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10. 복수대상이 꿈꾸는 복수방법.
* * *
“나를 도와야 한다고?”
금발머리 소녀의 말에 하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 하영의 모습에 소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너무 좋게 흘러가는 이야기네…”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하영을 주시했다. 하영은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부담스러웠다. 아직 꼬맹이라고는 하나. 장래가 보장된 미녀, 미녀에게 약한 하영으로서는 무리였다.
게다가 그 미녀가 하영의 타입이고, 현실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내적으로 너무 친근한 탓에 바라만 봐도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는 것 또한 없지는 않았다.
“순수한 호의도 약간은 섞여 있어.”
“…약간이라는 수준이 아닌 거 같긴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살며시 고개를 든 채, 부끄럽다는 듯 조용히 말하는 하영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금발의 소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건드리는 걸 멈췄다.
“좋아, 믿을게. 날 도와줘.”
소녀의 이야기를 듣던 하영은, 소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자신치고 너무 쉽게 이야기가 풀린 것에 살짝 걱정이 됐다.
‘…이건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렇게 까지 이야기가 잘 맞으니 오히려 불안했다. 하영은 큰마음을 먹고, 슬쩍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푸석푸석한 금발, 하얀 걸 넘어선 핏기없는 피부. 어두울 때는 미쳐보지 못한 소녀의 상태가 잘 보였다.
‘죽음을 겪자마자, 부모님이 죽은 시기로 돌아와 펑펑 울기만 했으니. 어쩔 수 없나.’
소녀의 상태가 한눈에 봐도 힘든 상태라는 걸 깨달은 하영은, 최대한 빠르게 대화를 마치기 위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이렇게 쉽게 날 믿어준 이유가 있을까.”
하영의 말에 소녀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어보기도 하고, 시간을 거스르는 경험도 했는데.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를 만나 도움도 받을 수 있는 거겠지…”
자신이 말하고도,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소녀가 살짝 웃었다. 약간의 체념이 섞인 미소였다.
“게다가 거부권은 없어 보이니. 뭐 어쩌겠어. 내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니, 일단 도움이라도 받으며 정말인지 지켜봐야지.”
소녀의 말에 하영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뭐야… 믿어 주는 거 아니었어?”
“믿고 있어.”
하영의 말에 소녀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을 믿는 거랑은 별개로 내가 검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뿐이야.”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얇은 팔뚝을 쳐다봤다. 부모님이 있을 때는 그 흔한 도끼질도 해보지 않아. 정말 최소한의 근육만이 팔에 붙어 있었다.
검은커녕, 도저히 전투에 재능이 있을 거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고, 내게 복수할 힘이 주어진다면. 아니, 설령 내가 검에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그녀의 말 중 반만이라도 사실이라면.
소녀는 팔에 힘을 꽉 줬다. 내가, 우리 가족이 받은 고통의 반이라도 그들에게 주고 마리라.
“…설령 내가 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거짓이라 해도. 공짜로 받는 남의 호의니까. 이용할 수 있을 때 이용하는 게 좋잖아.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머리의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의 뒤에는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검은색 창이 벽면에 걸쳐 있었다.
소녀는 검은색 창을 보며 강렬한 눈빛을 쏘아냈다. 하영은 그 모습에 독기가 바짝 올랐다는 걸 깨닫고 활짝 웃었다.
아직 방황을 겪지 않아. 독기만 품었을 뿐 어떻게 나아가는지 방향을 잡지 못한 상태였지만, 기회가 오자마자 붙잡는 것이 역시 주인공다웠다.
“좋아, 이유가 어찌 됐든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이건 선물이야.”
하영은 잠시 문밖으로 나가 팔다리가 부러진 오크들을 들고 돌아왔다.
읍! 읍!!
오크들은 소녀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부서진 팔다리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몸 곳곳에 더욱 강한 고통이 와, 점점 더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 졌다.
읍! 아그작!
