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손잡이 두 개 달린 용족이 되었다-18화 (18/59)

〈 18화 〉 9. 배빵 '100배'

* * *

원장과 남자들의 기척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일인용 소파에 몸을 뉘였다. 푹신한 시트의 감촉이 다시금 몸을 감쌌다.

“후...”

몸에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방금 전, 나도 모르게 마법을 시전했던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최대한 긴장하지 않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진짜 총구를 눈앞에 두고 긴장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만약 마나 실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쩌지? 생각보다 총기의 위력이 더 강하면 어쩌지? 와 같은, 부정적이고 걱정 어린 생각과 감정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정확히는 그들에 파렴치한 제안에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을 시점부터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싹 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위대한 존재’로서의 우월감과 눈앞의 인간들에 대한 혐오감뿐이었다.

스스로를 위대하고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다니, 그냥 단순한 중2병 말기 환자 같지만...

'이 이질감은, 뭔가 달라. 걸리는 것도 있고...'

게임 ‘판타지아 온라인’에서 ‘위대한 존재’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대상은 단 하나뿐이었다.

­드래곤.

마법의 종주이자, 그 어떤 종족보다 거대하고 강인한 신체를 지녔으며, 수천년간 지속된 제국의 역사와 맞먹을 정도의 연륜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

특정 나라나 부족에선 신처럼 숭배되고 있을 정도로 위대하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위대한 존재’라고 지칭하곤 했다.

또한, 반인반룡으로서 절반의 피를 드래곤에게 받은 종족인 용족들은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라고 자칭하기도 한다는 설정도 있었다. 마침 내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설정이기도 했고.

그리고 이러한 용족들은 대부분 인간들을 적대시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들에게 선조 혹은 부모나 다름없는 드래곤들을 멸시하고 살해하는 종족들의 대부분이 인간이었으니. 마침, 나 역시 인간들을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적개심이 들곤 했다.

‘실제로 판타지아 온라인의 스토리 속에 나오는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전부 인간이었지.’

그러나, 이 세상에는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드래곤이 존재하더라도, 용족으로 변한 유저들은 인간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는 만큼 드래곤들을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인간이 드래곤을 죽이든 말든 인간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어 인간에 가까운 용족 유저들은 딱히 그들에게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평범한 인간들을 볼 때마다 드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역시 용족으로 변한 몸 탓인가.’

예진이나 예림이를 볼 때도, 며칠 전에 봤던 켄타우로스 유저를 봤들 때도 딱히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같은 유저로서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문제는, 평범한 인간들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우월감과 역함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벌레들을 보는 것과도 같은 기분.

마치 게임 속의 '용족들은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설정에 내 정신이 점차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자존심이 강했을 예진이도 남들에게 쓰다듬을 받는 걸 좋아하게 되었었다. 첫만남 당시에 누군가 머리에 손을 올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것을 떠올리면 꽤나 엄청난 변화였다.

이 역시 그녀가 ‘고양이 수인’으로 변한 것과 연관성이 있다고 가설을 설정하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우리들의 정신은 특정 종족으로 변한 신체를 따라간다는 건가?’

어쩌면, 이 가설이 진실이라면­ 지방에서의 반란과 폭동들은 단순한 반발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악마와 흡혈귀, 늑대인간 종족들은 모두 인간을 주식으로 삼는 존재였으니까. 어쩌면, 단순한 의식주를 얻기 위해 그런 범죄행각을 벌이는 걸지도.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자업자득, 인과응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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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맛있네.”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전골집. 알고보니 지역 주민들 사이에선 매우 유명한 맛집이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 이곳이 맛집이란 걸 알지. 몸이 변한 뒤로 인간 관계의 대부분을 끊어버린 내게는 여기가 맛집이란 것마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쵸? 저희가 인터넷으로 엄선한 곳이에요.”

자랑스럽게 가슴을 두드리며 으스대던 예림이가 옆의 빈자리를 보며 말했다.

“다만.. 언니 입맛에는 별로 안 맞는 것 같네요. 결국엔 고양이 혀라서 뜨거운 음식은 못 먹거든요. 특히 뜨거운 국물음식은 치를 떨어요.”

“아하, 고양이 혀라서 저러는 거구나...”

