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48화 (48/85)

〈 48화 〉 5. 소설 TS 빙의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도시, 휘스머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한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하영은 도시에 정착하기보다는, 이 층에서 올라갈 생각만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하영의 생각은 무뎌져 갔다. 이유 모를 카루스의 극진한 보살핌. 한국에서 사는 것같이 느껴지는 편안한 도시 생활. 예쁘고 착한 미녀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뭉쳐, 하영이 더 나아가기를 막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영의 의지는 차올랐다. 이 휴식을 발판삼아 날아오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8일째 되는 오늘도 마찬가지다.

­ 낭만검객: 하영아. 애들 다 잠수한다. 빨리 이 노잼층 좀 클리어해봐.

­ 아가리롤스타: 저 새끼 말 듣지 마!… 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거 같아…

­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하영의 하루는 침대에 누워 올라오는 채팅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전에는 시청자들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피며 벌벌 떨었었는데. 이제는 그게 수백 일 전의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진다.

‘채팅이 안 올라오니까 재미없네.’

예전에는 빠르게 올라왔던 채팅이, 이제는 가끔 올라온다. 그것마저 항상 비슷한 말들뿐이다. 어서 올라가라, 노력해라, 위험하다… 하도 들었더니 이제는 지겨울 정도다.

그리고 그건 아델라도 마찬가지다.

“아델라. 아직 9시밖에 안 됐잖아… 지겹지도 않아? 이렇게 아침 일찍 무언가를 하려는 거?”

“언니 슬슬 준비해야 해요. 스승님도 마경을 뚫을 준비를 마쳤다고요.”

이른 아침. 자신의 방에 찾아온 아델라가 말을 걸었다. 하영은 채팅창에서 시선을 돌려 아델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꺼림칙한 미소를 지은 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하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말에 곧바로 미소의 뜻을 이해했다.

“만약 스승님과 결혼해서 일생을 보낼 거라면 이대로 있어도 좋아요. 사실 스승님도 간절히 원하고 있을걸요.”

하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요즘 보는 눈이 이상하긴 했다.

카루스는 처음에 강한 호감만을 표했었다. 그건 아델라가 하영을 보는듯한 눈빛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가 이쪽을 볼 때마다 묘하게 닭살이 돋았다. 인상이나 시선은 변한 게 없는데 뭔가, 뭔가가 좀 그랬다.

“아델라. 점심으로 샌드위치 어때? 어제 봤는데 새로 개업한 가게가 있데.”

오싹해진 하영은 필사적으로 어제의 일과를 떠올렸다. 편안한 침대에서 오후까지 놀다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저녁에는 야시장에 있는 가게를 구경하며 추억을 쌓았다. 정말 알찬 하루였었다.

그에 비해 탑에서의 생활은… 정말 형편없다. 평범한 빵 하나에도 고소해한다며 좋아하고 잠도 편히 자지 못한다.

잠잘 때 새태창을 소환시켜 망을 보게 하긴 하지만. 새태창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라면 그대로 끝이다.

자는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거나, 육체를 농락당한 끝에 살해당한다. 허무하게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찾아와 부활시킨 후 제2의 인생을 살게 되겠지.

그렇게 비운 한 미래를 떠올리고 있자. 하영이 잡고 있던 이불이 점점 끌어올려 지기 시작했다.

“언니! 이러다 진짜 큰일 나요!”

으앗. 갑작스러운 상황에 하영이 이불을 꽉 잡았다.

“이불 건들지 마!”

“왜요!”

“나 속옷만 입고 있어! 그리고 몇 명뿐이지만 지금도 시청자도 보고 있다고!”

하영의 말에 아델라가 하영의 두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힘을 줘서 하영을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잠깐! 하지 말아봐!”

하영의 만류에도 아델라는 꿋꿋이 하영을 당겼다. 하영은 속수무책으로 아델라의 손에 끌려다녔다.

아델라가 힘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닌 걸 생각해볼 때. 육체에 강화 마법을 쓴 것이 확실했다.

이것 참 나도 창을 들 수도 없고. 마법사는 치사하구만.

결국 하영은 침대 밑으로 끌려 내려졌다.

하영은 이불을 돌돌 만 채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 한심한 모습에 아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대체 왜 속옷만 입고 있으신 거예요.”

“그게 편하잖아. 난 원래 잘 때 속옷만 입고 잔다고.”

하영의 말에 아델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언니. 노출증 있어요?”

