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12. 재회
* * *
원래는 두 명의 권투 선수가, 서로의 실력을 뽐내며 경쟁해야 할 거대한 팔각형의 링 위.
그곳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과,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여성이 올라서 있었다.
심판은 호각도, 심판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시작!”
외뿔의, 키만 3m에 가까운 괴물이 여성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윽.”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한 채,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여성.
“왜 그래? 네가 날 이기면, 저기 있는 사람들도 전부 풀려난다니까?”
괴물은 여성의 허벅지만한 손으로 링 바깥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외모가 수려한 편인 여성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종종 끼어있는 잘생긴 남성들까지.
전자는 길드 내의 남성 유저들을, 후자는 여성 유저들을 위한 장난감이었다.
비록 이 근방이 죄다 농지나 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개발이 되어 있는 시내 쪽으로 가면 젊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긴 했다.
“꼴에 물은 또 좋단 말이지.”
코앞에서 주저앉아버린 여자의 얼굴을 감상하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못 이기겠다면...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겠지?”
“히, 히익!”
그녀보다 전에 이 링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두 눈으로 보아 왔던 여성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딱 한 번. 딱 한 번만 버티면 합격이야. 알지? 네가 네 입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 거니까”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버텨.
그런 의미의 속뜻을 내포한 당부를 한 그의 손이, 여성의 몸 위아래를 훑기 시작했다.
여자는 체념한 듯 그의 손길에 몸을 기댔고, 그녀의 기대에 응하듯 그의 거칠었던 손길이 한결 유해졌다.
“흣, 흐윽.”
그녀는 공포를 차마 이겨내지 못 한 듯 패닉에 빠져 훌쩍이기 시작했고, 신음과 울음이 반반씩 섞인 여자의 모습에 관중들은 더더욱 흥분했다.
잘한다! 더 울려! 더 애태워!
감질나게 하지 말고 그냥 박아!
그런 관중들의 응원 속에, 더 이상 참지 못한 괴물이 그녀의 허리춤을 잡아들었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했다.
여성의 외마디 비명을 배경음 삼아, 그는 잡은 그녀의 허리춤을 그대로..
“더 이상 못 참겠”
와장창.
관중의 이목이 링 위의 괴물에게 집중되어 있던 순간, 경기장 뒤편의 유리창이 깨지며 파편이 관중들의 좌석 위로 비산했다.
“꺄아아악!”
“콜록, 이게 무슨!”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사태에 괴물은 물론이고 그에게 들려 있던 여성마저, 먼지로 가려진 박살난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안녕, 우진아?”
무대 위의 외뿔의 괴물. 그의 본명은 그와 가장 친밀한 길드원들조차 마음대로 부를 수 없었다.
과거의 이름은 버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헬반도]의 간부 ‘외뿔’은 이전의 핍박받던 시절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도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본명을 부르거나, 그가 핍박받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은 그와 반강제적으로 결투를 해야 했고, 길드의 다른 간부 몇몇을 제외하면 결투에 들어선 모든 유저들은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분노 어린 주먹에 일방적으로 맞아야만 했다.
“...한겨울?”
그런 간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존재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의 이름까지 친근하게 불렀다.
“오랜만이야.”
먼지와 유리 파편이 가라앉자, 유리창의 거대한 구멍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인영을 모두가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뿔, 그리고 용의 눈이라 불리우는 황금빛의 눈동자. 마지막으로, 하얀 백발과 용족 특유의 오만함에 가까운 허영심 가득한 목소리.
“...전 랭킹 3위..?”
링 주변의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밧줄에 묶여 있는 일반인들을 제외하곤 전부 유저였다.
그런 그들이, 마법사 그것도 물몸 중의 물몸이자 쓰레기라고 불리곤 했던 원소 마법사 직업으로 pvp 랭킹 3위권까지 도달했던 유명인의 캐릭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단순한 놀라움과 황당함으로 인한 교착 상태는 수초 가량의 짧은 순간을 마지막으로 끝을 맞이했다.
[헬반도] 길드는 기본적으로 쟁, 즉 길드전을 위주로 플레이하는 길드였다. 당연히 그들은 다대 다, 혹은 다대 일 상황일 때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스킬을 배분하고 사용해야 하는지 숙달된 유저들이었다.
당연히, 나름 유명한 상위권 길드인 만큼 개개인의 능력도 하나같이 뛰어난 편이었다. 당장 그들의 길드원 중 한 명인 혜원이만 해도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방심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고작 수 초 만에 전사 직업 유저들이 전열을 갖추고, 암살자와 궁사는 기습 공격을 위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전사들의 뒤로 을 통해 이동한 마법사들의 9할은 견제용 마법을 내게 겨누었다.
막거나 피하기엔 뭐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으면 거슬리는 각종 하급 마법들.
