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65화 (65/85)

〈 65화 〉 8. 등반의 시작.

* * *

마창의 창날과 푸른 포탈이 닿는 순간. 이변은 일어났다.

시작은 동굴의 벽이었다.

보스방의 문이 닫히고, 방안의 벽이 인공적인 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바닥에 떨어진 마창을 주우러 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두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은 바뀌었다. 조금씩, 그러나 빠르게. 동굴의 형태가 사라지고 커다랗고 투박한 원기둥이 만들어졌다.

하영의 손이 마창에 닿았을 때. 하영의 앞에는 커다란 복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선생님들, 연출 죽이는데요?”

하영은 복도로 나가, 금색으로 도배된 복도의 기둥을 어루만졌다. 차가웠다. 아무리 봐도 방금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장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이곳으로 불려 온 건가 봐요.”

하영은 기둥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다 시선이 복도의 천장으로 향했다.

‘저건…’

하영의 눈이 빠르게 천장을 훑었다.

‘과연. 이래서 동굴 아래라 했던 건가.’

복도의 천장에는 익숙한 동굴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거대한 스마트폰으로 동굴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

하영은 이해하지 못할 이능이었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알았다. 이전, 하영은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저층의 대마법사. 그가 사용하던 검은색 점, 그것에 닿았을 때 일어났던 텔레포트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질적인 능력이야.’

상대방의 공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꺼림칙했다.

“얼른 출발해 보겠습니다.”

하영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보스의 방에서 봤던 문보다 더욱 거대하고,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있는 문이 하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영은 문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길의 끝에 트롤의 왕이 있다. 하영은 그 사실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감이었다. 강자를 알아보는 검투사의 감일 수도 있고, 마를 탐하는 악마의 피가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의 긴장감이 만들어낸 환상통 비슷한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게 지금 뭐가 중요하겠는가. 쓰러트려야 할 적들이 이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트롤 두당 50골드, 보스 투창으로만 잡으면 1,000골드. 잊으시면 안 됩니다.”

­ 심연의불길: 불로 지져서 잡으면 마리당 500은 어디 감?

“그건 몰라요.”

­ 심연의불길: ???

“불로 몬스터 잡는 게 보고 싶으면! 불로 몬스터를 잡을 수 있게 날 강화시켜 주던가!”

­ 심연의불길: ??????

물음표를 남발하기 시작하는 채팅창. 하영은 그 채팅창을 보다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롤들이 튀어나왔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두 번은 안 되지!”

하영은 창으로 제일 앞에 있는 트롤을 찔렀다. 그리고 바로 뒤로 몸을 뺐다. 창에 맞아 죽은 트롤의 오른쪽에서 날아온 몽둥이가 하영이 있던 자리를 지나쳐 갔다.

쿠워어!

쓰러진 시체를 밟고 넘어온 트롤이 하영을 향해 몽둥이를 내려쳤다.

“고맙다!”

하영은 그 모습을 보곤 히죽 웃었다. 좁은 문 앞에서 싸워준다면 하영의 입장에서는 땡큐였다.

“일을 더 편하게 해줘서!”

하영은 튀어나온 트롤들을 빠르게 섬멸했다. 그리고는 아공간에서 꺼낸 창들로 투창을 해 원거리로 공격하고, 날아오는 몽둥이들은 죽은 트롤의 시체를 방패삼아 막았다. 일사천리였다.

첫 번째 방에 있던 트롤들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전부 목숨을 잃었다.

하영은 쉬지 않고 바로 다음 방을 향해 뛰었다. 아까와 비슷한 복도를 지나 똑같이 생긴 문을 열었다.

쿠워어!

똑같이 생긴 지형에 비슷하게 생긴 트롤들, 거기다 똑같은 패턴까지. 하영은 빠르게 방들을 클리어해갔다.

물론 방마다 차이점이 없지는 않았다. 처음 몽둥이를 들고 있던 트롤들은 어느새 가죽 갑옷을 입고 좀 더 반듯한 무기를 착용한 채 하영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변화로는 하영을 막을 수 없었다. 하영에게는 뛰어난 재생력과 효력은 낮지만 적은 마력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금창약, 비싸지만 지속력이 뛰어난 포션이 있었다.

“허억. 흐아. 선생님들. 이제 진짜 보스 방인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거대한 복도.

더 커다랗고 웅장한 문.

하영은 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포션으로는 투창으로 소모된 정신력을 채울 수 없었다. 그 결과 하영은 지나치게 많은 체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흐아. 쉬다 가겠습니다.”

하영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흰 다리를 따라 땀이 흘렀다. 던전에 갈 때 신었던 검은 스타킹은 흠뻑 젖었다.

땀이 마르고, 질척한 기분 대신 시원한 바람이 느껴질 때 까지. 하영은 숨을 고르고 정신을 붙잡았다.

­ 낭만검객: 아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 야스마스터: 쉿. 다리 감상해야 함.

­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 미션석세스: ㅇㅈ

­ 내이름은야스머신: 드디어 보스방. 정말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너무 감동이라 위아래로 눈물이 흐르네요. ㅠㅠ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올라오는 채팅을 쳐다봤다. 이제는 익숙해진 채팅이지만, 저 말들이 자신에게로 향한다고 생각하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위아래로 흐르는 건 뭐냐고 대체. …부럽게 시리.’

투덜거리던 하영의 숨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문을 열었다. 준비는 필요 없었다. 이미 하영의 등 뒤로는 6개의 창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방송 출현 축하드립니다!”

커다란 방안에서 하영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방안은 조용했다. 이전 방들과 다르게 분위기가 어두웠다. 잘 꾸며져 있던 문과 다르게 방 안의 상태는 난장판이었다.