“노출증이라니. 단순한 취향차이라고. 그동안 탑에서 생활하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

옷 입기도 귀찮다는 듯, 이불로 몸을 돌돌 싸맨 하영의 말에 아델라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도 그렇지 스승님도 근처에서 머무는데 너무 무방비하잖아요!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애초에 다른 옷도 좀 입고 그러세요! 골드도 많이 버시는 분이 왜 그 옷만 그렇게 입는 거예요! 싸구려라도 좋으니까 노출이 적은 옷 좀 입어주세요!”

어어. 듣고 보니 좀 그러네.

아델라의 외침에 하영은 깊은 상념에 빠졌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다.

배에서는 이해 못 했지만, 아델라가 메이드복을 입지 않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여긴 안전한 곳이다. 능력치 보조가 없는 옷을 입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방송과는 다른 잔잔한 분위기 탓에 시청자도 많이 빠졌다. 만약 이곳에서 평생을 살 거라면 이제 내가 원하는 데로 생활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아니, 아니야. 난 올라가야 해.’

눈을 감았다. 오늘은 휴식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그러니 현재에 익숙해지지 말고 온 힘을 다해 즐기다 가자.

하영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영이 상념에 사로잡힌 사이, 아델라는 하영을 문 앞까지 하영을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어제 제가 말해 드렸죠? 오늘이 결전의 날이라고. 스승님이 말하기를 오늘 마굴로 진격할 예정이래요. 어서 가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아델라는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졸지에 문밖으로 끌려 내려진 하영은 문을 몇 번 두들겼지만, 아델라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잠깐! 아공간은 주고 가야지! 나 속옷밖에 안 입었다고!”

“몰라요!”

하영은 아델라를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아공간 주머니도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하영은 카루스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목적지는 카루스의 응접실이었다.

“이불을 말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하영은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이불을 꽉 잡았다.

휘스머에 온 첫날. 카루스의 말에 이야기가 중단되고. 궁금증을 풀지 못한 하영은 다음날 바로 카루스를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카루스는 이 도시의 지배자이자 망국의 왕이었다.

그에게는 이 도시를 살려내 새 나라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는 거대한 목표가 있었다.

하영과 같았다. 둘은 멈춰서 서 안주할 시간 따윈 없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자. 고급스럽지만 과하지 않은. 거대한 방이 나타났다. 가운데에는 거대한 원형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거울을 비롯한 여러 도구가 즐비해 있었다.

“아 왔구나. 지금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어.”

탁자 뒤, 쇼파에 앉아 있던 카루스는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하영을 올려다봤다. 이전의 하영이라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에 분노를 느꼈겠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쾌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탓이려나.

하영은 쓰게 웃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델라와 화장실 앞에서 어디로 들어갈지 싸웠던 일부터 닭꼬치를 양손에 들고 번갈아가며 먹었던 작은일까지.

“준비는 끝났어?”

추억을 정리한 하영이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유는 있었다. 카루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불을 보면서 눈에 띄게 침을 삼키는데 머릿속에서 경종이 계속해서 울렸다.

‘이런 분위기 좋지 않아.’

하영이 쇼파에 앉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카루스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하영의 뜬금없는 말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있는 쇼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너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카루스는 하영이 무슨 생각으로 저 말을 했는지 알았다. 수많은 국가를 돌아다니며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교류를 나눈 그였다. 하영의 생각 따위는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너무하구만.”

카루스의 능글맞은 행동에, 하영은 카루스가 들을 수 있도록 아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앉으라는 말을 물려달라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하영에게 앉기를 권유했다.

철퍼덕.

계속되는 권유에 하영이 백기를 들었다. 카루스는 그런 하영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델라양, 아니 실례. 제자의 동의하에 그녀의 기억을 읽었어.”

카루스는 아델라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도로 철회했다. 모든 것에 공과 사가 철저한 그였기에. 지금 이 순간을 사적인 일이라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저 너머에 있는 엘리베이터라는 걸 원한다며.”

카루스는 잠시 탁자 위에 놓인 거울을 쳐다봤다. 능글스러움이 사라진 것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걸 타게 되면 아마 다른 세계로 가는 걸 테고 말이야. 맞지?”

카루스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카루스는 찹찹한 표정으로 하영을 바라봤다.

“본론만 말하자면. 도울 준비는 끝났어. 대륙 외부에 있는 병력 빼고는 병력 대부분을 근처로 소집시켰거든. 어때 대단하지?”

카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영양. 만약 하영양이 여기에 남는다면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걸 쥐여줄 수도 있어.”

