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9. 등반 시작.
* * *
시련의 무대가 넓을수록, 등반자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
원혁은 그 사실을 탑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있을지 모를 장애물을 피해 은밀히 도시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는 평범한 도시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어떤 설정이 등반자의 앞을 막을지 몰랐다. 특히 현재의 원혁에게 단번에 평범한 도시라 인식된다면 더욱 그렇다.
원혁은 회귀하고 나서 탑에서 이렇게 큰 도시는 처음 봤다. 이 정도의 건축 기술이라면 1층에 있던 건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두 건물 사이에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요컨대 이 도시의 평범함은. ‘지구’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1층의 탑은 논외이긴 하지만.’
애초에 그건 건축물이라 하기도 그렇다. 말이 안 되는 구조로 만들어진 탑이다. 평범한 인간이나, 마법에 문외한인 원혁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익숙한데.”
원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축물들 사이에서 뛰어다니는 어린이들, 말끔히 정리된 거리,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탑에 오르기 전에 현대에서 봐온 도시의 느낌과 비슷했다. 사람들이 이국적이게 생겼고, 검은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한국이라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이 도시가 익숙하신가요?”
원혁의 뒤에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여자의 미성이었다.
“이런 도시는 주변에서 흔하지 않은데… 혹시 제국에서 오신 분인가요?”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원혁은 몸을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가 메이드복을 입은 채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제국에서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실력 있는 모험가이신가 봐요. 저는 제국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혹시 시간이 되시면 잠시 이야기 가능할까요?”
붉은 머리의 메이드의 말에, 원혁이 웃었다. 하지만 속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하하. 물론이죠.”
원혁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메이드의 복장을 체크했다.
‘치마가 짧군. 하녀는 아니야.’
일반적인 메이드가 입기에는 치마가 너무 짧았다. 게다가 메이드라고 보기에는 말투도 너무 교양적이었다.
‘시녀…?’
어쩌면 못 모르는 귀족 아가씨가 시녀인척 돌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귀족이 매일 보는 게 하녀와 시녀라지만. 준 남작 같은 낮은 계급의 가문에서는 종종 저런 복장의 가문의 귀족 남자들을 홀리곤 했다.
‘그게 평민 여자들의 성공의 지름길이니까.’
만약 낮은 가문의 아가씨라면, 귀족과 평민에 어중간한 위치에 자리한 가문이라면, 그런 이들을 보고 자랐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게 정상인 줄 알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귀족적이다. 어중간한 이들일수록 더욱 자신을 부풀리는 법. 그런 그녀들이 눈앞의 여자처럼 자신을 낮추며 돌아다닐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혼자야.’
귀족 여식이 도시를 돌아다니는데 호위도 없는 것은 이상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숨어서 호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원혁의 감각이 엄청 날카로운 것은 아니라지만, 원혁 또한 99층까지 오른 등반자다. 자신 쪽을 오래 보는 이가 있다면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수상하군.’
상대의 탐색을 마친 원혁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별을 유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제가 바빠서 이야기는 나중에 해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아, 너무 아쉬워요.”
“저쪽에 케이크가게가 있던데, 거기서 내일 이맘때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크게 아쉬움을 드러내는 메이드의 모습에, 원혁은 가게 하나를 찍어 만남을 약속했다. 물론 만날 생각은 없었다. 내일이 올 때쯤이면 자신은 이미 여기 없을 테니까.
“…바쁘신 일이 있으신가 봐요? 혹시 꼭 어디를 가야 한다거나… 후후. 그럴 리가 없겠죠? 마경이 바다를 제외한 모든 곳을 뒤덮은 이곳에, 주변 지리가 낯선 모험가가 들릴 곳은 도시 외에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눈앞의 메이드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원혁은 머리를 덮고 있던 로브를 살짝 내렸다. 이런 판타지 세계에서 검은 머리가 흔하지 않다는 설정이 자주 붙었기에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단지 말씀하신 대로, 제가 주변지리에 어두운지라. 아직 투숙할 곳을 찾지 못해 대화를 내일로 미룬 것일 뿐입니다.”
