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11. 회상
* * *
영하의 날씨에 아무것도 입지 못한 채 나는 거리를 헤메었다.
집 앞에서 버티고 있어봐야 굳건히 닫힌 현관문이 열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점차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누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내 모습을 볼까 두려웠지만,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만 같으니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졸려.’
더 이상 몸이 떨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따스한 기운이 몸 안에 감도는 느낌.
천천히 눈이 감기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가까이에 있던 벤치 위에 누웠다. 몽롱하면서도 헤롱헤롱한 기분이 지금의 내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서야, 나는 그런 증상들이 극심한 저체온증으로 맛이 가버린 뇌가 신체의 상태를 오판해 일어나는 증상이란 걸 깨달았다. 한마디로 얼어 죽기 직전이었단 뜻이었다.
아마 우연히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그 상태로 얼어 죽었을지도.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 아저씨는 이내 구급차를 불렀고, 나는 구급차에 실려가며 멍한 정신으로 구조대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왜 이런 날씨에 옷을 입지 않고 밖에 나온 겁니까?]
[...집에서 쫒겨났어요.]
[보호자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겠습니까?]
보호자는 필요 없다고, 나는 성인이라고 수없이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이 날 믿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 겉모습이 잘 쳐 줘 봐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애의 형상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저희 측에서 여러 조치를 취하려면 보호자님의 연락처가 필요합니다.]
[...이젠 없어요.]
[네?]
[보호자, 없다구요.]
부모님의 전화번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장이래도 외우라면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날 집 밖으로 내보낸 것도, 이렇게 얼어 죽기 직전까지 만든 것도 그들이다. 내가 여기서 부모님의 연락처를 입 밖에 내어 봤자, 그리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았다.
차라리 가족들이 식칼을 들고 와서 날 찌르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죄송합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사과와 함께, 구급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입가에 끼워진 산소호흡기의 어색한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로만 알았다.
병원 침대 옆에서 과일을 깎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다른 가족들이었다.
[어, 엄마..?]
[일어났구나, 겨울아.]
그녀는 나를 향해 웃으며 토끼 모양의 사과 한 조각을 내밀었다.
이 순간이 꿈이라면, 최대한 오랫동안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사과를 한 입 깨물었다.
달콤했다.
너무 달아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겨울아, 주교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회개해서 구원받을 방법이 하나 있다고 하시더구나.]
[맞아. 네가 회개하고 반성한다면 ‘인간’으로서 인정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정말요?]
[당연하지. 다만 이건 네 노력 여하에 달렸단다.]
나를 믿는다는 듯 어깨를 토닥이는 아버지를 향해, 나는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열심히 할게요.]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아니, 이젠 딸인가?]
그의 능글맞은 농담에 가족들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었다.
되도록이면 아들로 취급받고 싶었지만, 딸이라고 불려도 마냥 좋았다.
유치원 시절 불렀던 동요처럼, 가족들과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누나? 지금 뭘 하는 거야?”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부모님은 내게 몸을 깨끗이 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 위해 나는 욕실로 들어왔고, 자연스럽게몸을 씻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바뀐 몸을 보니 자꾸 얼굴이 홧홧해졌다. 때문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최대한 무시하면서 샤워에 열중하고 있는 도중,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등 뒤를 돌아보니, 그 곳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누나가 서 있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꼬맹이 시절 딱 한 번 봤던 누나의 몸은, 그때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복부와 허리, 그리고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완벽에 가까운 몸매.
그녀가 학생 시절 괜히 무슨무슨 데이가 있을 때마다 간식을 가방 한가득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멍하니 그런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자, 잠깐...”
“씻겨 줄 테니까 얌전히 있으렴.”
언제나와 같은 고저없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나는 버둥거리던 팔다리의 움직임을 멈췄다.
“...읏.”
“간지럽거나 아프다면 바로 말해.”
그렇게 말한 누나는 천천히 내 몸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녀의 손길을 만끽했다.
누나는 익숙한 듯 길어진 내 머리를 감겼고, 온 몸에 비누칠을 했으며, 샤워기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비누를 씻어 내었다.
나는 등 뒤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그녀의 손길이 몇몇 민감한 곳을 스칠 때마다 부도덕적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끝났어.”
샤워를 끝낸 후 머리칼을 말리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간단한 화장까지 끝낸 내 모습은...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정말로 아름다웠다.
“...미리 말할게, 겨울아.”
“응?”
“미안해.”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사과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누나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며 자리를 떴다.
그 미안하단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나는 가만히 거울 앞에 앉아 고민했으나, 딱히 생각나는 바는 없었다.
‘나를 집 밖으로 내쫒아서 미안하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가족 중 유일하게 내게 욕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은 사람이 바로 누나였다. 사과를 하려면 우선 부모님과 동생에게 받아야 이치가 맞을 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항상 착하고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지만,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인 만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누나의 유일하다시피 한 단점이었다.
“겨울아! 다 씻었으면 나오렴!”
바깥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 나갈게요!”
밖으로 나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비워진 넓은 거실과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들이었다.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을 소파와 티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대신 커다란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불은 전부 꺼져 있고, 야릇한 분위기를 띄우는 촛불이 흐릿한 불빛만을 밝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누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 이리 와서 누우렴.”
아버지의 손짓에 나는 그의 곁에 따라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이걸 마신 뒤, 그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된단다.”
“주교님이 그러시길, 이걸 마시고 잠에 들면 악령이 몸에서 빠져나가 순결한 몸이 된다고 하셨어.”
각자 한 마디씩 거드는 가족들을 보며,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알 수 없는 액체로 가득한 잔을 비웠다.
“우리는 오늘 외박할 테니까, 편하게 잠들렴. 할 수 있지? 착한 아들이니까.”
아빠는 그 말을 남긴 채, 다른 가족들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저 멀리서,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참을 수 있었다. 착한 아들이니까.
...라고 생각했다.
주교의 손에 들린 것이, 딜도가 아니라 거대한 톱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