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8. 등반의 시작.
* * *
“선생님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뜬금없는 하영의 말에 시청자들은 당황했다. 초창기에 들어온 이들은 또 개소리하는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넘겼지만, 최근에 들어온 이들은 아니었다.
억빠맨이야: 운이 좋다?
여신의눈물자국: 뛰어난 재능.
공감하면골드줌: 시간 관리 능력이지ㅋㅋ
채팅을 본 하영이 미소를 지었다. 전부 틀렸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그건 바로.
“끝까지 달렸다는 거예요.”
하영의 말에 감이 좋은 시청자들이 뒷이야기를 깨달았다.
낭만검객: 설마. 아니지? 시발 아니지?
아가리롤스타: 젠장! 믿고 있었다고!!!
모든것은순리대로: 허허.
병신을보면짖는개: 월월!
하영은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트롤왕이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언뜻 보면 다잡은 먹이를 보는 시선으로도 보였지만, 자신에게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설마 기습한 번 했으니, 한번 공격을 맞아주겠다는 건가?”
하영의 중얼거림에도 트롤왕은 기다렸다. 하영은 그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몰랐다. 전투에서 상대방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꽤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평소라면 그랬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상관없었다.
‘어쩌면…’
지금 올라가고 있는 탑은 소설에서 봤던 2회차의 탑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영은 오늘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역시 지금은 상관없었다.
이 앞에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하영은 그저 성공을 위해 자세를 잡고 다음을 준비할 뿐이었다.
“잘 있어라. 난 성공을 위해 끝까지 달리겠다!”
하영은 명언을 남기고 뛰었다.
트롤왕이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낭만검객: ㅋㅋ 시발. 진짜 ㅋㅋㅋㅋㅋㅋ
모든것은순리대로: 허허…
억빠맨이야: 와.
여신의눈물자국: 내가 눈물이 나는 놈은 아닌데…… 눈물이 다 나네.
공감하면골드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뒤에서 트롤왕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하영은 이를 악물고 더 빠르게 뛰었다. 옆트임이 심한 복장이라 옷의 검은 천이 뒤로 흩날렸지만. 두 손으로 창을 잡고 있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낭만검객: 관능적인 검은 복장. 거기다 하얀색. 이게 낭만인가.
야스마스터: 낭만이아니라 야스입니다.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ㅋㅋㅋ
탑골공원휠체어도둑: 야스가 아니라 빤스가 다 보이는데 빤스런 아닌가?
‘뭐라는 거야 시발.’
채팅을 잠깐 보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던 하영은, 몸이 앞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채팅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두 손으로 인해 무너진 무게 중심사이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정상적인 자세를 취하고 싶었지만, 오른손만으로 창을 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크어어어! 쾅! 쾅!
뒤에서 트롤왕이 울부짖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하영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채팅창을 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복도를 지나 시체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갔고, 시체가 쌓인 입구를 넘어 다시 복도로 나갔다.
그렇게 여러 번을 반복했을 무렵. 하영의 오른손에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영은 그 즉시 오른손을 잡고 있던 왼손을 빼냈다.
생존게임좋아요: 드디어 보여주시나요?
미션석세스: 팬티는 이미 다 보여줬는데?
꿀벌아넣을게: 믿고 있었다고 젠장!!!
생존게임좋아요: 아니, 그걸 보여준다는 게 아니잖아요.
군침도는사람: 어느 쪽을 보여주던 다 좋다. 바로 군침 ON
하영의 도주를 재밌게 구경하고 있던 시청자들이 그 모습에 기대하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각자 기대하는 방향이 달랐지만, 하영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뛰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레벨업한 새태창의 기능을 활용하여, 새태창을 꺼내지 않고도 싸구려 창을 계속 구매했다.
검은콩나물: 드디어 싸움의 재개인가요?
푸른하늘583: 기대가 됩니다.
여자성기삽니다: 성기사급 자가 치유력 실화냐 ㄷㄷ
구매한 창들을 전부 아공간에 집어넣은 하영은, 채팅을 보곤 자신 있게 웃었다. 그러자 자잘한 기부들이 쏟아졌다.
