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47화 (47/85)

〈 47화 〉 5. 소설 TS 빙의

* * *

하영이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알게 된 당시. 하영은 상점능력으로 휘스머를 성장시키고, 그 대가로 아델라를 보호해달라고 약조를 받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절망의 도시 휘스머에 도착한 당일. 하영은 휘스머의 땅을 밟자마자. 바로 카루스를 보러 가려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넓은 도시에서 어떻게 그를 찾을 거냐 싶겠지만. 카루스가 있는 곳을 찾을 자신은 있었다.

기억은 잘나지 않지만. 휘스머에서 가장 크고 건물다운 구상을 갖춘 곳에 카루스가 산다고 했다. 이는 절망의 도시 휘스머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휘스머의 도시 풍경을 본 하영은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가까이에서 본 휘스머는 소설에서 언급된 것하고 뭐 하나 비슷한 곳이 없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야…’

하영은 주변을 둘러다 보았다.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눈에 보이는 것은 똑같은 크기의 아파트뿐. 심지어는 아파트의 색깔마저 같다.

‘그래도 숫자는 쓰여 있네.’

다른 것이라고는 아파트에 쓰여 있는 숫자뿐. 그 외의 모든 것이 똑같다.

“신기하지?”

느끼하지만, 그런 느끼함을 매력으로 만들어주는 중후한 목소리.

“우리 도시의 희망 중 하나인 ‘아파트’라는 거야.”

하영은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는 남성을 바라봤다. 아까서부터 무시하고 있는데, 자꾸 말을 걸어온다. 포기라는 걸 모르는 건가?

“너만 원한다면 좀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도 있어. 너의 외모가 딱 마음에 들었거든. 어때? 관심 좀 있어?”

남자는 하영의 어깨에 슬쩍 팔을 올렸다. 로판에서 나왔다면 능글남이라면서 태그가 달려있을 것 같은 남자였다.

“괜찮습니다.”

남자인 내가 이딴 놈에게 이성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주먹이 빨리 때리라며 울부짖었지만. 하영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나 아니면 ‘아파트’에서 자세히 아는 사람 찾기 힘들다? 아니면. 이미 알고 있나?”

하영의 단호한 대답에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하.”

“하아.”

그 끈질김에 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대인에게 아파트라는 걸 알려주겠다며 헌팅을 하는 판타지 사람이라니. 이건 꽤 머리가 아프다.

“저리 가라. 지금 주변 지리를 외워야 해서 바쁘다.”

하영은 자신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팔을 쳐내며 말했다. 그러나 팔을 쳐내자마자 남자가 다시 어깨 위로 팔을 올려놓았다. 짜증이 솟구쳤다.

“휘스머의 주변 지리라… 아가씨 꽤 운이 좋은걸?”

남자의 행동에 하영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허리춤에 달린 아공간 주머니가 바닷바람에 흔들렸다. 하영은 그게 어서 창을 뽑으라는 신호로 느껴졌다.

“내가 이 동네 좀 잘 알고 있거든.”

남자가 하영 보며 웃었다.

“아마 나보다 이 동네를 잘 아는 ‘남자’는 없을걸?”

남자의 능글맞은 미소에 하영의 이성이 살짝 날아갔다.

‘그래, 내 어깨에 올라와 있는 팔 한 짝만 잘라내자.’

하영은 아공간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자신을 여자로 보는 건 참을 수 있다. 누가 봐도 여자니까. 하지만 남자가 나를 이성으로 보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살짝 따끔할 거다.”

하영이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아공간 주머니에서 창을 꺼냈다.

아니. 꺼낼 뻔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하영의 이성을 붙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언니! 배에 있는 통신구로 카루스에게 통신 보내기 성공했어요! 다행히 이 도시에 상주중이라네요!”

정박한 배 쪽에서 아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은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델라와 아벨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언니! 그쪽의 남자는…… 카루스?”

