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6. 약관동의
* * *
“오빠, 진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봐줘요...하앙...”
다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예림이의 얼굴을 거칠게 밀어내자, 그녀는 괴상한 신음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달라붙어 오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대며,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리 가. 이 목 안 보여? 이거 낫기 전까진 너랑 말 안 해.”
그녀의 잠꼬대로 숨이 막히는 동안 목에 무리가 갔는지 목뼈 부근의 통증이 심했다. 그래서 마침 찾아오신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간단한 검사를 받은 후 목 보호대가 채워졌다.
다리 아래쪽도 이상하게 좀 축축했던 것 같긴 한데... 시트도 멀쩡했고, 예진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으니 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내 다리를 붙잡고 뇌주지 않는 녀석 때문에 차게 된 두툼한 목 보호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예림이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다리를 놔 주었다. 아무래도 이거 한동안 잘 먹힐 것 같으니, 예림이를 부려먹을 때마다 써야겠다.
이미 화는 어느 정도 풀렸고, 용서해줄 마음도 있었지만... 남을 부려먹는 건 은근히 재밌으니까, 한동안은 삐진 척을 할까 싶었다.
단순한 잠꼬대로 언니랑 내게 그렇게까지 혼난 게 억울해서인지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예림이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예진이 입을 열었다.
“근데 오빠, 그렇게 붙잡혔으면 스킬을 써서 빠져나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블링크라던가, 쉴드 같은 거라도 썼으면 적어도 숨이 막힐 일은 없을텐데.”
“...나 스킬 쓰는 법 모르는데.”
“아 맞다, 오빠는 아직 스킬 쓰는 방법을 모르시죠? 지난 일주일 간 잠들어 계셨으니까.”
“뭐야, 스킬을 쓸 수 있다고? 현실에서? 못 쓰는 거 아니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분명 내가 스킬을 쓰려고 시도했을 때는 아무것도 안 나갔는데?
게임 속에서 마법사는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으로 순간이동도 가능하며, 일상생활에 유용한 여러 스킬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걸 현실에서 해볼 수 있다는데, 누가 신이 안 나겠는가.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예진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잠들어 계신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었거든요. 거의 대부분의 유저들이 상태창을 각성했어요. 덕분에 각종 커뮤니티에서 유저들 간의 정보 공유가 활성화되어, 스킬을 쓸 수 있는 방법이 밝혀졌죠. 잘 봐요.”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예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흡!"
자세를 잡은 그녀의 두 주먹이 그녀의 심장부 앞에서 맞부딪혔다. 붉은 기운이 그녀의 손을 감싸고, 진원지에서 나온 가벼운 풍압이 병실 안을 휘돌았다.
“오오!그거 [자세] 스킬이펙트 아닌가? 파이터 유저들은 다 쓴다는 가성비 스킬. 맞지?”
전투에 돌입하기 전, 간단한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 추가 스텟을 얻는 가성비 갑의 직업 스킬. 게임을 하면서 하도 많이 봤던지라 파이터 유저가 아닌 나도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스킬이었다. 온 몸에 붉은 기운을 두른 그녀의 모습은 가히 전설 속에 나오는 투희처럼 보였다. 그 간지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정답. 자,이제부터 스킬 쓰는 법을 알려 드릴게요. 일단 좀 진정하시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상태창 열어 봐요.”
“알겠어.”
‘상태창.’
[뿔잡고아기만들기]
칭호: 합리적인 드래곤의 반려
LV. 170
종족: 드래고니안(화이트)
상태: 목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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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아이스 볼트] LV. 10
[일렉트릭 볼트] LV. 10
[블링크] LV. 10
[마나 쉴드] LV.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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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직업이라면 누구나 찍어 놓는 범용성 있는 스킬들과 원소술사 특유의 속성 마법들이 나열되었다. 역시나 맨 처음 상태창을 열었을 때와 달라진 점은 전혀 없었다.
“상태창 열었어. 이 상태에서 뭘 하면 되는데?”
“스킬 목록을 제일 아래쪽으로 내려 봐요.”
사용한 적도, 스킬 포인트를 투자한 적도 없는 반투명한 스킬명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기다란 스킬 목록들의 제일 끝에는 익숙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스킬을 사용하고 싶으시다면, 이용약관에 동의해 주세요?’
“이용약관 문구 보이시죠? 클릭해 보세요.”
반짝반짝 빛나는 ‘이용약관’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클릭하니, 눈앞에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판타지아 온라인2 스킬 이용약관 동의서
스킬 사용으로 인한 인적 및 재산상 손해는 사측의 책임이 아닌, 스킬을 사용한 유저의 책임으로 한다.
개인정보 사용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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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항을 모두 동의하신다면, 동의 버튼을 눌러주세요.
