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8. 등반의 시작.
* * *
해냈다.
하영은 보스 방 너머로 보이는 참상을 보며 침을 삼켰다.
마지막에 투창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 하영은 검투사의 의지가 아닌, 자신이 해온 전투의 경험을 토대로 움직였다.
공격이 보이면 막거나 맞고, 바로 반격해 트롤을 죽였다. 보스의 방에 있는 트롤도 그렇게 죽였다.
보스 트롤이 내뱉는 굉음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투창을 사용했다.
“흐어….”
하영은 창에서 손을 놨다. 힘이 빠졌다. 던전의 보스를 클리어했다는 결과물에, 그리고 창이 손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빠져나가는 능력치에.
“후폭풍이 장난 아니네.”
하영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긋난 조각을 이어 붙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중하급에 오른 자가치유의 재생력과 남아 있는 포션의 치유력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영의 몸을 고쳐 주고 있었다.
물론 대가 없는 치료는 아니었다. 포션을 먹거나 바른다고 상처부위에 마취가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몸 이곳저곳이 아파왔다.
그러나 이 또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남아 있는 고양감에 기분이 좋았다.
“하하. 하하하!”
하영은 자신의 검은 마창을 보며 웃었다. 이거다, 이거였다.
자신이 원하는 압도적인 힘. 악마가 사는 마을에서 느껴본 전능감에 가까운 느낌. 이것이 하영이 원하는 것이었다.
비록 느낌만 비슷할 뿐, 붉은 달의 버프처럼 재능을 끌어올리지는 못했으나. 마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와 기분이 그때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특히 투창을 시도했을 그 순간. 그 찰나만큼은 하영이 기억하던 붉은 달의 느낌과 백 퍼센트 똑같았다.
“크흠. 괜찮은가?”
나강함이 다가와 물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의 창을 바라보다,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 하영이 진심으로 걱정됐다.
“당연하죠. 그 어떤 때보다 괜찮아요.”
하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감정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사라져버린 전능감을 잊고, 사라져가는 고양감을 밀쳐낸다.
전투의 흥분은 진작에 사라졌다.
“흐우…”
숨을 한번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창을 줍고 주변을 둘러본다.
필립은 근육을 펌핑하며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고. 잭은 보스 방안으로 들어가서 보스 트롤이 들고 있던 검을 보고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지, 미친놈인가.
“크흠, 흠. 잭은 트롤의 검을 모으기 위해 들어온 거라. 그런 걸세.”
미친놈을 보는 표정으로 잭을 바라보고 있자, 뒤에 있던 나강함이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조용히 말했다.
“괜히 무기 수집가라 불리는 게 아니란 말이지. 하하하….”
웃음소리마저 힘이 없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파티원이 저러고 있다면 정말 창피했을 거다.
악질방송만보는사람님이 100골드 기부.
ㅋㅋ 왜 그런 표정으로 무기자랑좌를 봄. 미친 건 둘 다 똑같으면서.
어디선가 어린애가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은 이 것이 음성 기부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바로 채팅창을 확인했다.
공격하면터짐: 트롤의 왕국이라며, 이게 어딜 봐서 왕국임?
낭만검객: 뉴입이라 그런가 아직 잘 모르네, 원래 던전 이름은 보기보다 거창한 법인데.
아가리롤스타: 그건 맞지.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공격하면터짐: 니 엄마
야스마스터: 응 ㄴㅇㅁ
낭만검객: 응 ㄴㅇㅁ 아 시발럼아. 내 채팅 그만 뺏어가라고.
기부 음성에 또 억까가 시작된 줄 알았던 하영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채팅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다행이었다. 또 이 파티의 유일한 정상인 자신을 미친놈으로 몰아가는 줄 알았다. 아직 시청자들이 양심이라는 게 남아있기는 한 모양이네. 하영이 작게 웃었다.
낭만검객: 뭘 웃어 씹년아. 넌 니 주변이나 봐.
큼큼. 웃고 있던 하영이 목을 가다듬으며 표정을 굳혔다. 허공을 보며 웃고 있으니 옆에 있는 나강함의 눈치가 보였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지금 말인가?”
“예. 조금 급해서.”
“허어. 내가 오래 등반자 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너처럼 당당하게 화장실에 간다 하는 여자 등반자는 처음이다.”
나강함의 말에 하영이 작게 기침했다. 이런 여자는 처음이라고 말하니까, 뭔가 기분이 좀 그랬다.
