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7. 탐정 없는 범인 찾기
* * *
최초의 선택.
등반자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휴식의 층이자, 최초의 선택이 기다리는 곳. 동시에 5층의 이름이기도 했다.
“선생님들 저거 보이십니까?”
하영은 엘리베이터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렇게 큰 건물은 난생처음 봅니다.”
살면서 본 건물 중 제일 높았다. 현대의 건물을 바탕으로 지어진 희망의 도시도, 1층의 3개의 탑도 이보다 높진 않았다.
“다른 건물들도 꽤 크기가 크네요.”
초롱초롱한 하영의 눈이 휙휙 움직였다. 조금 전 하영이 지목한 건물보다는 작지만, 크고 긴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마다 작은 건물들이 적절하게 배치된 것이, 큰 건물이 여럿 있음에도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네요. 도시의 외관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같아요.”
하영이 국어책을 읽는 사람처럼 말했다.
“가까이 가봐야 알겠지만. 겉보기에는…”
낭만검객님이 100골드 기부.
그만해 시2발.
빵빠레 소리에 하영이 말하는 것을 멈췄다.
늘불편한사람님이 10골드 기부.
아니. 시발 우리도 눈 있어. 하영아 제발 닥치고 밖으로 좀 나와 봐.
이어지는 기부에 하영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임신최적화여캠만봄: 항복. 항복이요.
수영장파티정하영: 아니. 시발. 이년은 1시간을 잠수타고 왔는데도 아직도 엘리베이터 안이야?
하영하영: 시발 내가 이래서, 보직군영으로 적당히 놀리자 했잖아.
악질방송만보는사람: ???: 보직군영이 왜 웃겨요?
보직군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ㅅㅂ 진짜 하영이가 최고다 ㅈㄴ 뻔뻔해.
야스마스터: 이 악물고 채팅 무시하는 거 너무 대단해~ 하영이 칭찬해~
채팅창의 내용에 하영이 미소 지었다. 1시간 동안 엘리베이터 안에서 잡소리를 늘어놓은 보람이 있었다.
채팅창은 시끄러워졌지만. 하는 말들을 들어보니 당분간 그 일로 괴롭힘을 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커험, 오늘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아시겠죠? 선생님들?”
기 싸움에 승리한 하영이 말했다.
노답이영: ㅇㅋ
내말대로투자하면잘됨: ㅇㅋ
포장마차라면도둑: 시청자만 믿으라구! ^^
햄버거집케찹도둑: 우리만 믿어^^
AV촬영: ??? 무슨 일 있었음?
대답이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하영은 아공간에서 물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제가 닉네임을 언급하는 것을 동영상으로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녹화 비스름한 거라도 해놓으신 분들은 지금이라도 삭제해주세요.”
농락당한 과거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건 우리들의 비밀로만 남으면 된다.
하영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정착취하영: ^^
노답이영: ^^
Av촬영: ^^
애기하영: ^^
인사할때는하영: ^^
정자도둑정하영: ^^
아가리롤스타: ^^
낭만검객: 나만의 작은 하영이를 널리 퍼트린 새끼를 죽인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어린이애호가: ㅅㅂ 채팅창이고 나발이고 다 곱창 났네.
투명한 채팅창 사이로 시스템 메시지가 보였다.
[5층 : 최초의 선택]
[잠시 후 5층의 문이 열립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지고, 문이 열린다. 흐으읍. 하영은 도시의 공기를 맛봤다.
“자. 그럼 가보겠습니다.”
공기는 딱히 특별 할 거 없었다. 하영은 열린 엘리베이터를 뒤로한 채 앞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움직였다.
터벅.
하영의 발이 엘리베이터에서 나간 순간,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택하십시오.]
[등반자] / [거주자]
[*당신은 현재 등반자입니다.]
[*등반자들은 최소 50일마다 시련에 도전해야 하며, 50일이 넘어가면 죽습니다.]