몇 분 전, 예진은 자신은 국물파라며 김이 펄펄 올라오는 국물을 냅다 들이켰다. 국물을 잔뜩 입에 머금고 나선 뭔가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마, 입 안에 머금은 국물이 생각보다 더 뜨거워서 당황한 거겠지. 뜨겁다고 국물을 냅다 바닥에 뱉을 수는 없으니 스킬까지 써 가며 화장실로 뛰어간 거고.

“그냥 화기 저항 버프를 걸어줄 걸 그랬나.”

당연하게도, 마법사인 나는 여러 속성 저항 버프를 걸어줄 수 있었다. 스킬 포인트를 거의 투자하지 않아 효율은 떨어지겠지만, 적어도 저렇게 입 안쪽에 화상을 입는 일은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언니도 원래 국밥같이 국물 음식을 좋아했는데, 저렇게 변한 뒤로는 아예 못 즐겼거든요. 아마 그렇게 해주신다면 엄청 좋아할걸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사라져버린 예진을 기다리며, 나와 예림이는 사이좋게 잡담을 나누며 불고기 전골을 해치웠다. 그렇게 밥 한 공기를 거의 비울 때쯤에서야 우리는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예진이가 돌아오지 않는다.

화장실은 이 건물 내 같은 층에 있다. 단순히 화장실만 다녀오는 거라면 진즉에 돌아와서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데...

“일단 나가자. 나가 보면 무슨 일인지 대충은 알 수 있겠지.”

나는 식기를 정리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예림은 그런 내 뒤를 따랐다.

“오빠, 저는 계산만 마치고 따라갈게요.”

“아, 그래. 빠르게 처리하고 나와.”

예림이에게 계산을 맡겨둔 나는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그렇게 유리문을 밀고 나온 순간, 나는 복도의 창문 바깥에 펼쳐진 얇은 마나의 장막을 감지했다.

“...결계?”

마법사들이 남들의 감각을 차단하거나,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할 때 쓰곤 하는 마법인 결계 마법이 저 창문 바깥에 펼쳐져 있었다.

나조차도 시야각 안쪽으로 들어오기 전까진 인식하기 힘든 수준의 고차원적인 인식 저해 마법이 걸려 있는 결계였다. 평범한 마법사 캐릭터가 이정도로 기운을 숨길 수 있는 결계를 만들려면 적어도 레벨이 150대는 넘겨야 가능했다.

‘내 기억상으론 150레벨의 캐릭터들은 전부 pvp랭킹 100위권 안쪽에 들었었지...’

150레벨이 넘어간다는 것은 적어도 상위 0.0001퍼센트 내에 들어가는 pvp 천상계 고인물 유저라는 뜻이었다.

무한 사냥 노가다로 레벨만 170이 넘어가는 내가 특이한 케이스일 뿐, 대부분의 랭커들은 150~160대에서 멈춰 있었다. 실제로 예진이와 예림이의 레벨은 150대였으니까.

즉, 저 결계는 150레벨 이상의 위협적인 최상위권의 랭커 유저가 펼친 결계라는 소리고, 아무래도 예진이가 밥을 먹다가 사라진 것과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진 않았다.

“그럼 부숴야지.”

­[용언 마법: 아스트라피(Αστραπ)]

상급 마법 이상의 파괴력을 지님과 동시에, 평범한 법사 캐릭터라면 한 번 쓰고 방전될 정도의 마나 소비량을 지닌 용족 전용기 ‘용언 마법’이 캐스팅되었다.

마나의 실이 기존의 마법진의 형태를 깨부순, 난잡함과 동시에 그 어느 마법진보다 효율적인 통로를 구성했다.

평범한 인간의 뇌로는 이해조차 불가능한 고대의 글자들이 실을 따라 진 위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러한 고대 글자들은 시전자의 몸에서 마나를 흡수하고 크기와 영향력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초월적인 마나를 응축한 마나의 실이 기존의 푸른 형상을 잃고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통제하는 실의 내구도가 한계에 달했을 때쯤, 필요한 마나를 모두 흡수한 글자들이 시전자의 손바닥 앞에 나열되었다.

용족, 그 중에서도 현자의 경지에 다다른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고대의 마법진이 완성된 것이다.

붉은 마법진은 응축된 마나를 뇌전의 형상으로 분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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