“크흠. 거 여자는 오줌도 안 싼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혼자 몰래 다녀오니까 말이지.”
나강함의 말에 하영이 놀랐다. 아니 던전에서 몰래 혼자 사라진다고? 누가 그런 미친 짓을…까지 생각하다가 자신도 창을 들고 혼자 미친 듯이 앞으로 간 것이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커험! 아무튼, 저 화장실 갈 거니까, 훔쳐보지 마세요.”
하영은 나강함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파티원들이 저 멀리 떨어지게 되었을 때쯤. 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은 말이죠.”
트롤의 왕국. 이 던전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름이 거창할 뿐인 던전들과 다르게, 이 던전 밑에는 실제로 저주받은 트롤들의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
하영은 이 사실을 소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소설에서 트롤은 저주를 풀기 위해, 그리고 전투를 위한 병사를 늘리기 위해 트롤의 왕국이라는 던전 밑에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 이원혁이라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지상을 노렸다.
그들은 제일 먼저 트롤의 왕국이라 불리는 던전들을 모조리 부셔 저주를 풀었다. 그런 후 5층의 혼란을 틈타 지상에 있는 등반자와 거주자들을 급습했다.
저주가 풀린 트롤들은 강력했다. 트롤의 왕국을 수없이 클리어한 거주자들조차 힘에 부칠 정도였다.
만약 노련한 거주자들이 트롤들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5층의 주인이 되는 것은 사람이 아닌 트롤이었을 것이다.
‘저층의 대마법사가 괜히 오랫동안 5층을 통치한 게 아니란 말이지.’
저층의 대마법사는 이원혁에게 죽었으나,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노련한 거주자들은 아직 죽은 그의 의지를 따랐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트롤들을 죽이기 시작한 노련한 거주자들 탓에, 트롤들의 계획은 수포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준 피해는 고스란히 남아 5층이라는 도시를 무법 지대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하영은 트롤들이 저주를 풀고 나오기 전에 먼저 처서 트롤의 습격을 일을 없는 일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트롤의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트롤들의 진짜 보스인 트롤왕을 죽이고. 트롤들을 5층의 트롤들을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왕관을 이용해 이원혁에게 작은 피해라도 남길 생각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지.’
하영은 채팅창을 바라봤다.
낭만검객: 진짜 다들 모친 출타하셨나? 왜 이러지?
포장마차라면도둑: 트롤의 왕국, 진 클리어 보여주나?
아가리롤스타: ㄴㄱㅁ
생존게임좋아요: 트롤의 왕국에 있는 트롤 머리 하나당 50골드 미션 걸겠습니다.
애니실수로본사람: 진 트롤의 왕국? 크킄, 오레사마 쪼끔 기대해 버릴지도?
트롤에 관련된 미션,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 들어올지 모르는 기부. 진 트롤의 왕국 클리어는 골드의 맛을 제대로 본 하영의 입장으로서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톡 까놓고 말해서 이런 저주받은 트롤들을 움직인다 해서 저층의 대마법사와 이원혁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트롤들의 침공을 막아내던 노련한 거주자들마저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런 트롤들이 끼어들 수 있을 리 없다.
물론 가능성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기에 하영이 노렸던 거긴 하지만. 솔직히 좀 불안했다.
왕관으로 명령을 내린다 한들, 트롤들이 자신의 말을 그대로 따라 줄지는 미지수였다.
소설 속에서도 트롤의왕이 왕관으로 트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했지, 왕관 자체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게 적혀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짤막하게 나왔지만 하영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불확실한 미래냐. 확실한 골드냐.”
하영은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역시 하던 대로 하는 게 최고의 선택 같았기 때문이다.
“자! 선생님들 집중해주세요! 지금부터 트롤의 왕국 던전 올 클리어 들어가겠습니다!”
낭만검객: 지엔장! 믿고 있었다고!
억빠맨이야: 애. 가을 트롤이 잡는 맛이 있단다~
생존게임좋아요: 트롤 마리당 50골드.
심연의불길: 불로 지져서 잡으면 마리당 500.
하영하영: 보스 투창으로만 잡으면 1,000골드.
“하영하영님. 보스 공격 막는 건 가능한가요?”
하영하영: 가능. 그리고 하영하영님 하영 하고 인사해주면 500골드.
하영하영의 채팅에 하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쌓아온 방송 짬밥이 있다. 이제 그 정도 요구는 어렵지 않았다.