오크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눈을 붉게 충혈 시킨 채, 입에 물린 창대를 아그작 하며 씹는 것밖에 없었다.
“이건… 설마!”
오크, 선물. 그 두 단어에 이 오크들이 어떤 부족 출신이 알게 된 소녀가 눈을 빛냈다.
소녀는 곧바로 부엌으로 가 과도를 들고 나왔다. 한 손에 과도를 들고 있는 소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건 하영이 처음으로 보는 소녀의 진짜 미소였다.
“정말 고마워.”
소녀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한번 한 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과도로 오크의 머리를 찍으려 했다.
그러나 소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소녀는 검은색 창의 창대로, 자신의 팔을 막은 하영을 노려보았다.
“일단 참아봐.”
하영은 그런 소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최고의 복수를 이뤄 줄 테니까.”
하영의 말에도 소녀는 계속해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윽고 하영이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말에, 언제 인상을 찌푸렸느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난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너는 가서 좀 쉬고 와. 수련할 때 입을 만한 편한 옷으로도 갈아입고.”
하영은 소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보며 말했다. 외모와 잘 어울리는 옷이기는 하다만, 수련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낭만검객: ???
물론 이런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싸우는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이 옷은 노출이 많은 덕에 의외로 움직이기 편했다. 노출은… 남자니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어허! 선생님들 저 남자 맞잖아요! 음해 금지입니다. 제가 여자였으면 선생님들 찍소리도 못했어요.”
하영은 물음표로 도배된 채팅창을 보며 엄지를 척하고 세웠다.
낭만검객: 무친련…
신생나락감: 여기 그런 방인가요?
아가리롤스타: 여기 그런 방 아닙니다.
항문맛캔디: ???????
꿀벌아넣을게: 어허~ 여기 그런 방 안입니다~
***
하영은 상점에서 강화 유리판을 구매했다. 사실 하급 투명 방패라는 장비였지만, 비교적 가격도 싸고 유리보다는 단단해 보여 강화 유리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걸 이렇게 하면…”
하영은 마창으로 땅을 파고, 그 구멍에 강화 유리판을 박아 넣었다. 이와 같은 짓을 몇 번을 반복하니, 사방이 막힌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안에는 당연하게도 오늘 잡아온 오크들이 있었다.
“팔다리를 아예 분질러놨으니까. 천장은 안 해도 되겠지.”
하영은 투명 유리판 너머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오크들을 보며 웃었다. 역시 오크들의 손발에 밧줄을 묶어 놓길 잘했다.
“팔 다리를 망가트려 놓고, 왜 밧줄로 묶나 했더니. 이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하영의 옆에는 기어 다니는 오크들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 금발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하영은 그런 소녀를 지켜보다, 말을 건넸다.
“좋아. 그러면 수련 시작하자.”
하영의 말에 소녀가 끄덕였다. 소녀는 투명 유리판에 기대 놓았던 목검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흐읍!”
처음에는 하영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검을 휘두르던 소녀였으나, 시간이 더해질수록 검의 움직임이 가파르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원작의 재능 어디 안가는 구나.’
혼자 방황을 하다 검을 잡은 원작과 달리, 좋은 스승이 있으니 소녀의 재능이 조금 더 쉽고 빠르게 꽃 피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것은순리대로: 왼쪽 발.
“검로만 보지 마, 왼쪽 발이 자리에서 움직였잖아.”
시청자의 채팅을 본 하영이 나직이 말했다. 나름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길게 늘려 말했다.
“알았어, 주의할게.”
소녀는 훈수를 듣자마자 그 즉시 수용했다. 말 한마디 들었다고 바로 문제를 고치다니, 하영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재능이었지만. 이게 바로 검술은 쥐뿔도 모르는 하영이 소녀에게 검이라는 걸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낭만검객: 재능이 있긴 하네.
