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썅년의 방송 생존기-70화 (70/85)

〈 70화 〉 9. 등반 시작.

* * *

시련은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고블린을 100마리 잡고 다음 층으로 갈 때 누군가는 그에 배에 달하는 숫자를 잡고도 올라갈 수 없다.

시련은 공평하다.

등반하는 사람에 맞춰 주어진다. 누군가와 같이 올라가든 혼자 올라가든 그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탑을 오르고 등반자들을 만나다 보면, 누구나 늦든 빠르든 시련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같기 마련이다. 그 생각의 끝에 가지는 결론과 견해는 등반자 들마다 다 다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상황이 바뀌면, 시련도 바뀐다. 그러나 정해진 시련이 바뀌는 일은 없다. 한번 실패한 시련일 지라도. 그 위를 향한다면 다시 그 시련에 도전해야 한다.

“또 시련이 바뀐다고?”

그렇기에 원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2층에 오를 때도 한번 경험해봤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두 번 겪는다고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2층 악마가 사는 마을]

악마가 사는 마을. 이 시련은 처음 원혁이 탑에 올랐을 때도 본 시련이었다. 물론 그때와 다르게 매우 낮은 층에서 나오긴 했지만, 그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악마가 산다고 소문난 약탈마을에 숨어들어온 악마 잡기.

전 회차에서 받은 시련과 똑같이 단체 시련이었고, 인원도 엇비슷했다. 악마가 전보다 약해지긴 했지만, 그 이외에는 모든 것이 다르지 않았다.

시련 자체에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원혁이 이번에 받았던 시련이 악마가 사는 마을이 아니라면 문제가 된다.

이는 첫 회차에서 받은 2층에서의 시련과 지금의 시련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었다.

첫 회차와 다르게 원혁이 강해진 상황이니 높은 층에서 겪었던 시련이 아래로 내려온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시련이 바뀌는 이해 할 수 없다.

[시련이 정해졌습니다.]

[3층 멈추는 시계와 끝나지 않는 축제]

[오류 발생.]

[소원의 부적이 소원으로 향하는 길을 탐색 중.]

[시련이 정해졌습니다.]

[3층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빠르게 탑승하라]

탑에서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시련을 받아들인 원혁도, 시련이 바뀌었다는 건 들어 본 적 없다.

물론 술집에서 등반자들이 시련이 너무 어렵다며 하소연한 건 들어 봤다. 그들은 가끔 시련을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며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실에 대한 불만에 불과했지.’

정해진 시련을 바꾸는 것, 그건 술자리에서 한 번씩 나오는 단순한 술 안줏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꿈에서나 나올법한 허망한 이야기라는 거다.

“……그렇기에 소원의 부적인가.”

원혁은 의문을 담은 채, 자신을 따라다니는 소원의 부적을 바라봤다. 다른 곳에 두고 와도, 찢어도. 눈치채보면 다시 원상태로 원혁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는 회귀로는 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원혁의 운명처럼 기묘한 일이었다.

“……”

게다가 기묘한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소원의 부적과 함께하는 등반은 이상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탑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묘하게 흥분이 됐다.

이는 성적흥분이 아닌 일종의 고양감에 가까웠다. 이 위에 자신이 기다리고 있었던 무언가가 있는 듯한 감각, 마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만을 기대하는 어린이가 된 느낌이었다.

“진짜 위험한데.”

노련한 등반자인 원혁은 쓸데없는 긴장이나 고양감이 얼마나 등반에 악영향을 주는지 잘 알았다.

그렇기에 원혁은 튜토리얼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해봤다. 소원의 부적을 찢어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정체불명의 흥분은 가라앉으려 하지 않았다. 말수까지 줄여 보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 빠르게 탑을 오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대체 이 위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 기대가 되는 거지?”

탑에 들어오기 전에 세운 계획대로라면, 올라가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원혁은 한 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원래의 계획 대신 이 고양감이 시키는 대로 빠르게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2층에서 숨겨져 있는 추가 보상을 포기하고 빠르게 악마를 잡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포기할 건 다 포기한다. 하지만 전 회차에서 내가 얻은 힘들과 복수는 포기할 수 없어.”

원혁은 아직 열리지 않은 엘리베이터의 문을 노려봤다. 편리를 위한 코인, 내가 가지기에는 쓸모없지만 남 주기는 아까운 히든피스들, 그런 건 전부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노력이 담겨 있는 힘과 복수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그 두 개는 현재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존재였다. 각각 무력과 신념으로서, 서로 완전히 다른 것들이었지만. 어떻게든 원혁의 인생이 간섭해왔고, 지금이 있게 만들어 줬다.

비록 지금은 두 목표 다 멀지만, 잃어버린 힘과 복수는 원혁에게서 멀어진다 해서 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설령 일이 꼬여 더 많은 시간을 잡아먹게 된다 할지라도. 원혁은 언젠가 자신의 것이었던 힘을 전부 되찾고, 복수의 끝을 맺을 것이다.

“첫 복수는… 역시 제일 가까운 정하영이 좋겠지.”

전생에서는 제 갈 길을 갔기에 몰랐지만. 1층에서 본 대머리놈의 말에 따르면 정하영은 바로 전 회차에 탑을 올랐다고 했다.