하영에게 가까이 다가온 아델라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하영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익숙한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아니 이분이. 소설 속, 원작 소설의 메인 악역이라고?’

황당함에 눈동자가 떨렸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카루스라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헌팅을 하는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아니, 악역이니까 쓰레기는 맞겠지만.

하영은 남자의 얼굴과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남자라는 이유로 대강 남자를 살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점이 눈에 들어왔다.

판타지 소설 세계관상 보기 어려운 검은 머리에, 품격 있는 제복. 거기에 로판에 나올 것 같은 외모까지.

‘어지럽네, 진짜.’

남자의 모든 것을 확인한 하영은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거짓말이라 믿고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사실 같았다.

하영이 그러고 있는 사이, 아델라는 하영의 어깨에 카루스 팔이 올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마중을 나오신 건가요.”

아델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풀려있는 표정과 다르게 격식 있는 말투였는데, 묘하게 적대감이 실려 있었다. 카루스는 느껴지는 적대감에 마주 보고 웃었다.

“아델라양, 이 아가씨는 누구? 설마. 나에게 소개해줄 여인인가?”

“하하, 농담도 참. 카루스님 안 보는 사이에 농담 실력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음? 농담이라니. 아델라양.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고.”

아닌 걸 알면서도 끝까지 우기는 능청스러운 모습에 아델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 짓고 있는 터라 안 그래도 올라갔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카루스님. 아니, 스승님. 이제 농담은 그만하시죠.”

더는 용서 못 한다는 듯한, 아델라의 단호한 말에. 카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로서 그렇게까지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도 스승이니까. 카루스는 그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카루스경. 주변 시선이 슬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델라의 옆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아벨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카루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이쪽을 보는 시선이 좀 많아진 것 같았다,

“그럼, 일단 다들 나를 따라와. 자세한 해후는 건물 안에서 나누자. 특히 검은 머리 아가씨는 반드시 따라오고.”

카루스는 모두에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으나, 시선만큼은 하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아델라양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쪽으로 오겠거니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카루스의 말에 의자에 앉아서 숨을 고르던 아델라가 물었다.

“2일 전부터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단 건가요?”

“에이, 아무리 우리 사이라지만. 그 정도로 기다릴 필요는 없지. 거리도 이렇게 가까운데.”

카루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손을 팅겼다. 그러자 그의 손 위로 도시의 모형 같은 것이 생겨났다.

“자, 봐봐.”

카루스는 자신의 손을 아델라에게 보여주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착장과 이 건물과의 거리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도시의 부흥계획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잘도 대화하네.’

즐겁게 떠드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하영은 약간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 친했던 사람을 빼앗긴 것 같다는 생각에서 드는 허탈함은 아니었다.

자신이 세웠던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에서 오는 허탈함이었다.

‘진짜 기운 빠지네…’

하영은 힘없이 어깨를 떨어뜨렸다. 사실 즉흥적으로 세운 계획이 무너지는 건 상관없다. 그만큼 상황이 좋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카루스의 태도는 사람의 기운을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마치 악질 시청자가 하영의 앞에 등장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 나도 이제 모르겠다.’

하영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멍하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스승님답네요.”

“역시 제자야. 내 마음을 너무 잘 안다니까.”

그러다 스승과 제자라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스승, 제자?”

하영은 아델라와 카루스를 번갈아 가며 보며 말했다. 아델라는 그런 하영의 모습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간상 밤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마저 해준다 했다.

“그래, 빨리 들려줘 봐.”

모든 걸 설명해준 자신과 다르게, 설명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아델라의 말에, 심술이 난 하영이 팔짱을 꼈다. 나 삐쳤어요. 라는 뜻이 담긴 행동이었다.

“조금 전에 들었다시피, 제게 마법을 가르쳐준 건 카루스예요.”

의도가 뻔히 보이는 하영의 모습에 아델라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영을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야기는 빙의 초, 아델라가 마법사를 구하는 부분에서 시작된다. 당시 카루스는 아무리 노력해도 망해가는 도시를 보며, 이대로는 안 된다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에서 지혜를 구해오기로 했다. 그의 스승이 말했던 대로.