낭만검객: 응 꿈 깨. 하영이 자신보다 강한 녀석을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일?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씹년들아 ㅋㅋㅋ
중간에 뜨끔하게 만드는 채팅이 몇 개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골드가 수급되니까.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쾅!
저 멀리서 복도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문 너머를 바라봤다. 두어 개의 문 너머로 트롤왕으로 보이는 물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생각보다 빠르네.
“후원해주신 선생님. 모두 감사합니다. 저는 다시 미래를 위해 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영은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소리를 듣고, 다시 달렸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점이 몇 개 있었다. 우선 하영은 한 손에 하나씩 창을 들고 있었다.
하나는 능력치 뻥튀기용인 마창, 그리고 또 하나는 방금 구매한 싸구려 단창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하영은 단창을 뒤로 대강 던졌다.
뒤를 보지도 않고, 자세도 잡지 않았다. 하영이 엉성하게 날린 창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트롤왕은 피식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하영은 창에 담아두었던 마력을 사용해 투창을 발동시켰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처박힐 것처럼 날아오던 창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트롤왕을 노렸다.
크아아아!
트롤왕이 날아온 창에 맞았다. 평소라면 가볍게 막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공격이었지만, 도망치는 하영을 쫓아가는 처지라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창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하영이 왼손으로 대강 던진 창으로는 트롤왕의 질긴 피부를 뚫고 데미지를 줄 수가 없었다. 아니 하영의 창은 트롤왕을 잠시나마 묶을 수조차 없었다.
낭만검객: 전혀 효과가 없는데?
하영은 채팅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실성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대강 던진 창이었다. 그런 창에다가 투창을 발동시킨다 해서 큰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저도 예상했습니다.”
하영은 무심하게 다시 단창을 던졌다. 트롤왕은 이번에도 피할 수 없었다. 보통의 트롤보다도 훨씬 큰 덩치가 안 좋게 작용한 것이었다.
흑우아닙니다님이 100골드 기부.
이번에도 별 효과 없는 듯.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하영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작게 고개를 숙였다.
“기부 감사합니다. 리액션으로 투창 한번 더하겠습니다.”
하영이 다시 투창을 사용했다. 그런데 단창의 상태가 약간 이상했다. 원래부터 낡아 보이는 창이었지만 이번에 하영의 손에 들린 창은 평소 그녀가 쓰던 창보다 훨씬 낡고, 창대의 끝이 부서져 있었다.
낭만검객: 시발. 아니지?
하영은 바쁜 와중에도 낭만검객의 채팅을 찾아냈다. 역시 보통이 아닌 이들이라 벌써 눈치 챘구나.
“맞습니다. 재활용한 거예요. 손으로 던지고 투창 스킬을 사용해서 던지면 손으로 투창한 것과 같은 판정이 나더라고요.”
하영은 계속해서 창을 던 질 수 있었던 비밀에 대해 말하며, 다시 회수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창이 완전히 부서진 것이었다.
쳇. 하영은 작게 혀를 차곤 다시 아공간에서 낡은 단창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대강 던졌다.
크아아아!!!
트롤왕은 손으로 날아오는 창을 쳐냈다. 질긴 피부와 재생력을 믿고 최소한의 피해를 보며 하영을 추격했다. 그러자 다음 창이 날아왔다.
창을 땅에 박거나 창을 완전히 부서트려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창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이런 날파리 같은 놈.
트롤왕은 분개했다.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자만 들어 올 수 있는 곳에 어째서 저런 것이 들어 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트롤왕은 끝까지 하영을 추격했다. 하영 역시 자신을 쫓아오는 트롤왕을 막기 위해 계속 창을 던졌다.
트롤왕의 재생력과 하영의 재산의 싸움.
영원할 것만 같은 그 전투에 한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최근 마창을 무리하게 구매한 탓에 하영의 재산에 한계가 온 것이다.
[보유 1,953G]
“평소에 쓰던 단창이 500골드, 투창 전용 일회용 창이 300골드니까.”
제일 싼 창을 구매한다 해도 남은 창은 여섯 개. 트롤왕이 창을 부숴버리지 않는 다해도, 투창 전용창은 상대가 창을 주워 던지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에 투창의 기회 역시 여섯 번이었다.
