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2. 각성은 했는데
* * *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배 위인가?’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리고, 낡은 배 특유의 역한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모터엔진의 특유의 강한 진동을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는, 일어나려고 했다.
‘팔다리가 안 움직여...’
알라우네의 마비독은 여전히 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온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누워 있는 상태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는 것조차 힘겨웠다.
심지어 독만으론 불안하다고 여겼는지, 팔목과 발목을 밧줄로 꽉 묶어놨다. 밧줄 주변의 살갗이 빨갛게 부어오른 걸 보니, 나중에 저 밧줄을 풀고 나면 꽤나 아플 것 같았다.
‘어우, 골이야.’
바닥에 귀를 대고 쓰러져 있어서인지, 배의 거친 모터엔진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아른거렸다. 뱃멀미 때문인지 머리가 마치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처럼 욱신거렸다.
금방이라도 안에 있는 것을 게워낼 듯이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몸 상태가 여러모로 안 좋은 것 같았다.
‘...목말라.’
자꾸만 식은땀을 흘려서인지, 갈증이 찾아왔다. 느껴지지 않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수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저기...*콜록*, 거기 사람 있어요? 물, 물 좀...”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에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의사 전달이 되었는지, 한 어린 여자애가 수통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입 벌려.”
“...뭐?”
“혼자서 물 못 마시잖아. 먹여 줄 테니까 입 벌리라고.”
그는 수통에 담긴 물을 가져온 그릇에 따르더니, 수저 하나를 꺼내들었다.
“목이 엄청 탈 거야. 우리가 사용하는 마취제나 마비독은 대부분 간단한 발열과 식은땀을 유발하거든. 알라우네의 독은 더더욱 그렇고.”
그릇에 담긴 물을 뜬 숟가락이, 입 앞에서 멈춰섰다.
“아~”
“아...”
꺼림척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린 애가 사람을 속이겠냐는 생각에 순순히 입을 벌렸다. 그러자 수저의 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입 안의 고통스러운 갈증이 확 완화되는 느낌에, 나는 그 아이가 떠주는 물을 필사적으로 받아먹었다.
“...핫!”
갈증이 한결 가시고 나서야,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나보다 한참은 어린, 초등학교를 다녀야 할 것만 같은 어린 소녀에게 이런 식으로 보살핌을 받게 되다니. 어느새 수저를 놓은 아이의 손길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수치심과 배덕감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이제 쓰다듬는 것 좀 그만해주지 않을래?”
“그래. 싫다면 할 수 없지 뭐.”
아이는 미련 없이 손을 거두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삼십 분 내로 본토의 시장에 도착할 거야. 기다리고 있어.”
그 말만을 남기고 그녀는 방문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창문 하나 없는 어두운 방에 혼자 남겨졌다.
...시장이라니, 내가 생각하는 그 노예 시장일까. 나는 정말로 이렇게 무기력하게 팔려 나가는 걸까.
탈출 가능성은 0에 가깝고, 팔다리조차 독때문에 움직일 수 없으며, 몸의 컨디션도 최악이었다. 자꾸 부정적인 상황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밀려오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답이 안 나왔다.
“...상태창.”
나는 체념이 담긴 한숨과 함께, 별다른 기대 없이 상태창을 호출했다.
[상태창 로딩이 완료되었습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뿔잡고아기만들기] 모험가님!
기존 캐릭터의 스텟을 100% 적용받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투자한 스킬들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레벨 제한이 해제됩니다.
스텟의 보정치가 적용됩니다.
.
.
.
“...어라.”
이거 꿈인가?
나는 팔뚝을 꼬집어 보려다가 마비독 때문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고개를 들어 바닥에 내리찍었다.
아팠다. 고통이 느껴졌다. 즉, 꿈이 아니란 소리였다.
멍하니 떠오른 문구들을 살펴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태창의 문구에 따르면, 드디어 내 캐릭터의 스테이터스들을 이 신체에 적용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더 이상 잔병치레를 안 겪어도 되고, 근력 부족으로 생수 1.5리터 하나도 못 드는 더러운 경험도 안해도 될 것이며, 무엇보다 더 이상 남들에게 무시받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뻤다.
그 누가 전체 유저 중 마법사 랭킹 세 손가락에 드는 유저를 무시하겠는가. 얼음송곳에 꿰뚫리고 싶은 머저리가 아니라면 그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는 상상에 빠진 나는 감격에 찬 눈빛으로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의 내용을 되새겼다.
스텟의 해방, 보정치 적용, 스킬 사용 가능, 레벨업 제한 해제 등등... 남들에게 차마 보여주지 못할 닉네임은 무시하기로 했다. 혹시 이 닉네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는 건 아니겠지?