원혁은 메이드의 말을 인용해 이 상황을 빠져나오기로 했다. 저쪽이 나를 모험가로 봤다면, 그걸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럼 내일 이곳에서 보기로 해요 모험가님.”
원혁의 말에 메이드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손뼉을 한번치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전에 혹시 희망의 도시에 들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내일 들을 이야기를 조금 들으면. 더 기대될 거 같아서요.”
몸을 돌려 금방이라도 다른 곳으로 향하려 하던 메이드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원혁은 살짝 당황했지만, 괜찮았다. 이런 상황도 상정 내였다.
“실은 제가 살던 마을도 이 도시처럼 어려움을 겪었었거든요.”
“아. 그래서 똑같은 기적이 일어날까 찾아오신 건가요?”
“하하. 그렇죠.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때는 막 주변 마을에도 퍼지고 그랬었습니다. 작은 마을이라 이곳까지는 소문이 닿지 않았겠지만 요.”
“한강의 기적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덕분에 더욱 기대되네요.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셔야 해요!”
원혁의 말에 붉은 머리의 메이드가 밝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해왔다. 원혁은 마지막까지 웃으며 메이드를 마중했다.
“…귀찮은 년.”
원혁은 메이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표정에서 웃음을 지웠다.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호구조사를 당할지는 몰랐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2층에서처럼 깽판을 부리며 빠르게 가고 싶었다.
‘혹시. 내 머리카락을 본 건 아니겠지?’
원혁은 스산한 눈동자로 메이드가 사라진 골목을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따라가서 처리할까? 붉게 물든 메이드의 머리카락을 더욱 붉게 물들여 주면, 메이드도 더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될 테고. 후환도 남지 않게 된다.
‘아니 아니야.’
원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방금 든 생각을 부정했다. 일이 좀 꼬여서 시간을 잡아먹히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지금은 살짝 진정해야 할 때다.
탑을 오르다 보면 이 정도 번거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혁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생활하던 탓에, 빠른 것을 원하던 과거의 버릇이 남아있는 것에 불과하다. 원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타일렀다.
‘게다가 이렇게 시련의 무대가 넓을수록 이후 엮일 가능성이 있으니 더욱 조심해야 해.’
이미 떠나간 과거를 붙잡을 수는 없다. 지금은 지나간 일에 연연하기보다는 더욱 은밀해져야 할 때다.
원혁은 주변을 둘러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게 됐을 때, 살며시 걸음을 옮겨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
바다를 건너고, 도시를 지나. 마경을 뛰어넘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뿜는 하얀 기둥형태의 빛은, 이제 원혁의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작동하길 빈다.”
원혁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다가갈수록 심장이 뛰고 흥분이 됐지만, 조바심은 가지지 않았다. 바쁠수록 돌아가야만 했다.
“거기까지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하. 마경이 너무 신기하다 보니 그만, 너무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버렸지 뭡니까. 지금 당장 바로 나가….”
원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남자의 주위를 돌린 틈을 타 바로 엘리베이터에 뛰어들려 했다.
그러나 남자의 복장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머리는 갈색으로 평범했지만, 남자의 복장은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집 앞에서 방금 나온듯한 모양새인 남자의 복장은, 노련한 등반자인 원혁이 보기에, 절대 이 마경에 입고 올 복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위가 뛰어나 보이지도 않았다.
‘마법사로군.’
원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법사와의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흐름. 흐름이 넘어가는 순간 접근도 하지 못하고 질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원혁은 다시 웃으며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말랑한 분위기를 풍기며 접근했다.
저벅.
넓은 마경에 원혁이 걷는 소리만이 울렸다.
저벅 저벅.
그리고 원혁과 남자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남자의 모습이 변했다. 처음에는 밝은 갈색의 머리였던 남자의 머리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흠칫. 원혁은 그 즉시 뒤로 물러섰다.
우르르쾅!
원혁이 서 있던 자리로 바로 전기로 된 창이 떨어졌다.
“그 변장마법. 마법이 아니구나?”
