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10. 복수대상이 꿈꾸는 복수방법.
* * *
파인드 산맥.
주인공의 집으로부터 꽤 먼 거리에 있는 지역으로,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자, 주인공의 복수 대상 중 하나인 갈색 비수 오크 부족이 사는 곳이었다.
동시에 지금 하영이 새태창을 타고 향하는 곳이기도 했다.
“새태창아 수고했어, 이제 들어가서 쉬어.”
하영은 새태창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홀로 파인드 산맥에 있는 산을 타고 올라갔다. 이유는 있었다.
산맥의 아래. 산과 산 사이에 하영이 목표로 한 부족이 있었는데, 오크 부족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라 근처에 있는 나무는 이미 벌목된 지 오래였다. 덕분에 주변에서 시야가 훤히 보였다. 그 근처까지 새태창을 타고 간다면 편하긴 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들킬 위험이 너무 컸다.
‘그건 안 되지.’
하영이 원하는 것은 오크 몇 마리를 조용히 납치하는 것, 시끄러운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하영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높긴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금방 올라갈 수 있겠어.”
하영이 산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오른손에는 400만 골드의 값어치를 톡톡히 해주는 하영의 능력치 뻥튀기용 마창이 들려있었다.
낭만검객: 그 창부터 놓고 이야기해라.
“선생님. 창은 저의 분신 같은 것이라 절대 손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신살자: 오, 진정한 전사로군.
낭만검객: 와 이걸 믿는 뉴비가 있네.
바른말만씀: 지금까지 니가 망가트린 창들에게 사과해라. 이 시발련아!
악질방송만보는사람: 아! 그래서 남자의 분신을 잃으셨구나!
꿀벌아넣을게: 바로 이거였누ㅋㅋㅋㅋㅋ
하영은 시청자들과 소통을 하며 산을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영이 생각했던 것처럼 빠르게 산에 올라갔다. 그 모습이 흡사 축지법을 쓰는 듯했다. 그러나 중간부터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이윽고 아무 말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산을 타는 속도도 처음에 비하면 굼벵이가 구르는 듯했다. 1초에 다섯 걸음 움직이던 것이, 이제는 겨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그 반대였다. 처음 산을 타던 하영이, 지구에서 보지 못한 복수의 끝만을 생각하며 산을 올랐다면. 지금은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하영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낭만검객: 왜 이렇게 말이 없음.
아가리롤스타: 쉿. 너도 주변이나 구경해라.
검은콩나물: 어! 저건 내 세계에도 있던 건데! 오랜만에 보네!
주변의 풍경, 설정으로만 보았던 낯설고도 익숙한 동식물들. 그 사이로 하영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익숙한 사람과 만났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비록 글자였을 뿐이나. 하영은 주인공의 과거와 현 상황을 알고 있었다. 소녀의 신념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적으로 이미 친근했다.
그러나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하영에게 있어 주인공인 소녀는 단순히 친근한 소설 속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복수물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하영은 소설을 읽는 것에 흥미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영은 이원혁이 나오는 소설을 읽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곳에 빙의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미래에 대한 걱정은 몰라도, 정조와 관련된 걱정은 없었겠지.’
하영이 아닌 원래의 이름으로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게임 방송을 보는 것이 취미인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살아갔을 거야.’
하영이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기억 속의 금발머리 소녀를 떠올려 봤다. 설렘, 기대, 동경. 그 밖의 부정적인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소녀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자신의 특성상, 이런 삶을 살게 한 것에 조금이나마 일조한 소녀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감정의 크기가 크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하영에게 있어서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영은 그런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유가 뭐지?’
하영이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이상한 상황이니 이상한 방식으로 의문을 풀려 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질문하니 하영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소녀는 특별했다. 하영이라면 이미 진작 포기하고도 남을 암울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재능조차 알지 못한 상황임에도. 소녀는 복수를 결심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 결국 복수를 성공시키기 시작했다.
그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정의구현이었다. 악한 놈이 잘사는 게 당연한 세계였고, 복수는커녕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도 참고 넘겨야 하는 것이 사회였다. 게다가 재능을 찾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출발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기에 도전보다는 포기를 선택하고, 성공보다는 혹시 모를 실패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소녀는 달랐다. 그래서 현실에 굴복한 하영에게는 대리 만족이 되었다. 소녀의 복수는 항상 하영을 설레게 했고, 그렇기에 소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했다. 평범한 하영은 주인공인 소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소녀를 동경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소설을 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영원히 남아 떠오르는 첫사랑처럼. 하영에게 있어 소녀는 영원히 오지 않을 다음이었다. 기억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은 잊히지 않을, 과거 남자였던 하영이 남긴 잔재였다. 그러니 화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화가 아니라 걱정을 해야겠지.’
하영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만약 하영이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 소녀의 복수가 과거를 넘어 다음에 닿게 된다면… 과거 자신이 꿈꾸던 최고의 복수를 직접 완성해버리게 된다면. 다음을 넘어 끝이 찾아온다면.
하영은. 나는…
아가리롤스타님이 100골드 기부.
오크 아님?
내가 오크라고?