“뭐야 시발.”

방안을 환하게 해주던 초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초 대신 방안을 보이게 해주는 것은. 구멍이 숭숭 뚫린 천장이었다.

빛이 들어온다고? 하영은 빛이 들어오는 구멍 중 가장 가까운 구멍을 향해 투창을 사용했다. 그러나 하영이 던진 창은 구멍을 통과할 수 없었다. 마치 하얀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가짜 빛? 아니 그건 아닌가.’

하영은 악마가 사는 마을에서 봤던 투명 벽과 비슷한 것이라 판단을 내렸다. 투명 벽은 어쩔 수 없지. 하영은 이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저건…”

저 멀리 찢겨진 카펫 너머로 부서진 왕좌가 눈에 들어왔다. 하영은 빠르게 왕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곤 왕좌 주변을 둘러봤다.

없다. 아무것도.

왕좌에는 앉아 있어야 할 트롤왕도, 그가 쓰고 있어야 할 왕관도 없었다. 누군가 먼저 트롤의 왕국에 침입했나? 그럴 리가. 하영은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말도 안 된다. 하영이 보기에 트롤의 왕국은 일자 맵이었다. 출구도 입구도 하나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하영은 복도의 천장을 확인했었다.

하영이 있는 곳의 위는 지상이 아닌 던전, 가짜 트롤의 왕국. 심지어는 이 방을 비추는 빛도 빛만 들어 올 수 있는 일방통행이었다. 등반자 입장에서는 만들어진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기묘하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보 양보해서 설사 소설의 내용과 다르게 누군가 먼저 트롤의 왕국의 지하에 내려왔다 해도, 하영이 쓰러트린 트롤들을 먼저 잡지 않고서는 결코 이 방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게 정상일 터였다.

하영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채팅창이 눈에 들어왔다.

­ 낭만검객: 이거, 몹 젠 안 된 거 아니냐?

­ 생존게임좋아요: 그렇다기보다는 네임드 몹이라. 전에 누가 잡으면 부활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 탑골공원휠체어도둑: 아, 이거 그거네. 버그.

­ 소드마스터거품임: 소드마스터 때문임. 아무튼, 범인은 소드마스터임.

­ 악질방송만보는사람: 이게 게임임? 버그가 걸리게? ㄹㅇ 머가리 수준 실화냐. 넌 그냥 방송 보지 마라.

­ 바른말만씀: 내 위로 다 ㅂㅅ

­ 애니실수로본사람: 크큭. 신도 실수를 하는 세상. 이런 탑에서 버그가 나지 않을 리 없지. 만약 무한히 반복되는 세상이라면. 미쳐 관리자가 손을 쓰지 못한 곳이 나올 수도 있지.

의견은 분분했지만. 결론은 대부분 하나다.

회귀로 인해 다시 나와야 할 트롤의왕이 탑의 관리하는 존재의 실수 때문에 부활하지 못했다.

하영은 그 의견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트롤왕이 지하에서 힘을 길렀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무언가가 어긋났다.

‘설마 지금 탑은…’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게 만약. 하영이 보던 2회차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하영이 보지 못한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인 원혁이 한 번 더 회귀를 바랐다면?

“……내가 괜한 생각을 한 거겠지."

하영은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있어야할게 있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 생각이 많아지고 기분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하영의 기분을 제일 답답하게 하는 건. 더는 자신은 이 이야기를 읽는 쪽이 아니라는 것과, 어쩌면 하영의 이런 고뇌조차 누군가 보고 들으며 웃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숨이 다 막혀올 지경이었다.

“후.”

하영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잡을 수 없는 일에 계속 매달려봤자 변하는 건 없다. 난 더 이상 독자가 아니니까.

“아무래도 좀 휴식을 해야 할 것 같네.”

하영은 마창을 제외한 모든 창을 전부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돌아온 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왕좌가 방의 끝에 있는 왕좌에서 내려왔다. 방도 넓고, 계단도 좀 있던 탓에. 방에서 나오는 대에는 아주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들 오늘은 먹을 거 먹으면서 꼴림에 관해 이야기라도 나눠보죠.”

그렇게 하영이 진짜 보스의 방의 문을 나갈 때쯤.

휘유우옹!

등 뒤에서 벽으로 된 큰 기둥이 하영을 향해 날아왔다.

하영은 무언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오른손으로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날아온 기둥이 너무 부피가 큰 탓에, 피해를 전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크윽.”

하영이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이윽고 기둥의 잔해가 하영의 몸 구석구석을 때렸다.

하영은 이를 꽉 다물었다. 어찌나 빠르고 강력한지, 통증 완화 스킬을 뚫고 통증이 느껴졌다. 특히 기둥의 파편을 정통으로 맞은 오른팔은 굉장히 아팠다.

오른팔에 아픔을 제외한 감각이 사라졌다. 손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손을 포함한 오른팔의 뼈가 아작 난거 같았다.

크아아!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하영이 눈을 살며시 떴다.

“진짜 난이도 미쳤네.”

하영은 이전의 참상을 깔끔하게 복구한 보스의 방과, 기세등등하게 웃고 있는 트롤의 왕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시발. 버그 좆망겜.”

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 작게 떨려왔다. 손에 쥔 창이 자꾸만 손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영은 왼손으로 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을 잡았다. 부서진 뼈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들. 아무래도 버그 때문에 일이 꼬일 거 같은데요.”

소설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갑작스럽게 등장한 트롤의 왕.

하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올라가고 있는 탑은 소설에서 봤던 2회차의 탑이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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