마창은 사용하는 순간 능력치에 공백이 생겨버리기에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하영은 마창이 사라지자마자 닥쳐올 급격한 능력치 저하로 인한 탈력감을 버틸 정신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투쟁심이 오르는 걸 막기 위해 검투사의 의지도 꺼놓은 상태이기에 더욱 그랬다.
‘제발 죽어라.’
하영은 레벨업한 새태창의 기능을 사용해서 새태창을 꺼내지 않고도 창을 구매했다. 그리고 구매한 창을 곧바로 날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트롤왕의 돌진은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보유 353G]
구매한 창은 진작 다 사용했다. 골드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조금 더 골드를 열심히 벌걸.’
하영은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한쪽 눈을 감았다. 후회가 됐다. 방심으로 오른팔이 막힌 자신에게, 그리고 골드를 더 벌지 못한 것에.
‘이대로 허무하게 끝인가?’
하영이 절망하려던 순간, 하영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존게임좋아요님이 100골드 기부.
하영님 트롤왕 패턴 좀 보여주세요. 궁금해요.
하영이 눈을 떴다. 이보다 기부 목소리가 좋게 들린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린 덕이었다.
“지금 열심히 저를 쫓아오는 거 보이시죠?”
하영은 천사에게 계시를 받은 열혈 사제처럼, 기부 음성이 끝나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생존게임좋아요님이 100골드 기부.
네.
“네 보여 드렸습니다.”
생존게임좋아요님이 100골드 기부.
다른 패턴은요?
“다른 패턴이요? 전 모르겠네요. 혹시 트롤왕의 주공격을 아시는 분은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평소보다 친절한 하영의 대답 덕분이었을까. 오랜만에 큰 골드가 걸린 미션이 걸렸다.
애니실수로본사람님이 100골드 기부.
간다 트롤왕, 남아있는 체력은 충분한가? 라고 눈앞에서 말해주면 오레사마께서 만 골드를 주도록 하지.
만 골드? 끼이익. 하영이 달리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미션을 완료하기 위한 대사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트롤왕이 자신의 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
잠시 후 트롤왕이 눈에 들어왔다. 하영은 트롤왕을 기다리면서 수번을 되뇐 대사를 크게 소리쳤다.
“간다 트롤왕! 남아있는 체력은 충분한가! 내 골드는 아슬아슬하다! 좀 봐줘!”
진심이 가득 담긴 외침이었다.
[보유 2,353G]
애니실수로본사람님이 10,000골드 기부.
정하영. 너를 오늘부로 내 신부 후보로 임명한다.
“감사합니다.”
하영은 기부메시지를 보지도 않고 바로 창을 구매했다. 그리고 다시 투창을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보유 12,353G]
창을 구매하고, 던지고, 다시 구매한다. 하영은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기계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는 상대 역시 같았다. 트롤왕은 창이 어깨에 박히든 다리를 훑고 지나가든 상관하지 않고 하영을 쫒아왔다.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었다.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하영이 외쳤다. 당연하게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보유 9,353G]
[보유 6,353G]
[보유 3,353G]
[보유 1,253G]
부끄러움을 참고 어렵게 번 골드가 물 쓰듯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부를 받지 못했다면 이미 골드가 사라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이런 시발!”
설상가상으로 죽은 트롤의 시체를 살피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던 하영은, 주변의 트롤 시체가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영이 막 도착한 이 방이. 처음 하영이 들어온 방이자. 하영이 갈 수 있는 마지막 방이었다.
“시발!. 버그로 피해를 줬으면, 그에 걸맞게 보상을 하라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신력과 골드가 고갈됐다. 마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영의 눈빛에는 생존을 향한 열망이 가득했다.
하영에게는 포기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시발. 여기서 죽으면 시체 윤간 후, 이원혁 에게 발각 당해서 언데드 성노예 엔딩인데. 어떻게 포기를 하라고….”
죽은 후 맞이할 미래를 떠올리자, 손에 자동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 탓에 마창을 잡고 있는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시간은 충분히 벌었는지 부상당한 오른손도 어느 정도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불로 내 몸을 다 태워야 한다. 언데드 성노예로 살 수는 없어.”
