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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 두 개 달린 용족이 되었다-21화 (21/59)

〈 21화 〉 9. 배빵 '100배'

* * *

얼굴을 붉히며 옷차림을 가다듬는 예진과, 그녀의 앞에 허리를 새우처럼 웅크린 채 쓰러져 있는 서큐버스 유저 한 명.

그리고 그들의 주위로 서큐버스 유저와 같은 자세를 한 채 바르작대고 있는 각종 소환수들까지.

한바탕 전투를 하고 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결계 안쪽에 있던 여러 구조물들은 반파되었고, 그 근방에는 마법으로 형성된 유사나 늪, 독액 등이 흐드러져 있었다.

“오, 오빠? 이건...”

결계가 깨진 걸 알아챈 예진이 이쪽을 보며 펄쩍 뛰었다. 엄청나게 놀란 것 같은데, 뭔가 크게 잘못이라도 한 건가?

“저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그러니까...”

“먼저 시비를 걸어서 싸웠다고? 그거야 뭐 정당방위니 잘 한 일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무슨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아, 아니에요.”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을 얼버무리는 괴상한 반응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저쪽에서 시비를 걸고 먼저 공격해서 받아쳤다는, 지극히도 정상적인 상황인데 왜 저리 당황하는 건지.

자세히 보니, 그녀의 얼굴이 열이 오른 듯 붉어져 있었다. 어디 아파서 그러는 건가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가며 질문했다.

“얼굴이 좀 빨갛긴 한데, 혹시 열이라도 있어?”

그녀의 앞까지 다가간 나는 까치발을 해 예진이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열이 느껴졌다. 나는 이내 그 열의 근원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황금빛 기류. 분명 저건 스킬 <관음수>를 사용하고 나면 생기는 이펙트였다.

pvp를 할 때마다 자주 보여서 잘 알고 있는 스킬이었다. 실제로 예진이의 주력기 중 하나이기도 했고.

“<관음수(?音手)>는 아직 못 쓴다고 하지 않았어? 무리해서 스킬을 써서 열이 나는 거 아니야?”

실제로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소모되는 마나나 기를 과하게 사용하면 몸에 열이 오르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증상이 있었다. 그게 과하면 피를 토하거나, 내상을 심하게 입기도 했다. 저번에 브레스를 쏘고 나서 걸린 적이 있던 '마나 과부하' 역시 이런 증상들 중 하나라고 들었었다.

아마 기를 과하게 써서 열이 나고 있는 거라면... 어쩌면 내상까지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피를 토하거나 속을 아파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그정도로 무리를 한 것 같진 않은데...

"혹시 속이 아프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만약 통증이 느껴지면 꼭 병원에 다시 가야 하니까..."

“그, 그게...”

진심으로 걱정해서 말해주는 건데, 제대로 듣고 있긴 한 건지 예진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웅얼거렸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그녀의 열을 식혀주기 위해 허공에 얼음을 소환했다.

“일단 열 좀 가라앉게이거 대고 있어. 나는 주변을 위험하지 않게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테니까... 예림이는 저 서큐버스 유저랑 소환수들 좀 적당히 치워 두고.”

“적당히 기절시켜서 한쪽에 몰아놓을게요.”

예림의 대답을 들은 나는 <비행>스킬을 사용해 하늘을 날았다.

막연히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한 시내는 생각보다도 더 엉망이었다. 유사를 바람으로 치워내고, 독액을 소각한 다음 늪을 얼음 마법으로 통째로 얼려 버렸다.

그런 식으로 여러 스킬들을 활용해 위험할 법한 마법의 흔적들을 치워낸 뒤, 남은 것은 반파된 다른 구조물들이었다.

원래는 아름다운 위인들의 조각이 서 있어야 할 분수대는 조각상의 다리만 남긴 채 비틀린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로수들은 하나같이 타거나 부러진 상태에 다른 건물들에서 떨어진 콘크리트 가루들이 인도 차도 가릴 것 없이 가득했다.

“그래도 결계를 쳐서 민간인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게 다행이네.”

저렇게 부서져 버린 구조물들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로에 굴러다니는 콘크리트 가루만 적당히 치워낸 나는 남은 일들은 시청 공무원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오빠! 전부 다 처리했어요!”

“잘했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예림이 쪽으로 정확히 착지한 뒤, 빌딩의 긴 벽면에 한명 한명씩 눕혀져 있는 유저와 그녀의 소환수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다들 하나같이 배에만 상처가...”

움찔.

“...?”

두 사람이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둘 다 얼굴이 다시 붉어지는 게 참 수상했다.

그 수상한 모습에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고민을 하던 도중, 문득 전에 기억해내지 못했던 그녀의 닉네임이 떠올랐다.

“야, 예진아.”

“네? 아, 아니... 응?”

“네 게임 닉네임이...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뭐였더라?”

전에 그녀의 닉네임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해봤을 때도 그랬듯,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을 접은지만 한참이 지났으니까.

“기억 못하세요?”

“아무리 익숙해졌던 닉네임도 일 년 넘게 안 보면 가물가물해지더라. 원래 내가 기억력이 좀 안좋아서 그런 것도 있고.”

“ '예진겅듀'였잖아. 이걸 기억 못해주네.”

“아 맞다, 그거였지? 근데 중간에 한 번 닉변하지 않았었나? 이벤트로 뿌린 닉변권으로 잠깐 닉네임 바꿨었잖아.”

“아니? 그런 적 없는데.”

그런가?

나는 예진의 단호한 부정에 수긍했다. '예진겅듀'라는 닉네임은 내 기억 속 예진의 닉네임과 완벽히 일치했으니까. 중간에 닉네임을 변경했다고 해서 별 특이한 이름으로 바꿨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친절하고 착한 동생이었으니까.

­­­­

예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예진은 자신의 상태창의 맨 윗줄에 적나라하게 쓰여 있는 닉네임을 응시했다.

[배빵성애자]

사실, 예진겅듀라는 닉네임은 게임 내에서 처음으로 오빠를 만난 직후에 대충 바꾼 닉네임이었다. 오빠와 초면이었을 당시에는‘배빵성애자’라는 닉을 쓰고 뉴비제초기 행세를 하고 다녔었다.

오빠가 자신을 이상하게 볼까 걱정된 예진이 닉네임 변경권을 사용해 바꾼 닉네임이 바로 예진공주였고.

‘그리고 오빠가 게임을 접은 이후로 다시 바꿨었지...’

오빠가 게임을 접은 이후론, 오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꾼 평범한 닉네임을 고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원래 닉네임으로 바꾸고, 악질 행세도 다시 시작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예진은 자신의 선구안에 감탄했다.

‘만약 오빠가 배빵성애자라는 내 닉네임을 알고 있었으면...’

아마 지금 저 소환수들의 배에 난 멍들을 보고 날 의심했을테고, 난 변태에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 여동생으로 오빠의 머릿속에서 낙인찍혔겠지.

그렇다면 오빠와의 정상적인 연애와, 거기서 이어지는 뜨거운 잠자리 sm플레이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되고,

남는 방법은 납치감금조교 뿐이었을 터.

예진은 범죄자가 되는 길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기에, 납치감금조교는 제일 마지막의 방법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물론 이는 범죄자가 되더라도 겨울의 저 하얀 도화지같은 배에 붉고 푸른 멍을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그녀의 위험한 시선을 받는 사냥감은, 자신을 노리는 사냥꾼의 존재를 모른 채그저 멍하니 자신의 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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