원혁이 검은 머리의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원혁의 말에 남자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마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검은 머리의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원혁을 바라봤다. 대단한 사람 납셨군. 원혁이 인상을 찡그렸다. 검은 머리 남자 특유의 여유 만만한 분위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을 텐데.”
“궁금한가?”
“그래.”
“좋아, 그렇다면 저승으로 가는 특별 선물로 알려줄게.”
원혁의 말에 남자는 팔짱을 풀고, 자신의 품에서 수정 구슬을 꺼냈다. 그 구슬 안의 풍경은 수시로 바뀌었는데, 도시의 풍경과 마경. 정확히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을 주로 비추고 있었다.
“CCTV인가.”
원혁의 중얼거림에 검은 머리 남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뿐만이 아니야. 지금 비추고 있는 곳의 소리까지도 다 잡아낼 수 있어. 이건 좀 특별한 거거든.”
남자의 말에 원혁이 인상을 썼다. 어쩐지 작은 중얼거림에도 대답한다 싶었다.
“너무 인상 쓰지 마.”
수정 구슬로 원혁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크게 말했다.
“한 번에 죽여 줄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주변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공간이 모여든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일반인이라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야에 손상이 일어날 정도의 전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강하다.’
원혁은 자세를 잡았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강하다. 2층의 악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고. 1층에서 중층까지 올라갔다며 소리치던 대머리보다도 몇 수위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중층을 넘을 수 없다.
원혁은 전기가 다 모이기도 전에 빠르게 남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손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잡으려 했다.
화르륵.
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그럴 수 없었다. 원혁은 재빨리 손의 방향을 바꾸어 날아오는 화염 덩어리를 막았다.
“크윽!”
날아온 화염 덩어리는 덩어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랬다. 원혁의 두 손으로는 다 잡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크기와 별개로 열기는 별 볼 일 없었다.
“흐읍!”
원혁은 화염 덩어리를 날아온 방향 그대로 던졌다. 방향은… 엘리베이터 쪽이었다.
슈우우웅…
원혁이 던진 화염 덩어리는 점점 빠르게 시전한 자를 향해 날아갔지만. 날아가는 도중에 갑자기 난입한 기사에게 그대로 베여 반으로 갈라졌다.
“메이드 마법사에, 왕관을 쓴 기사라. 너희 개그라도 하러 나온 거냐?”
원혁이 그들의 인상착의를 보며 웃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곳이 마경이 아니라면 소꿉놀이라도 하러 온 줄 알았을 것이었다.
“야. 저게 너의 여자들이냐? 생각보다 외모가 끝내준다?”
원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남자의 정신집중을 막으려 한 말이었지만, 남자는 원혁의 비아냥거림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마저 할 뿐이었다.
‘이런 저급한 도발로는 끄떡도 없다는 건가.’
원혁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재빨리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자가 근거리 순간이동으로 뒤로 물러났기에 실패했다.
‘아니, 남자가 사용한 게 아니다.’
원혁은 메이드복을 입은 붉은 머리의 미녀를 떠올렸다. 이건 분명 그녀가 한 짓이 분명했다.
‘귀찮게 하기는.’
원혁은 자세도 잡지 않고 빠르게 휘두른 손에 자세가 무너졌다. 온 힘을 기울인 속도의 손이 허공을 가른 탓에 금방이라도 바닥에 닿을 듯했다.
그러나 원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그리고 반동을 이용해 다리를 풍차처럼 돌렸다.
윈드밀.
원혁의 다리가 근거리 순간이동을 한 남자의 팔을 옆으로 걷어찼다.
“이런…!”
원혁의 발길질에 남자의 눈썹이 움찔했다. 마법이 끝나기 직전, 마법이 흐트러져 버렸다.
7초.
마법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시간인 7초를 벌지 못했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근거리에서 강한 공격을 사용해 한 번에 보내려 했는데 실패했다.
남자가 당황한 사이, 원혁이 흩날리는 전기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그러나 남자의 몸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순간이동 하는 것이 더 빨랐다.
“아쉽다. 낮아진 능력치에 적응했으면 방금 걸로 끝인데.”
원혁이 남자와 일행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몸을 일으키는데 더 오랜 시간이 소모되어버렸다. 예전이었다면 튼튼한 내구력만 믿고 무리하게 움직였을 텐데.