[*시련 중에는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한번 선택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만약 지금 등반자로 남는다면, 다음 선택은 15층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시스템 메시지. 하영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 갔다.
“으음. 역시 똑같네.”
알고 있던 내용이라 금방 읽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소설의 내용과 다른 점은 없었다.
50일. 한층 내려갈 때마다 1일씩 대기 기간이 있다. 이 탓에 등반자들은 자신의 최대 층에서 25층 이상 차이 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없다.
게다가 등반자가 거주층으로 내려오면 그 거주층에 있는 모든 등반자에게 알림이 간다.
퀘스트라는 이름의 토벌 알림이.
‘분명 거주층으로 내려온 등반자를 잡으면 등반자가 가지고 있는 스킬을 하나 무작위로 얻을 수 있었지.’
등반자 토벌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하나 있었던 터라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시련 중에는 50일마다 시련에 도전해야 하는 제약이 사라진다. 이것도 중반쯤에 주인공이 수련한답시고 100일 정도 시련에서 뻐겼던 적이 있었으니 확실해.’
하영은 기세를 몰아서 소설의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5층, 15층, 25층… 5층부터 10층을 오를 때마다 등반자에게 선택의 기회가 찾아오는 것도 맞아.’
휴식의 층에서 등반자들은 계속 오를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포기하면 탑의 속한 존재가 되지만 올라갈 필요가 없다. 나이도 평범하게 먹고, 아기도 낳을 수 있는 둥, 비교적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다 죽고 싶다면, 거주자가 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하영은 망설임 없이 등반자를 선택했다.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의 몸이 남자였다면, 이원혁이라는 악마가 자신을 노리개로 삶기 위해 오고 있지 않았다면, 하영도 거주자로 삶을 마쳤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이라는 걸 하영은 잘 알고 있다.
[정말 등반자로 남으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한 번 하영의 선택을 재고해보라 했다.
“응. 그렇게 겁줘도 거주자 안 해.”
하영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등반자로 살 것을 선택했다.
[행운을 빕니다.]
하영은 시스템 메시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제일 큰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10분이 지났다.
워낙 건물이 커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건물은 멀리 있었다.
“선생님들. 그거 아십니까?”
말없이 걷던 하영은. 시청자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층 구간에 불과한 5층이, 이렇게 발전한 이유.”
낭만검객: 어허! 우리를 뭐로 보고! 당연히 알지!
아가리롤스타: ㅇㅇ 딱 보면 딱 안다.
꿀벌아넣을게: 비록 기억을 읽는 마법의 효과가 있긴 했으나, 다른 세계에서 온 빙의자 한 명으로 건축 기술이 발전함. 한 명만으로도 그 정도인데, 수많은 세계의 사람이 모이는 곳임. 발전하는 건 당연함.
야스마스터: 아니, 하영이가 아는 걸 우리가 모르겠어? 생각 좀 하자 하영아.
악질방송만보는사람: 하영이는 그게 매력인데…
하영이 말하자마자 채팅을 자주 치는 이들이 빠르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하영이 원하는 채팅은 아니었다. 하영은 모르니까 설명해달라는 말을 원했다.
“와, 씨. 진짜 아네. 이러면 안 되는데.”
소설에서 읽었던 내용을 토대로, 이 도시에 관해 이야기하며 지루한 시간을 줄여주려던 하영은, 자기를 바보 취급하느냐며 호통치는 시청자들을 보며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시청자들이 하는 말이 다 정답이라 뻘쭘했다.
“…선생님들 말이 맞아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튜토리얼이 진행됐어요.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모이고 힘과 지식이 모였죠.”
하영은 손에 들려있던 물병을 아공간에 집어넣으며 계속 말했다.
“능력이나 지식이 많은 진짜 알짜배기들은 다 올라가서 저층에는 없지만. 그들이 나눠준 지식만으로도 도시를 꾸리기에는 충분했어요.”