“하영하영님 하영. 닉네임 너무 멋지세요. 처음 볼 때마다 말하고 싶었는데 센스 넘치는 하영하영님 덕분에 이렇게 말해보네요, 감사합니다. 하영하영하영!”
하영하영님이 500골드 기부.
오우야. 이집 제대로네.
낭만검객님이 100골드 기부.
진짜 ㅈㄴ창피하다.
하영이내꺼에영님이 100골드 기부.
이거 닉네임 못 바꿈? 나 창피해서 채팅을 못 치겠음.
기레기는무슨새일까 님이 100골드 기부.
정보 ) 계정자체 아이디가 아닌, 방송에 들어올 때 만든 닉네임은 변경이 불가능하다.
귓가에 들려오는 여러 목소리. 하영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하영이내꺼에영님. 꼽으면 아시죠?”
하영이내꺼에영님이 100골드 기부.
몰라 이 ㅅㅂ련아.
***
하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필립은 조용히 잭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정도라면 마의 15층도 클리어할 수 있나?”
필립의 말에 잭은 바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녀는 규격 외야.”
“규격 외라고? 내가 보기에는 그저 강한 무기에 휘둘리는 것 같았다만.”
필립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잭이 폭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첫눈에 반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코미디였다.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뭐가 그리 웃긴가. 잭.”
필립의 가슴 근육을 펌핑하며 물었다. 그 물음에 잭은 웃던 것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무기를 수집하면서 많은 이들과 만나봤지. 그리고는 깨달았어.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거나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왜지?”
“그 무기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지닌 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든.”
그러니 하영양 부디 조심하게.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상위층으로 갈수록 클랜의 영향력은 넓어질 테니.
잭은 바보처럼 환하게 웃는 필립을 보며 뒷말을 삼켰다.
***
만남이 있으면 작별이 있는 법.
필립은 자신의 첫사랑을 바라봤다. 필립의 두 눈에는 이별로 인한 상처가 쪼르륵 내리고 있었다.
“크흡. 이 악마사냥꾼 필립.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사랑했다.”
애절한 것을 넘어서 처절하기까지 한 필립의 모습에, 참다못한 잭이 허리를 걷어찼다.
“지랄하지 말고 빨리 가자.”
잭은 기분이 좋았다. 이번 던전의 메인 보상으로 나온 트롤의 검을 아무런 코인도 주지 않고 양도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허, 애초에 너랑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어. 임마. 노릴 걸 노려야지.”
“으, 으엌! 사, 사랑했소!”
잭은 필립을 끌고 보스의 시체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보스의 시체 대신 포탈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포탈에 몸을 들이미는 순간, 그들은 트롤의 왕국 던전 입구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는 묻지 않을게.”
나강함이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던전이 끝나고 뒤풀이 파티의 인원끼리 뒤풀이라도 하며 잡담을 나누는 것이 보통이지만. 정하영, 그녀는 뒤풀이로 이 던전을 선택한 듯. 이곳에 홀로 남겠다고 하였다.
“너처럼 강한 이들은 다들 무언가 특이한 점이 있던데. 특이하기에 강한 거냐. 아니면 강하기에 특이한 거냐?”
포탈 앞, 빛나는 푸른 색 빛을 보며 나강함이 질문했다.
그리고는 답을 듣지 않고서 바로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만약 나강함이 끈질기게 남아 여러 질문을 해왔다면, 하영은 폭발해서 너희가 더 특이해 시발 놈들아. 라고 소리쳤을지도 몰랐다.
에휴.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재미난 파티였지만. 다시 같이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자, 그럼 선생님들. 트롤의 왕국으로 한번 들어가 볼까요?”
하영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만큼은 보였다.
“좋습니다. 그럼 더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골드 두둑이 준비해 두십시오!”
하영은 마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현재 운용할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창에 집어넣었다.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마창은 하영의 마력을 모두 잡아먹었다.
끼이익.
마력을 모두 흡수한 마창이 불길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색 기운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어서 자신을 던지라는 듯 하영의 손에 착 달라붙었다.
고양이가 집사에게 명령하는 듯한 그 모습에 하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바로 투창의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 보여주마! 내 최고 최대의 일격을!”
진짜 트롤의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
그건 보스를 죽인 곳 앞에서 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슈우욱! 슉!
하영은 창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마창에 넣어두었던 마력으로 투창을 한 번 더 발동시켰다.
빠르게 날아가던 창은 중간에 하영의 마력을 연료 삼아 더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목표는 던전 밖과 이어져 있는 포탈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