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9. 배빵'100배'
* * *
“에퉤퉷.”
고양이 혀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뜨거운 국물을 뱉어낸 예진은 발작적으로 찬물을 틀어 입을 헹궜다. 수인 특유의 회복력이 발동해 얕은 화상 부위를 새로운 살갗들이 덮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으...이게 무슨 꼴이람.”
뜨거운 국물은 고양이 수인인 그녀에겐 너무나 먹기 힘든 부류의 음식이었다. 사실 살살 불어 먹으면 평범하게 먹을 수 있긴 한데, 음식이 좀 늦게 나와서 허기진 배를 빠르게 채우려다가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세면대의 거울에 비친 꼴사나운 모습에 자조하던 예진은 아파오는 머리에 이마를 짚었다.
‘젠장... 오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일부러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맛집까지 상세히 알아봐서 데려왔다. 보아하니 인터넷이나 주변 주민들에게 맛집으로 유명한 만큼 겨울오빠 역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다음으로 할 일은 간단했다. 오빠가 밥을 다 먹기 전에 몰래 나와서 내 카드로 식비를 결제한 다음, 자신이 계산했어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오빠에게
그럼 다음에 오빠가 한번 밥 사.
라고 ‘다음 데이트’의 떡밥을 던지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예정이었다.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이 쓸모없는 고양이 혀가 다 망쳐 버렸다. 나이가 몇인데 뜨거운 국물 잘못 마시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여자라니. 오빠에게 다음 약속은커녕 종지 않은 인상이 박혔을지 걱정이었다.
어쩌면 이런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연애 대상이 아닌 단순히 챙겨줘야 하는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꼬시는 게 잘 안되면... 어쩌겠어. 강제로 하는 수밖에...'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이라도 저 안에서 평화롭게 식사를 하고 있을 오빠를 붙잡고 러브 호텔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 다음엔 강제로 덮친 다음 그 뿔을 잡고
핑크빛과 살색으로 뒤덮인 그 상상에 예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마 그 곁에 소중한 동생만 없었다면 실제로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빠도 이런 식으로 강제로 해버리는 걸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도 그럴 것이, 예진은 자신의 외모의 파괴력을 아주 잘 실감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길가를 걸어가고 있으면, 유저의 사회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몇몇 남자들이 번호를 따기 위해 다가올 정도였으니...
때문에 그녀는 제 외모가 과거에 남자였던 오빠에게도 나름 잘 먹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강제로 해버려도 오빠도 좋아하지 않을까? 강간순애, 최면 조교 순애라는 말도 있잖... 하, 아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흠흠, 예진은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누가 범죄자 될 일 있나, 그런 미친 짓을 현실에서 실천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냉수마찰을 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붉은 피부에 자괴감이 들어 머리를 세면대에 박고 있었을 찰나, 예진은 근방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다. 근접 직업군 특유의 민감한 기감에 잡히는 기척은 분명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마 마법사 유저가 [비행]스킬로 하늘을 날아 이동하는 중일 것이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예진은 딱히 그 기척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스킬들을 배운 유저들이 늘어나, [비행]이나 [헤이스트]같은 장거리 이동에 용이한 스킬들을 사용하는 유저들을 종종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물기를 닦아내며 화장실에서 나온 예진은 식당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통해 이동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춘 것은, 초인적인 기감에 잡혔던 마법사 쪽에서 이상한 마력의 흐름을 감지한 순간이었다.
복도에 나란히 나 있는 창문 밖으로,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오.”
창문 밖에는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는 외뿔의 여자가 마법 스킬을 캐스팅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나를 다루는 실력도 뛰어나고, 스킬의 레벨 역시 매우 높아 보였다.
꽤나 고인물에 속하는 유저였다. 왜 저기서 일반 시민들에게 마법을 캐스팅하는진 모르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일반 사람들이 죽던 말던...잠깐.’