원혁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능력치가 낮아지니 여간 불편한 게 나이었다.
“어떻게 내가 이곳으로 올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마경의 입구로 들어오는 걸 수정 구슬로 봤다 해도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왔는데?”
원혁이 크게 소리쳤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잘 안 들리겠지만. 상관없었다. 저쪽은 수정 구슬을 통해 말을 듣고 있을 테니까.
“너희 순간이동으로 나를 뒤 쫓은 게 아니잖아.”
원혁의 주변에서 마법이 사용됐다면, 모를 리 없다. 마법 스킬이라면 모를까. 마법이라면 감지도 파훼법도 대부분 알고 있다.
“거기다가 그 변장 마법은 또 뭐야. 그건 등반자의 스킬이잖아.”
원혁은 남자에게 가까워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봐도 마력이 덧씌워진 느낌은 없었다. 그가 사용한 건 분명 변장 마법이 아닌 변장 스킬이었다.
물론 원혁이 마력을 느끼지 못하게, 덧씌우는 게 아닌 사용자의 모습을 완전하게 바꿔주는 폴리모프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고위 마법을 순식간에 하고 올 정도로 남자의 경지가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즉 검은 머리의 남자가 사용한 변장 마법은 마법이 아니라 스킬이라는 이야기지.’
원혁은 검은 머리 남자의 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탑 내의 주인이라도, 또는 무대의 주민이라도 스킬은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등반자가 가지고 있는 스킬석을 소모해서 배워야 한다.
하지만 원혁이 온 층은, 투쟁의 층. 투쟁의 층은 등반자에게 맞게 주어지는 층이기에 다른 등반자가 먼저 올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쌍둥이라거나, 완벽히 똑같은 상황에 놓인 등반자 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원혁이 누구보다 잘 안다.
어느 세상에 회귀를 겪고 탑에 올라온 등반자가 여러 명이나 있겠는가.
“저도 대한민국 국민이었거든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원혁이 얕게 생각하던 걸 멈췄다. 이 목소리 어딘가 익숙했다, 남자가 한 말이 아니었다. 이건 그 옆에 있던 붉은 머리의 미녀가 한 말이었다.
‘과연.’
여자의 말에 원혁이 시선을 아주 살짝 내렸다. 이것으로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스킬은 어떻게 얻은 건지 모르겠지만. 무슨 수로 자신의 위치를 알았는지는 알겠다.
“한강의 기적이구나.”
원혁의 중얼거림에 붉은 머리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크게 끄덕인 탓에 멀리서도 원혁의 눈에 잘 보였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수정 구슬을 이용해서 내 위치만을 확인한 거였군.’
어떻게 다른 등방자와 투쟁의 층을 공유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강 이해는 됐다. 저들은 이미 전 등반자와의 만남을 통해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분명 스킬석도 받은 것이겠지.’
등반자와 대적했다면, 저렇게 필사적으로 엘리베이터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고마워. 덕분에 다 이해했어.”
엘리베이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원혁이 웃었다. 그리고 스킬을 발동했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한눈팔면 그대로 끝일 테니까.”
원혁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동시에 그의 손에 큰 도끼와 방패가 생성됐다.
“빠르다!”
누군가 소리치는 목소리와 함께, 아까와 같은 화염 덩어리가 원혁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원혁은 도끼를 휘두르는 것으로 화염 덩어리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걸 본 여기사 검에 마나를 두른 채 이쪽으로 달려오지만. 소용없다. 원혁이 만든 방패는 그리 쉽게 뚫리지 않는다.
‘이건 현재 상황에 맞춰진 무구들이거든.’
원혁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여기사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바뀌면 등반자들의 시련이 바뀌듯. 현재 상황에 적응하여 그에 맞는 무구들을 뱉어낸다.
그러니 적들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 발현되는 것은 회귀의 잔재이자, 원혁의 주력 스킬.
그를 주인공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던 스킬.
전투에서 우위를 다지는 데 필요한 무기를 얻는 스킬.
스킬, 적재적소(????)의 등장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