동의□
스킬 사용 이용약관은 간단했다. 스킬 사용으로 인한 재산적, 인적 손해는 전부 스킬을 사용한 유저의 책임이고, 사측에서는 신경을 안 쓴다는 약관에 대한 설명이 내용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게임을 시작할 때도 동의했던 개인정보 관련 언급같은, 쓸모 없는 내용들이었다.
“...설마, 이것만 동의하면 맘대로 스킬을 쓸 수 있다고?”
"이론적으론 맞아요."
"이 미친놈들은 그럼 이런 중요한 걸 왜 이런 구석에 숨겨 뒀어?"
"저희야 모르죠. 애초에 저희들의 몸의 변이도, 상태창의 각성도 아무런 예고 없이 일어났으니까... 어쩌면 이것도 저희들의 몸을 이렇게 만든 유령 게임사의 불친절함이 반영된 걸지도 모르죠."
"그럼 내가 상태창을 각성하고도 스킬을 못 써서 팔려갈 뻔했던게, 전부 이 이용약관에 동의하지 못했던 탓이라는 거지?"
이용약관 하나 동의하지 않았다고 죽을 뻔했다니. 내가 허탈감에 휩싸이려던 찰나, 예림이가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아뇨. 이용약관 동의를 하고 나서도 스킬을 사용하시려면 나름의 훈련이 필요해요. 다들 나름의 요령이 있다는데...저는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언니도 일주일 동안 수련했는데 아까 보여드렸던 [자세] 한 가지밖에 못 써요.”
“아...”
"상태창을 각성하자마자 스킬 사용 약관 동의를 하셨어도, 바로 스킬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진 못했을 거란 소리죠."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용약관의 내용을 다시금 정독했다. 역시나 딱히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 왜 알림의 내용이 ‘판타지아 온라인 2’인 거야? 우리가 하던건 첫 번째 시리즈 아니었나?”
“아직도 그 문구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해요. 이 현실이 판타지아 온라인 2의 배경이라는 설도 있는데, 딱히 믿을 만한 증거도 없어서...그건 그렇고, 약관 동의는 하셨어요?”
“뭔가 수상한 점은 없는지 살펴봤어. 이상한 조건을 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근데 딱히 이상한 조항은 없네.”
말을 이어가며 ‘동의’라고 써져있는 칸을 클릭하니, 떠올랐던 창이 닫히고 또다른 알림들이 나타나 눈앞을 가렸다.
이용 약관에 동의하셨습니다. [스킬 사용 제한]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패시브 스킬들이 활성화됩니다.
[초월자의 신체]에 의해 각 스텟이 +10만큼 상승했습니다.
[대마법사의 증표]에 의해 마력 스텟이 +5 증가합니다.
[정령들의 친구]에 의해 원소 친화력 스텟이 보정됩니다.
[반인반룡의 신체]에 의해 마력 스텟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스킬의 사용 제한이 풀렸다는 문구와 함께, 배워 두었던 패시브 스킬들이 적용되었다는 알림들이 주르륵 올라왔다.
끝없이 떠올라 시야를 가리는 알림을 하나하나 지우는 일은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모든 알림창이 꺼지고 상태창 하나만 남고 나서야, 나는 시야를 제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다 지웠어요?”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안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길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긴, 저 녀석들도 나랑 비슷한 고인물이었으니 상시 적용되는 패시브 스킬 십수 개쯤은 돌려놓고 있었을 터였다. 이용 약관 동의를 끝냈을 때 방금 전의 패시브 스킬 관련 알림이 무수히 떠오르는 지옥을 겪어 봤겠지.
그런 그녀들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야?”
“맞아요. 그러나 스킬 사용법에 대해 배우기 전에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게 있죠. 바로 마나의 컨트롤인데...”
“이렇게 하는 건가?”
이용 약관 동의를 누른 뒤로, 계속해서 피부 안쪽을 돌아다니는 거슬리는 기운을 뽑아 손 위에 뭉쳤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푸른 빛을 띄는 빛의 구가 나타났다. 둥글게 뭉친 상태로 일렁이는 이질적인 기운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것이 내가 브레스를 쏠 때 심장 속에서 끌어다 사용한 ‘마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나의 응집체를 가지고 놀고 있다가, 주변의 분위기가 금새 얼어붙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내 옆에서 계속 재잘대던 예림이도 입을 다물고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번에?”
“거짓말...나는 일주일 노력해도 아예 안 됐는데...?”
“그럼 이 다음은, 뭘 하면 되는데?”
“마나를 뽑아내서, 그러니까 스킬의 이미지를...”
"이렇게?"
마나의 실이 손가락을 따라 선을 이루고, 그 선이 천천히 진을 형성했다.
그 진에 순수한 마나가 스며들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형성했다.
<하급 마법:="" 아이스="" 볼트(ice="" bolt)=""/>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의 고드름이 손가락 끝의 마법진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갔다.
쨍그랑
"...어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