이 식당 건물은 기본적으로 목조 건물이다. 거기에 아무래도 낌새를 보아하니 저 여자가 캐스팅하는 스킬은 불 속성 마법처럼 보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범위가 넓은.
‘잘못하면 우리도 휘말릴 수 있겠는데.’
예진은 현제 딱히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고 있지 않았다. 예림이나 오빠도 마찬가지였다.그러므로 당연히 저 유저도 같은 유저인 사람들이 이 건물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일부러 저런 광범위한 스킬을 사용한다고?’
잘못하면 소중한 동생, 오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방해받을지도 모른다. 예진은 그 마법사에게 경고를 해주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주먹이 가슴팍 앞에서 경쾌하게 부딫히고, 파이터 특유의 붉은 투기(?)가 온 몸을 감싸며 타올랐다.
증가한 스텟만큼 그녀의 존재감이 증폭되었다.
!!
일반인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선명한 투기에 그제서야 이쪽을 바라봐주는 마법사.
외뿔에 흑발, 그리고 붉은 눈을 지닌 마법사가 경악한 표정으로 예진을 응시했다.
‘마음에 드는 표정...’
츄릅, 하고 입맛을 다신 그녀는, 창문 밖에 떠 있는 상태로 캐스팅을 멈춘 마법사를 찬찬히 훑어봤다.
진한 흑발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환상적인 볼륨감 있는 몸매.
예진 자신도 나름대로 그쪽 크기엔 자신이 있었지만, 눈앞의 악마족 마법사와는 비교가 불허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끌리게 만드는 요소는 바로...
배를 완전히 까고 있는 크롭티와 얼핏 보면 속옷만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핫팬츠.
즉,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서큐버스구나.’
서큐버스. 그들의 종족 특성은 [노출광]. 신체의 노출도가 올라간 상태에서 정도 이상의 시선을 받으면 강해진다. 다만, 노출도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몇몇 장비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었지.
아마 눈앞의 여자 역시 추가 스텟의 효과를 받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저런 옷차림을 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은 겨울이고, 아무리 유저가 추위와 더위에 강하며 보온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지만 저런 반쯤 발가벗은 옷차림을 하고 다니진 않았다. 서큐버스 유저들을 제외하면.
“에라 모르겠다!”
속으로 그녀의 옷차림을 품평하고 있는데, 그 찐득한 시선이 오해를 산건지 마법진의 목표 대상이 이쪽으로 변했다.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여성 마법사는 캐스팅을 끝마쳤다.
발동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마법진이 발광하며, 거대한 불덩어리를 뱉어냈다.
[상급 마법: 헬파이어(Hellfire)]
“오, 좀 하는 친구였네?”
대마법사, 그러니까 최소 현자 이상에 올라야만 사용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마법에 예진은 감탄사를 흘렸다.
“어쨌든 간에, 이건 네가 먼저 공격한 거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전부 정당방위니까...”
각오해.
예진, 즉 유저 ‘배빵성애자’의 시선은, 눈앞의 마법이 아닌 대놓고 드러난 마법사의 하얀 배꼽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순한 엔조이는 바람 피는 게 아니야. 그렇지 오빠?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들도 야동을 보잖아? 그러니까... 이건 그냥 단순히 우리를 다칠 뻔하게 한 여자를 혼내주는 거야.’
스스로 합리화를 끝마친 그녀는 가볍게 주먹을 허공으로 내밀었다.
[파쇄격(???)]
거대한 충격파의 형상이 거대한 불꽃과 맞부딫혔고, 이내 거친 풍압을 발생시켰다.
[파쇄격]. 마법 스킬의 피해를 경감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만, 정확한 타이밍에 사용하면 마법 자체를 말 그대로 파쇄해버릴 수 있는 고난이도의 파이터 전용 스킬.
말도 안 되는 반응속도와 민첩 스텟을 가지게 된 그녀에게, 그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파쇄격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거친 풍압으로 일어난 먼지가 가신 허공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타올랐던 불꽃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