해주세요. 선생님이 하신 건 음해입니다.”
하영은 시청자의 사과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약간 양심에 찔렸지만. 이젠 익숙하다.
“자, 그럼 오늘의 부위는… 바로 메인인 몸. 첫 시작 의견은 메이드복으로 정하겠습니다!”
하영은 살짝 내려간 분위기도 다시 띄울 겸 오늘의 부위를 말했다. 원래라면 머리띠나. 귀걸이 같은 장신구를 하려 했지만. 패스했다.
장신구는 자신도 아직 착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없는 걸 먼저 받는 건 좀 아니지.’
하영이 생각에 빠졌을 때, 또다시 빵빠레가 울렸다.
모든것은순리대로님이 100골드 기부.
중국풍 메이드 복을 입히는 것은 어떤가?
이번에는 불만이 담긴 기부 메시지가 아니었다. 하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하마 타면 잘나가던 방송 흐름이 끊길 뻔했다.
“아! 객잔에서 점소이가 입는 뭐 그런 걸 원하시는군요!”
하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국풍을 싫어하는 메시지가 기부를 해왔다.
미션석세스님이 200골드 기부.
쭝궈풍? 에라이 무자식아. 차라리 고급 찻집의 여급 같은 일본풍이 낫겠다.
“아, 저도 야한 동영상에서 신세 진적이 있습니다.”
기부 메시지마다 넣어주는 하영의 추임새에 조금씩 빠르게 기부 메시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낭만검객님이 1,200골드 기부.
솔직히 메이드복은 미니스커트다. 인정하지?
“아! 메이드복은 미니스커트가 맞긴 하지! 낭만검객님 1,200골드 적립!”
내이름은야스머신님이 1,300골드 기부.
아니 시발 ㅋㅋ 귀족 메이드인데. 그것도 고위 귀족인데, 천박한 미니스커트 따위를 입힐 거면. 차라리 더 쌔끈한. 수영복에다 메이드복이 합쳐진 걸 입히고 말지.
소드마스터거품임님이 1,400골드 기부.
차라리 클래식인. 빅토리안 메이드복은 어때?
미션석세스님이 1,500골드 기부.
클래식? 크을래시익? 여기가 씨발 중세 시대냐? 유행 지난 빅토리안 메이드복을 찾게? 그냥 그럴 거면 일본풍 해.
모든것은순리대로님이 1,600골드 기부.
여긴 중세가 맞소만? 그리고 낭자가. 한국 사람인 걸 알고 일본풍을 찾는 게요?
군침도는사람님이 1,700골드 기부.
그럼 늬미 씨발! 중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이랑 친하냐?
여신따먹고싶다님이 1,800골드 기부.
논점 흐리지 마라. 메이드복 고르는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그리고 한국? 중국? 일본? 난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냥 만국 국롤인 전통적인 메이드복을 예쁘게 개량한 클래시컬 메이드복으로 합의 보자.
바른말만씀님이 1,900골드 기부.
우리 여신따는 지구에 나라들도 모르면서 크으을래식을 찾누? 그리고 그렇게 고지식하게 입힐 거면 그냥 메이드복 상체만 입히고 하위실종 패션이나 하자 이거야~
여신따먹고싶다님이 200골드 기부.
응 싫어~ 누가 뭐래도 클래시컬 메이드복 할 거야.
어느 정도 짬이 쌓인 하영이 중간에 뭐라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메시지는 빠르고, 격해졌다.
“언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채팅이나 메시지를 못 보는 아델라가. 궁금함에 물어봤다.
미션석세스님이 18,300골드 기부.
2만 골드 다 부었다. 일본풍 가자. 더 말 안 한다.
골드 냄새가 가득 풍기는 방송 속에서, 하영이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들어오는 골드는 다 내꺼다.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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