“하하, 나는 이제 무적이다. 유저는 신이고.”
일라우네의 독에 당한 몸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내게는 이런 상황에 유용한 스킬들이 수십 개나 있었다. 그 중에는 중독이나 질병 상태 같은 디버프를 해제시키는 스킬도 존재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이 독을 해독할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단순히 해독을 끝내면 재미없지.’
나를 고생하게 한 바깥의 납치범들에게, 참교육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해독을 해서는 안 되었다. 괜히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가 도망이라도 치면 안 되니까.
난 지금 꽤나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였고, 저 납치범들 하나하나가 모두 내 귀중한 화풀이 수단이었다. 방심을 하도록 신중하게 유인해서, 약한 공격 마법이나 속박 마법으로 한번에 일망타진한다. 그 뒤에는 마법 화력을 조정하기 위한 실험만이 남아있을 뿐.
앞으로 그들이 당할 일들을 생각해보니 동정심이 들려고 했으나, 이종족 유저들이 인신매매로 팔려나가면 대부분이 비허가 인체실험을 당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그 일말의 동정심마저 사라졌다. 어차피 이 인간들도 나와 같은 무고한 유저들을 납치해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 유저들이 실험실로 팔려나간 뒤에 받을 고통은 생각조차 안 했겠지.
“이봐, 여자가 깨어났다는데?”
“누가 그래?”
“로즈가. 목이 마르대서 물 좀 줬다고 하더라.”
바깥에서 납치범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개수를 보아하니 날 직접 납치했던 두 명 말고도 공범들이 있는 것 같았다. 일반인이 입수하기 힘든 독을 사용하고, 집단으로 움직이며, 납치 대상을 버젓이 보관할 수 있는 건물까지 지닌 인신매매 조직의 범죄자들.
여러 정황으로 보아하니, 죽이지만 않으면 웬만한 상해까지는 법원에 가서도 정당방위로 인정될 것이다. 스킬의 위력을 합법적으로 실험해볼 좋은 기회였다. ‘납치를 당해서, 스스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라니. 내가 생각해봐도 완벽한 변명이었다.
끼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네 명의 괴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성공적으로 범행을 성공시킨 것이 기쁜지, 그들은 나를 내려다보며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키가 작은 남자가 말했다.
“안녕, 꼬맹아. 지금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
“야, 겁에 질려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 좀 봐.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게 보기 좋네.”
원래 피부가 새하얘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만, 굳이 사소한 것까지 따지며 반박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순순히 그들이 떠드는 것을 들어주다가 입을 열었다.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어떻게 되긴. 중국 본토의 시장에 실려가서, 뚱뚱한 갑부들한테 유희용으로 팔리거나, 각국의 기밀 실험실로 끌려가 인체실험을 당하겠지. 이제 겁이 좀 나나?”
실실 웃으며 내가 각성을 하지 않았다면 겪게 될 일들을 나열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유저들 모두가 저 남자가 말한 그대로의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그런 짓을 당하는게 무섭고 두렵다면...우리 쪽으로 와서 봉사하는 것도 방법인데 말이지. 적당히 쓰고 나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에 넘겨줄게.어때?"
네 사람의 음슴한 욕망이 담긴 시선이 내 몸 전체를 훑었다. 그들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봤더니, 몸싸움으로 늘어난 후드티와 셔츠 안쪽의 속살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곤, 일갈했다.
“역겨워.”
“뭐?”
“역겹다고요, 당신들. 당신들이라고 부르기도 뭣하네. 이 쓰레기들아.”
"...방금 뭐라고 했지? 너 제정신이야?"
내 욕설에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남자.
이 방 안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들어와 있었다. 방금 전, 갈증을 느끼며 누워 있었을 때 엿들은 목소리의 종류도 총 네 개였다. 아마 이 남자들과 아까의 소녀 한 명이 일행의 전부겠지. 어린 소녀 한 명이 빠져있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앞으로 이만한 일망타진의 기회가 또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목표물을 바라보며, 게임에서 봤던 대로 마법을 영창했다.
“조금 아플 거에요.”
하급 마법[아이스 볼트.]
남자가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아이스 볼트. 내 캐릭터의 견제기 중 하나이자, 빙속성 스킬 중에서도 가장 흔히 쓰이는 기본적인 마법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견제용으로 쓰이는 기본적인 마법이라고 해도 내 캐릭터의 마력 스텟이 적용된다면 절륜한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
위력을 대충 가늠해보자면, 평범한 사람의 다리 정도는 우습게 꿰뚫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게임상에선 온 몸이 돌로 이루어진 골렘들도 한방에 보내버리는 위력이었으니까. 어쩌면 다리를 뚫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통으로 잘려버릴지도.
나는 남자가 제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상상하며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