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46화 (46/85)

〈 46화 〉 5. 소설 TS 빙의

* * *

아침이 밝았다.

밤늦게 잠을 자 버린 탓에 머리가 졸음에 취해 있었지만, 새벽에 일어난 아벨이 깨워준 덕분에 아침에 타야 하는 배에는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다.

“두 분 다, 괜찮으십니까?”

아벨은 졸려 하는 두 사람을 보며 걱정을 표했다.

“으, 응”

아델라는 졸음에 취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하영은 아침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채팅창을 보느라 여념이 없어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하영님은 아직 꿈나라에 있으시는군요.”

아벨은 채팅창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하영을 보며 풀어 두었던 검집을 허리에 착용했다.

“시원한 생수를 사러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벨은 돈이 있는 주머니를 챙겨 선실 밖으로 나갔다. 아델라는 나가는 아벨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상황을 오해한 아벨과 다르게, 하영의 옆에 있던 아델라는 하영이 방송 채팅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동자가 계속해서 움직이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방송이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잘 때도 그런 옷을 입고 주무시는 거예요. 안 불편하세요?”

아델라의 말에 하영이 입을 벌렸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방송이 좋다니.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일어나자마자 방송 키신 거 아니에요?”

아델라의 말에 하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 꿀벌아넣을게: 방송이 싫어?

­ 검은콩나물: 우리가 싫어?

해명을 하려는 순간. 채팅창이 눈에 들어왔다.

­ 즉석나비탕24시: 처신 잘해라.

협박처럼 보이는 채팅을 본 하영은 자신의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방송이 저절로 틀어지는 거고, 방송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을 말하기에는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방송이 아니라 시청자가 좋은 거지 하하하.”

하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아델라도 덩달아 웃었다.

“역시 언니! 방송의 프로는 역시 다르시군요!”

“하하 당연하지. 이 정도는 거뜬하다고!”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하영은 시청자들의 눈치를 보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흐아. 역시 노숙은 체질에 안 맞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몸매를 부각시키기 위해 몸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검은색 무복. 그리고 검은 천 사이로 보이는 흰 다리.

바빠서 지금까지는 체감이 안 됐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참 대단한 복장이었다.

‘나도 아델라처럼 속바지는 입어야 하나.’

하영은 저번에 봤던 아델라의 속바지를 떠올렸다. 솔직히 좀 별로다. 남자의 낭만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계집애 같다.

하영은 아델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델라는 발목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을 가린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델라. 왜 메이드복을 안 입고 있어?”

약간은 감정이 서려 있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세상에서 적응한 하영이 보기에, 좋은 장비가 있음에도 착용하지 않은 아델라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입기에는 옷이 조금 그렇잖아요.”

아델라가 볼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후잖아?”

배의 탑승 시간은 지구의 시간으로 따지면 오후 1시. 배 내에서 파는 간식들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게끔 하려는 상술이 돋보이는 시간표였다.

“그, 그건 그렇지만. 솔직히 옷이 너무 천박해서…”

아델라는 메이드복을 떠올리며 눈을 찔끔 감았다.

어제 받은 메이드복의 치마는, 지금 입고 있는 속바지보다도 길이가 짧은 치마였다.

“그, 그래?”

하영은 천박하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게 천박하다면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뭐지?

“그, 그 그렇구나. 음. 천박…… 천박하긴 하지.”

아델라는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같은 처지인 그녀가 한 말은 생각보다 하영에게 많은 충격을 입혔다.

생각해보면 아델라가 가지고 있는 드레스는 종류가 다양했지만, 노출이 많은 옷은 없었다. 제일 노출이 많은 옷이 발목이 보일락 말락 하는 외출용 드레스니 더 할 말도 없었다.

아니. 아직이다.

하영의 투쟁심이 조그마하게 고개를 들었다.

투쟁심은 말했다. 아직 지지 않았다.

“천박하지만. 괜찮아. 난 남자다. 이정도 노출은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하영의 중얼거림에 아델라의 눈이 커졌다. 14개월 동안 영애로 살아온 아델라가 보기에 하영은 그냥 외모가 예쁜 여자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뇨. 언니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데요.”

“아니 남자야. 난 남자다. 예쁜 여자를 보면 설레는 내 가슴이 그걸 증명한다.”

“그건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애 아닌가요? 저처럼요.”

아델라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아델라는 그런 하영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언니 지금이라도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델라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자신은 이미 현실에 적응했다. 아델라가 시스템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자신도 현실과 타협하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방송 시스템이 영애 만들기 시스템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적어도 시청자가 아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래. 그래도 나는 괜찮잖아. 평생 여자처럼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남자니까.”

“언니…”

그런 옷을 입고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아델라는 검은 천 사이로 튀어나온 하영의 하얀 골반을 보며 뒷말을 삼켰다.

단란한 한때였다.

***

막 비밀통로에서 나왔을 무렵.

하영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을 목표로 정했다.

아델라와 아벨이 마음에 걸렸지만. 시간 관계상 목표 경로에 있는 안전한 도시에 떨어뜨려 두고 홀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영은 곧바로 그 생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우연히도 아델라와 아벨이 목표로 한곳이 하영이 가야 할 방향과 정확히 같았던 것이다.

“절망의 도시 휘스머, 저희는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절망의 도시 휘스머.

‘엑스트라 빙의는 거절하겠습니다.’에서 나오는 마경.

각종 몬스터들로 인해 갈라진 대륙에 세워진 유일한 마을이자 아델라가 향하는 곳.

그리고 하영이 간절히 원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이었다.