“날아다니는 구름새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좋은 이동수단을 가지고 있다던데, 아무리 등반하는 속도가 하더라도 이미 탑의 끝을 보고 온 자신보다 빠를 거 같지는 않았다.

‘이 속도라면, 5층에서는 만나게 되겠지.’

사람마다 주어지는 시련은 다르지만 5층마다 같은 도시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같다. 원혁은 고등학교 시절의 그녀밖에 모르지만. 괜찮았다. 전 회차에서 정하영의 시체를 본 적이 있었으니.

‘중층에서 시체를 봤어, 그 정도라면 내가 저층에서 그녀를 찾을 때까지 죽지는 않을 거야.’

저층에서 원혁이 구할 히든피스는 없다. 물론 원혁이 경험했거나 들었던 층이 아래로 내려온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확정적으로 원하는 히든피스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중층부터였다.

요컨대 그녀를 발견하고 복수할 시간은 넉넉했다.

“최대한 오래, 그리고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복수하는 게 좋겠어.”

첫 복수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야된다. 원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3층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빠르게 탑승하라]

[잠시 후 3층의 문이 열립니다.]

“기다려라. 지금 간다.”

원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기다리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

원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까지, 순식간에 다음 층으로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한 대에는 회귀자로서의 자신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간단명료한 시련 내용에 있었다.

[3층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빠르게 탑승하라]

다음 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만 찾으면 끝나는 간단한 시련이었다. 평범한 엘리베이터와 다르게, 탑의 층을 이동시켜 주는 엘리베이터는 저 멀리에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 정말 시련이라는 이름값도 못하는 시련이라 볼 수 있었다.

“…이 세계가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지만.”

이번 층은 이상했다. 3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시련의 무대가 되는 세계가 너무 넓었다.

보통 시련의 무대는 탑을 올라갈수록 점점 넓어진다. 처음에는 투명한 벽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지형에서. 마을, 도시, 나라, 세계 순으로 점차 그 반경을 넓혀 간다.

그러나 3층은 아니었다. 원혁은 벌써 여러 나라에 발을 디뎠다. 그 결과 어딘가 신성하게 느껴지는 빛이 엘리베이터를 감싸, 기둥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과 비슷한 풍경에 하얀색 엘리베이터가 떡하니 있는 광경은 근처에 가면 바로 눈에 띌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원혁은 엘리베이터를 발견한 당시만 하더라도 웃고 있었다. 비록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 정도 속도는 괜찮았다.

넘쳐나는 육체 능력치는 원혁의 피로를 상당히 줄여 주었고, 과거 겪었던 여러 경험은 여러 나라를 탐색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주었다. 덕분에 원혁은 이 넓은 세계에서 엘리베이터를 발견하는 대에는 채 3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역시 2층을 너무 날로 먹어서 탈이 난 건가.”

원혁은 눈앞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으면 뭐하나. 작동을 하지 않는데.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99층까지 오르면서 엘리베이터를 수없이 이용해봤지만, 이미 모습을 드러낸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는 건 난생처음 봤다.

엘리베이터는 탑이 망해도 작동한다. 등반자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엘리베티어는 작동이 됐다. 부서지지도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탑승자가 죽더라도 시체로 나마 운반해준다. 그게 원혁이, 등반자들이 알고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이건 진짜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소리인데.”

이 이야기를 등반자들에게 들려주면 개소리라 치부하고 넘어갈 것이 뻔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회귀부터 말이 안 되긴 했지만.”

원혁은 엘리베이터 주변에 풀썩 주저앉았다. 자신은 그날 분명 죽었다. 100층의 시련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죽었다. 100층을 코앞에 두고 배신을 당해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죽는 순간. 소원이라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하고 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끈질기게 버텨온 목숨이 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난 살아있어. 이건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야.”

원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국과 다르게 하늘이 매우 맑고 푸르렀다.

“새모양의 구름은… 역시 없나.”

원혁이 하늘에 간간히 보이는 구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단순히 기분 전환삼아 하늘을 본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새 모양의 구름이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네.”

원혁이 눈을 감았다. 구름에 집착하기 보다는 이 편이 더 쉽게 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 대신 새까만 어둠을 눈에 담으니, 괜히 죽어가던 순간만 더 떠올라 쉴 수가 없었다.

“상황이 비슷해서 그런가.”

3일간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무대가 넓어서 또 다음 엘리베이터를 찾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게다가 찾은 엘리베이터가 작동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앞길이 막막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원혁은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그때와는 달랐다. 한 번에 찾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지금의 원혁에게는 그 시절에는 없었던 ‘다음’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잘못 찾아 노력이 날아간 만큼, 잠을 조금 덜 자서라도 더 많이, 더 빠르게 찾으면 된다.

“…슬슬 가볼까.”

원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틈은 없었다. 저 위에서 정하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한 고생만큼 그녀에게 갚아 주면 된다. 그게 앞으로 원혁이 살아갈 방식이니까.

***

“찾았다.”

3층에 온지 5일이 되던 날.

원혁은 어느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마경에서 새로운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도시는 마경이라는 절망적인 단어를 옆에 끼고 있음에도 희망의 도시라 불리우고 있었다.

“희망의 도시 휘스머인가.”

원혁은 도시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예감이 좋았다. 이번에야말로 다음 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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