그리고 나머지 1할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엘리트로 보이는 이들은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고위 마법 스킬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현실 속 군대와도 맞붙은 적이 있는 길드원들 다웠다. 실전 경험이 나와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많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일방적인 상황이었다면, 나는 아마 일 분도 채 못 버티고 쓰러졌을 것이다.
비록 내가 저쪽 유저들 개개인보단 스펙도, 게임 내의 pvp경험도 더 많다지만 그만큼 사람 수의 차이와 현실 속에서의 실전 경험은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잠깐!”
김우진, 이곳에선 외뿔이라고 불린다는 듯한 녀석이 외치자, 객석 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그 틈에, 객석의 구석에 몰려 있는 알몸의 사람들과 녀석의 손에 잡혀 있는 여자의 얼굴을 쓱 스캔했다. 다행히도, 누나는 이곳엔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녀석을 돌아보자,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한겨울. 오랜만이라 반갑긴 한데... 왜 왔어?”
“왜 왔냐니. 난 여기 오면 안 돼?”
“안 돼. 여긴 우리 길드의 구역이라고. 이곳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유저들은 우리들에게 간섭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중립적인 유저들이나, 우리 길드원들밖에 없어.”
그는 다시금 숨을 고르더니, 붙잡고 있던 여자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 주며 덧붙였다.
“너는 그 중 전자, 후자 둘 다 속하지 않는 유저 같은데.”
그렇게 이야기하며 링을 가뿐히 뛰어넘은 그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거대한 근육질에 땀 냄새, 그리고 같은 남자였던 자로서,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알 수 있는 선명한 밤꽃 향까지.
나는 두 눈을 가리며 말했다.
“...일단 옷 좀 입고 와 주지 않을래?”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여전히 어딘가 덜렁거리는 모습이 남아 있었다.
...일단 옷 좀 입고 와 주지 않을래?
앗, 미안. 그래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에 한 번 안아 보려고 했는데, 옷을 안 입고 있는 걸 깜빡했네.
방금 전의, 웃기지도 않는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자신이 옷을 전부 벗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나는 평범한 회사의 사무실로 보이는 방의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방 안으로 찾아왔고, 나는 그의 여전한 패션 센스에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겨울에 저런 하와이안 풍의 반팔 셔츠를 입는다고?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잔소리를 해대며 옷을 갈아입혔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낭비된 시간도 충분히 아까웠다.
“할 이야기가 있어. 나한테 누나가 하나 있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지. 너랑 내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 누나가, 너희 길드에 잡혀갔다고 들어서. 친동생인 내가 말하기엔 뭣하지만, 우리 누나는 나름 예쁘고 인기도 많은 편이었거든. 그래서 걱정되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야.”
“너, 가족이랑 전부 인연 끊고 지냈다고 하지 않았었나?”
내 몸이 바뀐 뒤로도 쭉 연락을 이어갔던 몇 안 되는 친구인 만큼, 그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이 많았다.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다른 가족들과는 다 연을 끊었지만 누나와는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았어. 명절에는 선물도 받았었고.”
“음... 무슨 일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네. 그래서, 네 누나를 찾아서 빼내 달라는 소리지?”
“맞아. 가능하겠어?”
“...아니, 안 되겠는데.”
“...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나는 저도 모르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위쪽의 지시를 몇 시간 전에 받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무슨 지시?"
"자신의 누나를 찾는 용족 유저를 생포해 오라는 지시."
그의 말을 듣고 방 바깥에서 느껴지는 유저들의 기운을 깨달은 나는, 재빨리 마법을 캐스팅하려 했으나,
"붙잡아."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방 안의 거울에서 튀어나온 회백색의 사슬이 내 몸을 휘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공격에 집중이 깨져, 캐스팅 중이던 마법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이건 사람이 캐스팅하는 마법이 아니다.
미리 특정 사물에 마법을 걸어, 간단한 한 단어의 주문만으로 마법이 발동하게 하는 일종의 함정 마법 계열의 스킬이었다.
그리고 이걸 미리 준비해뒀다는 것은, 그가 나를 일부러 이 방에 데려왔다는 뜻이 되었다.
"이게 무슨"
내가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주먹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내가 진심으로 널 반가워한 줄 알았어? 넌 날 아직도 덜렁거리는, 패션 센스도 최악인 사람으로 알았겠지."
그건 전부 네 방심을 유도하고, 널 이쪽으로 데려오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어.
강렬한 충격이 머리를 관통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길드 [헬반도]는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방식을 길드 내의 규율로 채택한 길드다.
가장 강한 사람의 말이 곧 법이고, 가장 강한 사람이 곧 길드의 장이다.
그리고 그들의 길드장이 바뀐지는,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모든 간부들을 압도한 두 여성 유저, 그녀들이 길드장이 되자마자 내린 지시는 단 하나뿐이었다.
뭐든지 마음대로 해. 대신, 누나를 찾는다는 여성체 용족이 찾아오면 생포해서 우리 앞에 데려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