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9. 등반 시작.
* * *
1층.
선택의 탑이 있는 도시.
길태는 세 개의 탑을 제외한 가장 큰 건물에서, 새로 들어올 신입 등반자들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마음도 착한 등반자가 들어 와줬으면 좋겠는데.”
“저처럼요?”
길태의 중얼거림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 등반자가 말했다. 그 말에 길태가 피식 웃었다.
“넌 임마 남자잖아. 난 마음마저 착한 여자 등반자를 원한다고.”
“그건 등반자가 아니고 동반자 아닙니까?”
남자의 말에 길태가 고개를 저었다.
“등반자에게 동반자는 무기밖에 없다.”
길태의 말에 남자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 모습에 길태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야 지금 에로 문어 주제에 있어 보이는 말 한다고 생각했냐?”
“아, 아닙니다.”
딱 봐도 화나 보이는 길태의 모습에 남자 등반자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길태는 자신이 말한 문어라는 단어에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아니긴 뭘 아니야 이 자식아!”
“악!”
길태가 발을 들어 올려 남자의 발을 찍었다. 어찌나 강하게 찍었는지 남자는 찍힌 발을 잡고 뒹굴었지만, 그 정도로는 길태의 화가 다 풀리지 않았다.
이게 다 정하영인가 뭔가 하는 신입 등반자 년 때문이었다. 길태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전 회차 신입 등반자 중 최고의 미를 지닌 그녀가 다가와 자신에게 벌인 짓을.
“이 머리를 보고 문어라고 했겠다.”
길태가 이를 갈았다. 정하영. 그녀가 단상에 올라 벌인 일 때문에 길태는 문어라고 불리게 되었다. 물론 현 1층에서 제일 강한 등반자 중 한 명인 길태의 앞에서 문어라 부른 강심장은 없었다. 그의 머리가 반짝인다 한들, 그가 현 1층에서의 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뒤에서는 아니었다. 길태는 얼마 전에 우연히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신입 등반자들을 발견했다. 등반자들의 외모가 꽤 길태의 취향이었기에 길태는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는 들을 수 있었다. 그 등반자들이 자신을 문어라 부르는 것을.
“후. 망할. 떠올리니까 또 화나네.”
길태는 아직도 바닥에 구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야! 넌 시발. 아직도 그러고 있냐? 똑바로 안 하지.”
“죄송합니다!”
길태의 외침에 남자가 아픈 발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에휴, 난 간다. 이후는 알아서 해라.”
“예? 하지만 이제 곧 튜토리얼에서 포탈이 열릴 시간인데요?”
눈치 없는 남자의 말에 길태가 노려봤다. 그 시선에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상 말하면 큰일 난다.
“하하. 길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설명하다 예쁜 등반자가 있으면 그때 부르겠습니다.”
남자의 다급한 말에, 길태는 남자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늘 같은 선배를 대하는 태도도, 느릿느릿한 일 처리도.
“이 망할 1층. 내가 다신 오나 봐라.”
길태는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손으로 머리를 한번 털어냈다. 그러나 사실 길태가 이 말을 한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날 정하영에게 놀림 받고, 정하영을 놓치고, 갓 들어온 신입들에게 마저 문어라 불리게 되었을 때. 길태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다신 1층에 안 오지 않을 거라면서 난리를 쳐댄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길태는 다시는 이런 잡무를 배정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길태는 몰랐다. 상사인 자신의 깽판으로 얻어낸 길태의 바람은. 길태의 상위자인, 클랜의 클랜장이 내린 명령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릴 거라는 것을.
“흐, 이게 다. 중견 클랜에 속한 내 잘 못이지.”
길태가 속한 클랜은 중견 클랜, 대형 클랜이 판치는 현재. 중견 클랜에서 튜토리얼에서 막 올라온 등반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길태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클랜장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고, 결국 다시 신입 등반자를 훈련시키는 훈련소에 다시 오게 되었다.
“역시 대형 클랜이 짜세야.”
길태는 무리를 해서라도 대형 클랜에 들어가야 했어야 한다며 투덜거리며 훈련소 건물에서 나왔다.
“이번에도 정하영 그년처럼 외모가 반반한 년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네.”
길태는 거대한 훈련소의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날 이곳에서 본 정하영의 외모는 여러 미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길태의 입장에서도 침이 뚝뚝 떨어지는 상급의 여자였다.
만약 그날 정하영을 잡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을 정도로.
“정하영?”
길태가 가까이에서 본 정하영의 외모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길태의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쉐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길태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남자가 조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후배 동반자라 생각했다.
“야, 이 자식아!”
길태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쁜 등반자를 찾을 때까지 나한테 오지 말…….”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근육질의 남자. 처음 보는 놈이었다. 길태는 후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바로 뒤로 점프해 거리를 벌렸다.
“너, 누구냐.”
처음 보는 외모. 1층의 상황상, 보통이라면 튜토리얼에서 막 끝낸 신입 등반자라 생각하는 게 맞겠으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아무리 방심한다 한들 길태는 중층에까지 오른 등반자.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낸 등반자에게 뒤를 잡힐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즉, 저 검은 머리의 놈은. 아마 다른 클랜에서 내려온 놈일 터.
길태는 스킬로 자신의 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겨누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지금은 우리 자색 매 클랜의 기간이다! 다른 클랜은 1층에 접근하지 않기로 한 걸 잊은 거냐!”