하지만 비싼 여행 경비를 장기간 낼 돈은 망국에 존재하지 않았고, 여행을 1년 이상 계속한 카루스는 돈에 쪼들리는 생황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클로비스 영지에 들렀을 때, 우연히 후작가에서 영애를 가르칠 마법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정말 우연히 말이야.”

카루스가 하영을 보며 이야기했다. 아델라가 잘 설명하지 못한 부분은 카루스가 부연 설명을 넣어줬다. 덕분에 하영은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대뜸 내 이름이 카루스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자신이 빙의자라고 말하더라고. 아,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내 스승보다 더한 여자는 처음 봤어.”

“흐흠, 저는 당시에 급했으니까요.”

아델라가 마법을 배우는 시기에, 카루스는 아델라에게 지식을 나눠 받았다.

“덕분에 나라를 살릴 방법을 알게 됐지. 설마 나라의 이름에 저주가 걸려있을 줄은 몰랐어.”

책속에 펼쳐진, 미래라 봐도 무방할 정보부터.

“옆 나라에 숨겨진 광산도 좋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이 아파트라는 걸 짓는 방법이지.”

현대 지식의 일부분까지. 카루스는 아델라를 제자로 둔 잠시 동안, 말도 안 되는 고급 정보들을 얻었다.

“언니 이게 이야기의 끝이에요.”

“…굉장하네.”

이야기를 전부 들은 하영은 입을 떡 벌렸다. 너무 형편 좋게 굴러간 이야기였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전이라 악역으로 타락하기 전 인 건 둘째 치고, 카루스가 다른 나라를 여행한 건 소설에 나오지도 않았다.

“정말 굉장한 우연이야.”

하영의 말에 카루스가 쓰게 웃었다.

“아니, 이건 운명이야.”

“운명이라고?”

하영의 물음에 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 속에 이야기라지만, 여긴 현실이지. 원인 없는 결과는 잘 나타나지 않아, 물론 아예 없지는 않지만.”

내 스승처럼 말이야.

카루스는 잠시 말을 흐리며 하영의 눈을 바라봤다.

메인 악역인 카루스를 단순한 망국의 왕자에서 유능한 마법사로 키워준 인물. 그 인물은 정말 우연히도 하영과 같은 머리카락색과 눈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는 소설 이야기에 개입할 시간은 없었겠지.”

카루스의 말에 아델라가 끄덕거렸다. 자신이 하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저도 아벨의 스승이 아벨을 키워주지 않았다면 꽤 고생했을 거예요. 눈에 보이는 무력이 확 줄어들었을 테니까요.”

아델라의 말에 배에서 들은 아벨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과거는 현재를 나타내죠,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결과물이고요. 그렇다면. 운명은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남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결과물.

무언가 걸린다. 마치 다들 내가 무언가를 깨닫기를 바라는 사람들 같다.

“거기까지 하지, 너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으니까.”

카루스가 하영의 상념을 끊었다. 하영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노려봤지만. 능글스러운 카루스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밖에 누구 없나!”

카루스가 미소를 유지한 채 소리쳤다. 이윽고 비서로 보이는 자들이 방에 들어왔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하영 일행은 각자 호화스러운 방으로 안내됐다. 하영은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 했지만, 긴 여행을 한 만큼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비서는 며칠 동안은 편히 쉬면서 도시에 적응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데 와 다를 거라며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네.”

하영은 2층에서 사용했던 침대와 지금 누워있는 침대를 비교하며 혀를 찼다. 지구에 있는 침대와 비교해도 될 만한 퀼리티였지만, 이미 더 좋은 침대와 새태창을 경험한 하영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2층에 있는 침대는 전부 쌔벼올걸 그랬어.”

따돌림 당하는 느낌에 괜스레 투덜거리는 하영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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