하영은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도시가 발전했던 이유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도시에서 사는 거주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거주자들은 휴식의 층에 있는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으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몬스터를 잡으면 각종 아이템이 떨어지거든요. 아! 맞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낭만검객: 아니 시2발 다 안다고! 그만해 이 씹년아!
병신을보면짖는개: ㅋㅋㅋ 심심할까 봐 계속 말 걸어주는 게, 주인 왔다고 꼬리 흔들며 오는 게 개 같네. 하영이 암컷 개 같아.
어린이애호가: 약간 관심을 달라는 어린애 같아서 보기 좋음 ㅇㅇ 이대로 방송 유지하자.
즉석나비탕24시: 응 지랄하지 마. 하영이는 까칠한 고양이 같은 맛으로 보는 거야. 봐주니까 지가 갑인 줄 알고 나대는 게 ㄹㅇ 꿀잼임. 나비탕할떄가 기대됨.
아가리롤스타: 하영아, 컨셉 유지해. 까칠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웬 순하고 애교떠는 강아지가 한 마리 있어 ㅅㅂ!
늘불편한사람: 시발! 너희도 ㅈ같은 똑같아. ㅈ같은 장문충 새끼들 다 쳐내!
낭만검객: ㄴㄱㅁ
아가리롤스타: 하영이 아직 강퇴기능 못씀.
“…어. 어쨌든. 저 같은 등반자들은 이 던전을 끝까지 클리어하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어요.”
시청자가 그만 말하고 빨리 걷기나 하라며 재촉하거나, 평소처럼 입 다물고 있으라 해도, 하영은 꿋꿋하게 하던 말을 끝까지 내뱉었다.
대범한 척하면서도 내심 시청자의 여론을 파악하고 행동하던 평소의 하영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시청자들은 그 모습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영하영: 하영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음?
정하영제발뒤져: 생방은 처음이라 나도 모름.
탑에사는하영: 모르면 채팅을 치지 마 ㅅㅂ련아.
생존게임좋아요: 아뇨, 원래는 좀 과묵한 편이에요.
아가리롤스타: ㅇㅇ 콘텐츠할때만 말 많고, 평소에는 조용한 편인데. 오늘은 좀 이상한 듯. 계속 억지 텐션임.
검은콩나물: 아무래도 저 마이크 모형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요?
낭만검객: 그런가?
방송시청만30년: 음해 ㄴㄴ 뜬금없는 마이크는 왜 걸고넘어짐. 저건 그냥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은 거임.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방송시청만30년: 방송만 30년 봄. 믿어 보셈 ㅇㅇ
“선생님들, 잠시만요!”
하영은 산으로 가기 시작한 채팅창을 다시 자신 쪽으로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야깃거리를 떠올렸다.
그러나 마땅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뭔가. 새로운 게 필요해.’
하영은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라면 진짜 필요할 때 빼고는 채팅창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낭만검객: 하영아 마이크 한번 벗어봐.
욕절대안하는성좌: ㄴㄴ ㄴㅇㅁ때문임.
방송시청만30년: 마이크를 탓이 아니라니까. ㅅㅂ 답답하네.
검은콩나물: 마이크 때문일 거예요.
아가리롤스타: ㅇㅈ. 하영아 마이크 벗어. 미친 텐션으로 흑역사 적립되기 전에.
야스마스터: 하영아 주인 기다리는 개새끼마냥 도로에서 끙끙거리지 말고 그냥 옷이나 벗어라, 이게 맞다.
말이쁘게함: 아니 애꿎은 옷은 왜 벗으래. ㅅㅂ
미션석세스: 옷을 벗지, 그럼 마이크를 벗음?
낭만검객: 마이크 빨리 버려 ㅅㅂ
“선생님들, 지금 재미있을 만한 소재를 찾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채팅창을 신경 쓰던 하영은, 자신의 귀에 걸려있는 마이크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마이크를 왜 버려요. 이거 6,650골드짜리인데.”
빰빠빰!
낭만검객님이 16,650골드 기부.
버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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