“정하영. 방금 정하영이라 말했지?”
검은 머리의 남자는 길태의 외침에도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 뻔뻔한 태도에 길태는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했다.
“하. 이 시발. 정하영 그년 때문에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본데…. 너 어디서 온 누구냐. 설마 그년이 보내서 온 거냐?”
길태가 그렇게 말한 순간. 남자의 기세가 달라졌다. 길태의 후배가 봤다면 강적이라며 긴장을 했을 상황, 그러나 50층까지 올랐던 길태가 보기에는 기세가 바뀌어도 거기서 거기였다.
“난 이제 막 튜토리얼을 클리어했다. 질문에 답했으니, 너도 내 질문에 답해라.”
검은 머리의 남자가 무기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길태는 하루에 한 번 상대방의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진실의 검으로 남자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로 했다.
진실입니다. 그는 조금 전 튜토리얼을 클리어했습니다.
진실의 검이 그렇게 판결을 내린 순간. 길태는 긴장하던 것을 조금 풀었다. 아마 상대는 기척을 죽이는 스킬을 습득한 채 들어온 엘리트 애송이 일터, 이런 놈은 성장하기 전에 싹을 밟는 게 중요했다.
“정하영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좀 맞자. 내가 그년 때문에 화가 좀 쌓였거든.”
길태는 검을 든 손에 힘을 꽉 주며, 천천히 검은 머리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은 있었다. 1층에서 신입 등반자를 기다리고 있는 길태지만. 사실 그는 이런 병아리들과 어울릴만한 등반자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정하영에게 문어라 놀림 받아 영문도 모른 채 에로 문어라 불리게 됐지만. 그는 얼마 전까지 중층에서 활동하던 등반자였다.
물론 중층이라 해도 50층을 겨우 넘긴 것에 불과했기에 다른 중층의 등반자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길태가 경험했던 경험이 남들보다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그마치 50층이다. 50층을 오른 등반자가 이제 막 탑에 들어온 이에게 질 리가 없다.
길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간다. 애송아. 50층의 저력을 보여주마.”
길태가 저주로 인해 줄어든 마력의 끝을 붙잡고, 검에 화염을 씌웠다. 그리고 바로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
“네 이놈! 저것들은 너의 동료가 아니더냐!”
작은 마을에 기괴한 악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악마의 정체는 기생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오는 기생형 악마였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악마는 진심으로 궁금한 듯,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악마의 주변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던 시체가 마을과 함께 불타고 있었다.
악마는 시선을 돌려 시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시체들은 악마가 죽인 것이 아니었다. 악마는 이 마을에 들어와서 아직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이 마을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악마를 포함하면 단둘 뿐. 1,000명이 넘게 살고 있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게 제일 편하고 빠른 방법이니까.”
검은 머리의 남자는 악마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 모습에 악마는 소름이 쫙 끼쳤다.
기생형 악마인 그였으나. 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부모에 기생했을 때는 무심코 어린아이를 놓아준 적도 있었다.
그는 악마였지만 여러 인간의 몸을 옮겨 타고 다니며 경험과 기억을 먹었기에, 그 어떤 악마보다 인간다웠다.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웠을지도 몰랐다. 기생형 악마가 봐오고 경험했던 인간들의 대부분은 그 누구나 나쁜 짓을 해오고 있었으니까.
그 예로 한 인간은 힘을 얻기 위해 고위 악마에게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마을 하나를 통째로 제물로 바쳤다. 또 누구는 돈을 벌기 위해 같은 인간을 착취하거나, 납치해 노예로 팔기도 했다.
당연한 이치였다.
악마가 살던 세상의 사람들은 신분제로 신분이 나뉘었었기에, 사람 대부분이 낮은 신분이었기에, 그들의 울분을, 욕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악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인간은 복수를 위한 힘을 위해서도, 생존이나 더 많은 부를 위해도 아닌, 편리하다는 이유로 살인을 했다고 답했다.
악마로 긴 세월을 살아온 그였지만. 한 번도 재미나 편하다는 이유로 인간을 죽여본 적은 없었다. 그에게 인간은 자신을 삶을 연장해주는 고마운 존재, 인간으로 따지면 자연에서 사는 동물 같은 존재. 그것이 인간이었다.
“넌…… 악. 마인가?”
악마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악마 역시 살아만 있을 뿐,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상반신과 하반신은 한 번의 베기에 두 동강이 났으며, 하반신은 이어지는 공격에 난도질당해 육편도 찾지 못할 정도가 됐다. 그렇기에 이건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 아닌, 단순한 궁금증.
“같은 인간이. 아닌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악마의 말에 검은 머리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맞아. 그러니까 살려줬지.”
남자는 웃으며 마을 밖을 가리켰다. 악마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목을 움직여 그 방향을 바라봤다.
“저건….”
거리가 너무 멀어, 악마인 자신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생명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다리가 분질러진 29명의 등반자가 있었다. 말 그대로 살아만 있는 상태였다.
“허, 허. 하히히!”
악마는 두려워졌다. 남자가 말한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죽인 것들의 차이를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악마였으나. 눈앞에 있는 남자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악마에게 있어 인간은 평등했다. 조금 전 검은 머리 인간에게 죽은 여자도, 자신의 자식을 지키기 위해 몸으로 감싸다 같이 죽은 부자도 모두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생명체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봐봐. 잘 살아 있잖아. 그렇지?”
악마가 미소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