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4.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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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건틀릿을 낀 손으로 상대방을 후드려 패는, 간단 그 자체인 메커니즘을 지닌 직업.
그와 동시에, 버젓한 무기가 없어 맨손으로 싸워야 하는 초반에 가장 키우기 힘든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터 외길을 걷는 탑 랭킹 여성유저에게, 어느 한 방송인의 지인이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질문은 '파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내용이었다.
“왜 초반에 키우기도 힘들고, 매커니즘도 단순한 ‘파이터’만을 고집하시나요?”
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타격감.”
팡, 하는 시원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면, 이 소리가 샌드백이나 무언가를 때려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그냥 허공에 주먹을 날렸을 때 나는 소리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배빵성애자]
칭호: 폭력적인 – 조개 미식가
LV.163
종족: 수인(고양이)
상태: 굶주림
기본 능력치
힘: 73(8)
민첩: 141(+14)
마력: 5
지능: 11
종족 특수 능력치
고양잇과 수인 민첩성 +14(1/10 추가)
직업 특수 능력치
기력: 120/120
스킬 및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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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스텟과 민첩 스텟에 치중된 투자, 전형적인 전사 직업의 상태창이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현실의 자신의 몸에 이 스텟들이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스킬을 쓰는 방법을 모르겠네...’
평범한 소설에서처럼 스킬명을 외치거나 생각하면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간단한 버프 스킬마저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머리를 짚던 그녀의 시야에 정장을 빼입은 경비들이 들어왔다.
“이봐, 거기 너!”
예진의 옷차림을 보고 이곳의 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경비들이 예진을 에워쌌다. 키가 적어도 190은 넘을 것 같은 거한들 중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입을 열었다.
“상품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우리도 상품에 상해를 입혀서 욕을 먹긴 싫으니 이대로 순순히 돌아간다면 네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 위로 튀어나온 수인 유저 특유의 귀, 목덜미에 새겨진 상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인장, 그리고 거적떼기에 가까운 옷차람까지. 부귀층만이 방문이 가능한 이 암시장 속 무도회에, 그런 소탈한 모습을 하고 찾아오는 덜떨어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모든 특징들이 그녀가 경매장에서 탈출한 ‘상품’임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경비들은 그녀를 말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괜히 상처를 입혔다가 이 상품의 판매자에게 보상을 요구받으면 곤란한 것은 결국 그들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들의 예상은 전부 다 맞아떨어졌다. 예진은 상품으로서 이곳에 끌려온 것도 맞았고, 현재 탈출한 상태인 것도 맞았으니까. 그들이 유일하게 틀린 예상이 있다면, 상대방이 그 몸집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생각 없는데요.”
예진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거한의 손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보드라운 손바닥의 감촉에 상대방이 방심한 사이, 그녀는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끄아아악!”
“미친, 왜 저래?”
“어이, 괜찮나? 무슨 일이야?”
다른 동료들은 그가 왜 소리치는지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가슴팍에도 못 오는 작은 소녀가 단순한 악력으로 제 동료의 손을 아작내고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테니까.
그들이 그 믿기 힘든 사실을 알아챈 것은, 남자가 고통 어린 목소리로 외치고 난 뒤였다.
“내 손! 내 손이..!”
더 이상 그런 비명을 듣기 싫다는 듯, 예진은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참은 여유있어 보이던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부숴진 제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만약 저 경비가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순간, 피를 흘리며 무대 한가운대에 뻗어 있을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소녀, 한예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참아야 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으니까...’
빠르게 동생을 구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오빠...아니, 이제는 언니가 된 그녀를 챙긴 채 도망쳐야 했다.
아직 스킬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상, 총화기를 가진 적이 있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녀는 눈앞의 적들을 마주했다.
“죽여!”
한 남자의 손가락질에, 칼이나 제압봉을 든 거한 다섯이 이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름 냉병기를 다루는 법을 배운 사람들인지 제법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검술이나 둔기술. 실제로 나름 대인전에서 좋은 효율을 보이는 전략이었다.
“물론 그것도, 수준이 비슷해야 통하는 거지만.”
민첩 스텟의 보정 덕분인지, 말도 안 되게 늘어난 동체시력 탓에 그들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칼날이 날아오면 잡아채고, 둔기가 날아오면 빗겨내고, 주먹이 날아오면 피해낸다.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신위에 가까운 움직임에 당황한 경비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그들도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즐기며, 예진은 자세를 잡았다.
손을 눈높이에 올리고 뒷손은 오른쪽 뺨에 붙인다.