꿀벌아넣을게: ㅇㅈ
소드마스터거품임: 저 금발년 머리 한 대 때려 버리고 싶네.
방송시청만30년: 금발. 검술. 소녀. 뭐지 이 익숙한 단어의 조합은?
주문쟁이보면던짐: 소마거품 너 주문쟁이지? 이 씹련아 ㅋㅋㅋㅋㅋㅋ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소녀의 기본 검술은 시청자들이 보기에도 틈 잡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덕분에 하영은 심심해졌다.
‘오랜만에 훈수 두느냐 재밌었는데.’
하영은 아쉬움에 채팅창을 계속 바라봤지만, 서로 싸우기만 할 뿐 훈수 거리는 올라오지 않았다.
“옜다! 먹어라!”
채팅창과 검술 수련을 보던 게 지겨워진 하영은 자신의 앞에 있는 과일을 유리창 너머로 던졌다. 그러자 오크들이 과일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왔다. 그들은 과일을 먹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입이 창대에 막혀있는 탓에 먹을 수 없었다.
하영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어느새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는 걸 깨닫고,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서 밥 먹고 쉴 때 빼고는 검을 휘두르고 있어 봐. 난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서 올게.”
하영의 말에도 소녀는 계속 검을 휘두르기만 할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하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참 열심히도 하네.”
하영은 검을 휘두르는 소녀의 모습을 잠깐 관람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소녀는 정말 땀범벅이었다. 특히 가까이에서 보니, 찰랑거리는 금발 사이로 하얀 피부를 타고 땀이 흐르는 게 잘 보였다.
“…”
하영은 숨 쉬는 것도 잊고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표정이 변태 같다는 시청자의 말에 급소를 맞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소녀의 집 주변에 있는 공터에 온 하영이 말했다. 오늘의 목표는 소설에 나왔던 기연 들 중, 이 근처에 있는 것들을 전부 털어 오는 것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하영이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눈앞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출발하라고.”
하영이 손가락으로 하얀 구름을 툭 건드렸다.
「호에에에에」
그러자 새태창이 구슬프게 울었다.
***
갈색 비수 부족의 오크, 로밀.
그는 인간들이 말하는 지옥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바로 앞에 온갖 산해진미와 꿈에도 나오지 않을 법한 미녀들이 땀을 흘리고 있거늘, 로밀은 그 무엇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읍! 읍!!
옆에서 동료인 오크가 현재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발버둥치며 무어라 소리치려 하지만. 저건 바보 같은 짓이다.
조금 전, 로밀은 깨달았다. 우리가 강하게 반응할수록 눈앞에 있는 두 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한다는 걸.
“와! 넌 천재야! 어떻게 이런 대단한 생각을 해낸 거야!”
금발 머리 여자의 말에 검은 머리 여자가 웃는다.
“금방 죽게 해주면 재미없지, 게다가 이건 뒤에 올 커다란 복수의 초석이야. 그러니 믿고 기다려줘.”
검은 머리 여자의 말에 금발 머리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그렇게 움직이고 말할수록 로밀이 맡을 수 있는 여자의 향기는 더욱 진해졌다.
“자 어서 이 오크들을 보며 검을 휘둘러, 검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검을 휘두르는 법을 이야기해줄 수는 있어.”
검은 머리 여자의 말에 금발 머리 여자가 다시 목검을 들고 와, 로밀의 앞에서 검을 휘두른다.
풍겨져 오는 여자의 냄새에 오크의 코가 본능에 따라 움찔거리지만. 로밀은 체념했다. 구원은 오지 않는다. 저들은 악마다.
“거기서 밥 먹고 쉴 때 빼고는 검을 휘두르고 있어 봐. 난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서 올게.”
그 말을 끝으로 검은 머리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로밀은 흥분을 넘어,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간, 동료 오크를 지켜보다, 고개를 위로 올렸다.
푸르고 깨끗한 하늘, 그 위로 새 구름 하나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좋은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