하영은 뛰는 걸 멈췄다. 그리고 마지막 투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세를 잡고, 마력을 담았다. 골드를 아끼기 위해 마력 포션을 구매하진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계속 되는 투창에 트롤왕 역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
나불대던 입마저 닫은 하영은, 이윽고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트롤왕과 정면에 놓이게 된 순간, 마창을 던졌다. 기나긴 전투로 인해 정신력이 고갈된 만큼 정확도가 떨어졌지만. 괜찮았다. 트롤왕은 부피가 크니까.
슉! 슈우욱!
부피가 크다는 건, 그만큼 급소 부위도 크다는 것. 하영은 자신이 던진 마지막 창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제발 뒤져라.’
짧게 기도를 끝낸 하영은 곧 바로 없는 마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번 공격이 빗나가거나 막혔을 경우. 파이어볼을 사용해 온몸을 불태우기 위함이었다.
퍽!
다행히 마창은 무사히 트롤의 급소인 심장을 공격했다. 상처의 위치상으로 보건데 아슬아슬한 공격이었다. 만약 하영이 트롤왕과의 위치조절에 실패 했다면 단번에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하영은 시원하게 뚫려버린 트롤왕의 가슴을 보곤, 끌어 올리던 마력을 조용히 내려 놨다.
“보고 계십니까. 선생님들. 제가 끝까지 달렸습니다.”
하영은 마창에 의해 가슴 부분이 사라진 트롤왕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선 크게 말하고 시청자들의 어그로를 단번에 끌고 싶었으나, 정신력이 걸레가 된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전.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이쁘게함: 응 그래 ㅅㅂ 던전 클리어에 성공한 사람이 됐네.
푸른하늘583: 중간에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에서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꿀벌아넣을게: 너도? 야 나두 ㅋㅋ
낭만검객: 진짜 명언처럼 말하는데. 난 창피해서 더는 못 보겠다. 안 볼란다.
예상된 반응, 하영은 땀으로 흥건해진 이마를 닦으며 트롤왕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트롤왕의 시체는 투창으로 인한 상처가 가득한 상태였다.
“이건 8만 골드의 몫이다.”
하영은 회수한 마창으로 트롤왕의 머리를 가차 없이 깨부쉈다.
“사살 확인완료.”
머리를 부순 것과 동시에 푸른 포탈이 옆에 생성됐다. 하영은 빠르게 트롤왕의 왕관을 줍고 포탈에 몸을 집어넣었다. 따듯했다. 피곤함 때문인지 눈이 자동으로 감겼다.
그러나 아직 쉴 수는 없다. 던전 입구에서 쓰러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하영은 따듯한 느낌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런 하영의 눈에 보인 것은.
“대마법사?”
저층의 대마법사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알고 그것에 맞게 행동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그대의 전투는 정말 좋은 전투였다네.”
대마법사는 정말 좋은 구경을 했다는 듯이 옆에 있던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척 보기에도 매우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하영의 매의 눈은, 차를 마시고 있는 대마법사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간다, 트롤왕. 남아있는 체력은 충분한가. 내 골드는 아슬아슬하다. 좀 봐줘.”
하영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운이 없어 낮아진 목소리는 북극처럼 차가웠으나, 하영이 내뱉은 말이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인자하게 웃고 있던 대마법사의 연기에 금이 갔다.
“크흠.”
대마법사는 계속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자신의 입 꼬리가 무안했는지. 기침을 한번 하고는, 책상 위에 있던 주전자를 들어 올려 옆에 있는 잔에 따랐다.
그 모습에 하영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실컷 웃고 있었구나.’
대마법사는 하영의 눈을 피하며 차가 들어가 있는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영은 차가운 눈으로 대마법사를 바라보다가, 다음 대사를 외쳤다.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하영이 간절한 표정을 지은 채 저층의 대마법사를 바라봤다. 표정은 간절했으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풉.”
그럼에도 저층의 대마법사는 입에서 차를 내뿜었다. 기억이 오버랩 된 것이다.
“켁. 커헉.”
“대마법사님. 염탐 …재밌어요?”
하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껏 하영이 지은 미소 중 제일 차가운 미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