가드, 혹은 커버링이라고도 불리우는 복싱의 기본 자세.
‘스킬이 없다면, 그냥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패면 돼.’
지금 당장 예진의 신체능력 자체는 팔이 닿는 거리인 리치를 제외하면 그 어느 체급의 사람보다도 강력했다. 상태창의 스탯을 기준으로 평범한 성인들의 평균 근력 스텟은 2에서 3 사이, 온몸을 극한까지 단련한 스포츠 선수들이 종목에 따라 5에서 6 정도였다.
그리고 현재, 예진의 근력 스테이터스는 73. '굶주림'이라는 상태이상 디버프 때문에 약간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73에 달하는 근력 스텟은, 그녀가 준비만전이 아닌 현 상태에서도 자동차 서너 대 정도는 간단히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뜻했다. 이러한 힘에 초인적인 반응속도와 동체시력이 더해진 예진의 신체능력은 말 그대로 괴물에 가까웠다.
거리를 좁히는 스텝과 함께, 쥐고 있던 주먹을 가볍게 앞으로 내민다. 근육에 모여져 있던 힘이 주먹이란 작용점으로 집중되어, 고스란히 충격량으로 환산된 채 바깥으로 방출된다.
흔히들 복싱에서 잽이라고 하면, 가벼운 견제용 펀치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체급의 차이가 있다면, 잽은 단순한 견제기를 넘어서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그 예시로, '헤비급의 왼손 잽은 라이트 헤비급의 KO 펀치나 다름 없다'라는 유명한 모 복서의 격언이 있다. 체급이 상대방보다 높다면, 단순한 잽만으로도 ko펀치급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예진의 신체능력은 상술했듯 헤비급을 넘어, 그 어떤 체급을 불러와도 비교가 불허한 상태였다. 그러한 그녀의 잽의 위력은...
일종의 펀치라기보단, 거대한 철거용 무게추에 맞는 것과 비슷한 위력을 자랑했다.
우드득.
그 막대한 충격량에 전혀 못 미치는, 맥 빠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모두의 시선이, 예진의 첫 목표물로 점찍혔던 남자의 얼굴에 가 있었다.
얼굴이 통째로 망가졌다. 아니, 망가졌다는 표현으론 뭔가 부족했다.
'아작났다.'
의학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경비원들이었지만, 저 주먹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동료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시체의 상처는 잔인함을 넘어 끔찍했다.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였다.
“어휴, 더러워라.”
피인지 뇌수인지 모를 액체를 기분 나쁘듯이 털어내는 그녀의 모습에 그곳에 있던 모두는 실감했다. 자신들은 눈앞에 서 있는 저 여자를 이길 수 없음을.
단순하게 '못 이긴다'정도가 아니었다. 상처 하나조차 낼 수 없다. 저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으니까.
“...”
한동안의 정적. 바닥에 쓰러진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시체를 바라보던 예진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쯧. 기분만 잡쳤네.”
거짓말이다.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 없었다면 저렇게 강한 힘을 담지도 않았을 터였다. 저 년은단순히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샌드백 대신 사람을 사용한 것일 뿐이었다.
복도에 있는 모든 경비원들은 모두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거짓말이라고 반박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없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네! 뭐든지 대답하겠습니다! 편히 물어봐 주십쇼!”
"동생의 위치. 아, 그러니까 보라색 머리칼에 검은 눈을 한 여자애의 위치를 말해요."
"그 애라면 분명 서쪽 항구 3번 게이트에 다른 인원들과 모여 있을 겁니다."
경비원들은 그녀의 질문에 대해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한다면 저 괴물이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살려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희망이 헛되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답 고마워요. 하지만...당신들의 얼굴, 전부 기억하고 있었어요. 제 동생을 협박의 도구로 삼던 쓰레기들.”
“아, 아닙니다! 저희가 언제”
실제로, 그들은 저 괴물의 동생을 본 적도 구타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범죄의 현장 속에선, 강자의 말이 곧 법칙이자 현실인 법. 그들은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동생의 위치를 알려 준 건 고맙지만, 이젠 그 대가를 치르셔야죠? 정보에 대한 보답으로, 여러분들이 받을 '대가'는 싸게 쳐 줄게요. 당신들은 내 동생을 수십 번은 때렸었지만, 저는 여러분들 한 명 당 단 한 대만 때릴 거에요. 나름 남는 장사잖아요. 그쵸?”
“...”
미친년. 그냥 죽이고 싶다고 하던가.
그렇게, 몇 번의 맥 빠지는 소리가 더 울려퍼진 뒤의 복도에는 더 이상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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