카루스는 의기양양하게 하영을 바라봤다. 묘하게 자신을 자랑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영은 갑자기 변해버린 카루스의 분위기에 당황해 하면서도 그의 의중을 알기 위해 그를 노려봤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물론 하영양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의지로 가득한 하영의 눈을 본 카루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나태하게끔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다 제공했는데도 결국 그런 모양새를 하면서까지 내 앞에 찾아왔잖아? 안 그래?”

카루스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대뜸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된 영지는 이 도시 하나뿐이지만. 난 나름 왕이라고. 왕 앞에서 그런 차림을 할 수 있는 건 이 세계에서는 당신뿐일 거야.”

이어지는 직접적인 어필에 하영은 카루스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지를 깨달았다. 결국에는 자신이 유능한 남자라는 어필이었다.

하영은 카루스의 뻔뻔한 태도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뻔뻔한 건 처음이었다.

***

카루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이야기를 시작한 초반, 카루스가 이야기를 주도하며 하영에게 능력 있는 남자라는 것을 어필했다면. 중반부터는 하영이 이야기를 주도했다.

카루스는 하영이 자신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중간에 좌절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델라의 기억을 읽었다면 네가 나온 소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하영의 말에 카루스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처절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이미 기울었었다! 무엇을 더 하라는 말이냐! 이미 끝은 정해져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카루스의 말에 집중하던 하영은, 읽어본 적 있는 듯한 대사에 눈이 뜨였다.

“…그건.”

“맞아. 소설에서 나온 내 명대사야. 어때 좀 비슷해?”

놀란 게 확실한 하영의 모습에 카루스가 웃었다.

“난 이걸 주인공 앞에 가서 말해 줄 생각이야. 물론 내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말이지.”

처절한 투로 말할 때와는 180도 다른 카루스 진지한 말투에 하영의 눈이 커졌다. 설마 저런 당당한 행보를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영양은 어때. 주인공을 만나게 되면 무슨 소리를 할지 정해뒀어?”

“그건…”

“생각도 해보지 않은 모양이네. 하. 이렇게 준비가 덜 돼서야. 책 속에 빙의한 빙의자라는 이름이 울겠어. 나와 다르게 전혀 다르면서 말이야.”

카루스의 말에 하영의 표정이 굳었다. 하영은 주인공을 피할 생각만 했을 뿐. 마주 보게 된다는 가정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카루스는 상념에 빠지려는 하영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말을 걸면, 이 여자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겠지만… 제자로서 스승의 첫 출발을 방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작에 눈치 챘어야 했는데…”

하영은 맨 처음 카루스를 못 알아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연한 것이었다. 말투도 생김새도 전부, 소설에 쓰여 있던 것과는 달랐다.

카루스는 카루스가 맞지만, 동시에 카루스가 아니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정하영이지만 정하영이 아니었다.

“카루스가 내가 아는 카루스가 아니게 된 이유는 아델라겠지.”

아델라를 처음 본 날. 시청자들이 말했다.

저 여자를 중심으로 세상의 인과가 약간 비틀려 있다고.

당시에는 빙의자라서 그랬거니 싶었지만, 빙의자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시청자들에게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나와는 달라.”

아델라는 자신의 운명을 비틀기 시작했다. 주인공들이 아델라를 적대하는 이상 위기는 계속 생기겠지만, 그녀라면 아마 잘 해결해 낼 것이다. 이전처럼, 늘 그래 왔듯이.

“투쟁은. 아델라의 것이 아니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악녀, 운명, 빙의자. TS… 머릿속에 불기 시작하는 바람에 여러 단어들이 뒤섞였다. 전부 아델라와 자신의 공통점인 단어들이었다.

“이제 알 것 같아.”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마구 흔들리는 시선 속에, 문득 거울이 들어왔다. 하영은 이곳에 거울이 있는 것이 필연처럼 다가왔다.

우연이 아닌 필연.

“카루스 잠시 거울 좀 빌릴게.”

하영은 카루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하영도 잘 아는 여성이 있었다.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았음에도 찰랑거리는 검고 긴 머리와, 그에 반대되는 하얀 피부.

그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성이었다.

레드 와인처럼 붉은, 묘한 매력의 눈동자와 아물기 시작한 눈 주위의 상처.

거울 속의 여자를 본 하영은 깨달았다.

이 층에는 아델라를 제외하고도, 악녀에 빙의한 빙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악녀의 운명에서 빙의자를 구출해내세요.]

“이 정도면 나는 시련을 성공적으로 끝낸 거려나.”

카루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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