“어허. 무슨 그런 소리를! 제가 키와 비교하면 몸무게가 좀 나오고, 배가 좀 나왔었긴 한데. 그건 술 배라서. 어쩔 수 없는 거였습니다.”
아가리롤스타님이 100골드 기부.
아니 저거 오크 아니냐고.
“아!”
오크가 등장했다는 말을 뒤늦게 이해한 하영은 그 즉시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풀숲으로 기어들어 갔다. 옷에 흙이 묻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마력만 있다면 옷의 능력을 발동시켜 얼마든지 청결하게 만들 수 있었다.
“와. 이거 뜻밖에 행운인데요.”
하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부족이 사는 곳 근처에 가지도 않고 오크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이 오늘만큼은 자신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수는… 두 마리인가.”
풀숲으로 살짝 얼굴을 내민 하영이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존재의 모습을 확인했다.
커다란 덩치에 초록색 피부, 그리고 오크의 아이덴티티인 돼지 코까지. 상상 속 오크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갈색 비수 부족의 오크는 야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던데…….”
하영은 오크가 조금 더 가까워질 때까지 오크 쪽을 노려봤다.
중요 부위에만 천 쪼가리를 걸친 야만적인 모습. 틀림없었다. 저건 하영이 찾는 부족의 오크가 맞았다.
“빙고. 바로 납치 들어가겠습니다.”
하영이 아공간에서 마창을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오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크들에게 접근했다.
킁킁.
가까이 다가가자 오크 한 마리가 냄새를 맡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암컷? 아니 여자인가?
오크는 여자 냄새를 맡고, 고개를 숙였다.
저 풀숲 밑에서 나는 냄새였다.
오크는 조용히 풀숲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자 냄새가 더 풍겼다. 오크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러다 검은색 마창을 든 채 미소 짓고 있는 하영과 마주쳤다.
“…”
오크와 하영의 시선이 서로를 탐색했다.
히죽.
그리고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넌 뭘 웃어 시발아.”
하영이 바로 마창으로 응징했다.
***
하영은 입에 부서진 창대를 물린 오크 두 마리를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 오크들이 무게가 좀 나가 힘겨웠지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낭만검객: 그거 가지고 힘들어하면 ㄹㅇ 사람 아니다.
니이모를찾아서: 오크들은 통나무가 아닙니다. 던지면 아파해요.
꿀벌아넣을게: ㄹㅇㅋㅋ
사실 장애물이 적은 쪽으로 오크들을 던지며 내려온 덕분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워낙 막 굴린 탓에 오크가 피를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오크의 질긴 피부와 하영이 강제로 먹이고 상처에 바른, 포션의 효과로 죽지는 않았다.
“어디 보자. 이제 진정이 좀 됐으려나?”
하영은 집 주변에 오크를 두고, 조심스럽게 소녀의 집에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문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방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영은 안쪽을 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지만, 밝은 곳에 있던 탓인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으음…”
하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안녕하세요?”
어둠 속에서 금발의 소녀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영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금발의 소녀에게 인사했다. 소녀의 눈에는 아직 미처 지우지 못한 눈물 자국이 그대로 있었으나, 눈에는 이전에 보지 못한 독기가 가득했다.
하영의 인사에도 금발의 소녀는 하영을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영은 그런 소녀의 모습에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 이거였다. 아직 소설의 무대가 되는 시간대에 비해 젊어 소녀의 티가 다 벗어나지 않긴 했지만. 퇴폐미가 느껴지는 금발의 미인은, 분명 하영을 복수물의 세계에 빠트리게 한 장본인이 맞았다.
“누구시죠.”
금발의 소녀는 음에 높낮이가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하영이 오 하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2D를 넘어 3D가 됐음에도 말하는 게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하영은 그게 신기했다.
정하영의 얼굴은 빙의하고 나서 제대로 본 게 손에 꼽았다. 뭐 좋을게 있다고 자신의 모습을 계속 보겠는가.
아델라는 원본 일러스트부터 약간 현실적으로 그려진 탓에 현실에서 보고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지 생각보다 더 예쁜 탓에 당황을 좀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달랐다. 완전히 그림으로 그려졌던, 자신의 이상형인 미녀가 이렇게 현실로 나와 말하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정말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게 실감이 되는 외모였다.
‘이게 바로… 개연성?’
다른 사람의 눈에는 하영이나 소녀나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외모인 것은 같았으나, 하영에게 있어서만큼은 소녀의 압승이었다.
“…”
금발의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하영의 시선에 똑같이 째려보고 시작했다. 하영은 소녀의 시선을 느끼며 살짝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히로인 100명 하렘 만들기 같은 말도 안 되는 소원이나 적을걸.’
소원의 부적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하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나간… 아니 소원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소원의 부적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소녀와 친해지는 것이었다.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하영이 두 손을 비비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런 하영을 노려봤지만. 아무런 힘없는 소녀가 하영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고, 하영은 무사히 소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하영의 뻔뻔한 모습에 소녀가 부들부들 떨었지만. 하영은 개의치 않았다.
원래 허락보다는 용서가 빠르고 쉬운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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