“왜 거기에 가는 거야?”

하영의 말에 아벨이 말했다.

“카루스경 때문입니다.”

“카루스경?”

뜬금없는 낯선 이름에 하영이 되물었다. 무언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예 그 카루스경 말입니다. 망국의 마지막 자손이자 이 세계의 또 하나의 악역. 그가 휘스머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벨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영은 이어지는 아벨의 말에 표정이 굳었다. 이제야 기억났다.

카루스.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기울었던, 저주받은 왕자. 동시에 운명을 부정하다 악역이 되고 말았던 사람. 이라고 ‘엑스트라’주인공이 말했던 인물이다.

“아벨이 그 이름을 말을 하는 거 보니, 아델라도 꽤 고생했나 보네.”

하영은 아델라가 아벨에게 소설의 이야기를 다 설명한 것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도 하영님과 비슷한 고생을 좀 했습니다.”

아벨은 그렇게 말하며 낮잠을 자는 아델라를 바라봤다. 하영은 현시점의 카루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네. 엑스트라 빙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는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악녀인 아델라를 빠르게 처리하고, 세상에 혼란을 잡는다는 생각을 하는 애가 주인공이니까.”

하영의 말에 아벨이 풋 하고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하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바보 취급받는 거 같아 기분이 좀 그랬다.

“뭐야 아벨. 기분 나쁘게 갑자기 왜 그래.”

하영의 말에 아벨이 미소 지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지금 희망의 도시 휘스머에서, 정체를 숨기고 망국의 운명을 뒤집으려는 카루스경을 생각하셨지 않습니까?”

“그렇지.”

“지금의 휘스머는 하영님이 생각하는 그런 곳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물음에 답하는 하영을 보며 아델은 전투에서 엉킨 머리를 정리했다.

“괜히 희망의 도시라 불리는 게 아니거든요.”

“희망의 도시라고?”

아델의 말에 하영은 소설 속에 짤막하게 나왔던 휘스머에 대한 묘사를 떠올렸다.

나무가 동이나 사막화가 진행되는 산, 비가 오지 않아 말라버린 우물. 굶주린 으로 인한 도적 떼. 그리고 언제나 도시를 노리는 몬스터들.

하영이 아는 휘스머는 무엇하나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는 땅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스러운 하영의 모습에 아벨이 어딘가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뒷골목에서 태어난 저는 태생부터가 비참하고 형편없었죠.”

뜬금없는 소리에 하영이 팔짱을 꼈다. 아델라가 아벨에 대해 적게 떠들었었기에 아벨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자신의 물음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가만히 듣기에는 지금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아벨은 그런 하영을 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영님. 그거 아십니까? 저는 지금 남작입니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 천대받고 멸시받는 존재였던 과거와 다르게,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저를 우러러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길을 걷는 건,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은 ‘아벨’인데 말입니다.”

아벨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누가 들어도 즐거워한다는 걸,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웃음소리였다.

“하하하하….”

그러다 어느 순간 웃음이 딱 끊겼다. 아벨은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적응해라. 현재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미래에. 저의 은인인 여자가 해준 말입니다.”

아벨의 눈이 하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보고 있는 것은 하영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더 멀리 있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였다.

“버러지 같은 운명을 타고났지만. 죽을 때는 귀족으로서 관에 모셔지겠죠. 저는 어쩌면 기사단장으로 역사에 남을지도 모릅니다.”

아벨은 당당하게 자신의 운명을 밝혔다. 하영은 실제로 아벨이 자신의 말대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굳은 의지가 있으니까.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평범하게 살다 죽을 거로 생각한 내가 소설에 빙의 된 것처럼. 아벨 또한 갑작스러운 병에 죽을 수도 있고, 오래 살다가 수명이 다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다. 사람의 운명은 사람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아. 난 세상의 끝에 도달해 소원을 빌 거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하영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기 싫다. 소설에서 정해진 대로 끔찍한 삶을 살 수는 없다.

“우문현답.”

하영의 대답에 아벨은 다시 웃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다르게 진짜 웃음이었다.

“제 질문이 어리석었습니다.”

아벨은 팔과 다리를 몸에 딱 붙였다. 차렷 자세였다.

“소설대로라면 빛을 보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저는 지금 귀족이 되었습니다.”

정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하영에게 예의를 표했다.

“어? 어. 그렇지.”

하영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인사하는 아벨의 모습에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아벨은 대체 누굴 보며 대화하는 거지?

“지금. 하영님의 빛을 가리는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건 현재의 하영님도 마찬가지겠죠.”

아벨은 미래를 보는 예언가처럼 현기를 띄는 눈으로 하영을 쳐다봤다. 하영은 아벨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벨, 어디 아픈 거 아니지?”

그런 하영의 걱정에도 아벨은 끝까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과거는 현재를 나타내죠,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결과물이고요. 그렇다면. 운명은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남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배웠거든요. 아! 그리고 저는 약속을 다 지켰습니다.”

그게 비밀통로 입구에서 말한 마지막 대화였다.

***

아벨은 손을 들어 하영의 뒤를 가리켰다. 아벨을 보고 있던 하영은 고개를 틀어 손이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뭐야 저게.”

그곳에는 높은 건물이 있었다. 현대의 높은 건물이라 생각하면 작고 볼품없지만. 잘나가는 왕도에서도, 역사 깊은 클로비스에서도, 이 세계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현대 건축 기술이 거기에 있었다.

“희망의 도시. 휘스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영님.”

과거 아벨이 말한 질문의 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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