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13. 양학
* * *
“후후후...”
예진은 좁은 창고 안에 팔다리를 묶인 채로 제압당한 겨울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예진을 바라보던 예림은 창문 바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들은 어떡할 거야?”
헬반도의 전 길드장은 미노타우로스 종족이었다. 3m를 넘는 거구에 소의 머리, 그리고 거대한 뿔을 지닌 신체에서 뿜어져나오는 위압감은 길드 내의 어떤 유저든 그에게 도전하는 것을 꺼리게 했다.
유저든 인간이든, 위협적으로 보이는 존재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본능에 각인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귀엽고 순해 보이는, 고양이 수인이 그 미노타우르스를 이기고 길드장이 되었다.
여리여리하고 호리호리한 몸,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만만해 보이는 귀여운 외모.
그 전까지 [길드장] 자리를 탐내고 있었지만, 미노타우로스 유저 덕택에 포기하고 있었던 몇몇 간부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쫄려서 안 나오는 거냐?
당장 나와서 한 판 붙자!
혹시 쟤네가 언질도 없이 도망가면 내가 길드장이다!
창문 밖에서 농성 시위를 하듯 고성방가를 해대는 세 명의 유저. 간부들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강자라던데, 예진의 눈에는 그저 귀찮은 잡몹 123으로 보였다.
“상대해줄 가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럼 가서 쓸어버리고 오든가. 이번엔 내 도움도 필요 없어 보이네.”
“하다못해 그 미노타우로스 유저나 혜원이 정도 수준만 되어도 진심으로 싸워 줬을 텐데 말이지...”
미노타우르스는 맷집도 상당히 강하고, 전투 센스도 있어서 붙어볼 맛이 났다. 스킬 분배를 잘하던 혜원이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러나 그 두 사람과는 달리, 저 세 명은 전투 담당이 아니라 성에 차지 않았다. 아마 부하에게 듣기로 각각 예산 분배를 맡은 간부, 길드원 관리를 위한 간부, 그리고 식자재 조달을 맡은 간부라고 했었나.
확실한 건, pvp유저들 사이에서 유명한 예진의 캐릭터의 얼굴을 모르는 걸 보면 확실히 약골일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투기장에 발을 들였으면, 적어도 탑탠 랭커의 얼굴은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예진은 창 밖에서 시끄럽게 굴어대는 세 유저를 바라보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적당히 강해야 괴롭히는 재미가 있는데, 저들은 주먹질 한 번에도 뻗어나갈 것처럼 보였으니.
“그래도 귀찮잖아? 다시는 까불지 못하도록 판이나 벌려 놔. 수백명 앞에서 여러모로 농락당하면 결국 포기하겠지.”
“그런가?”
예림의 제안에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예진은 창 밖의 난장판을 보더니, 결국 수긍했다.
“확실히 한 번씩 확실히 패 놔야 말은 잘 듣겠네.”
“그럴 줄 알고, 몇몇 간부들에게 판 벌려 놓으라고 했어. 1대 3으로도 여유롭지?”
“그래그래. 금방 패고 다녀올게.”
아무런 의심 없이 창고 밖으로 나서는 예진을 보며, 예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미안... 나는 괴롭히는 것보단, 이쪽이 더 좋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로, 새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날도 추우니 뜨거운 헬파이어 한두 방씩 맞는 것도 기분 좋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자신이 애용하던 식칼을 들었다.
파쇄격. 기본적인 방어 마법을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킬이었다.
한우진, 그 녀석이 파이터이자 파쇄격을 주력기로 쓴다는 것을 신경쓰지 않았던 내 잘못이었다.
아무리 과거에 친했던 사이더라도, 세상이 이렇게 뒤바뀐 이상 그렇게 쉽게 믿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아직도 마법과 스킬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감각이 제대로 안 돌아온 것 같았다.
“후우, 그런데 왜 아무런 주박이 안 걸려 있는 거지?”
대부분의 유저들은 기본적으로 나보다 훨씬 철저한 성격이었다. 특히나 대형 길드를 이끄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그들이, 그것도 거대 길드의 치밀한 성격의 간부진들이 마법사를 생포했을 때,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여러 지장이 생기는 디버프를 걸어놓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비유하자면 붙잡힌 테러범에게 총을 들려 준 채로 이송하는 군인과도 같은 일이랄까.
하다못해 팔다리라도 자유자재로 못 움직이게 묶어 둬야 할 텐데, 지금 보니 내 몸을 묶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밧줄은 전부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뭐지.’
각종 딜도, 로터, 삼각목마에 심지어 물고문 기구로 보이는 수도관까지.
아마 이 방의 주인이 마법사에게 기본적인 주박조차 걸어 놓지 않는 멍청이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떤 꼴을 당했을지는 명백해 보였다. 이런 비정상적인 취향의 강간범에게 내 신변을 넘기다니, 옛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다시는 누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그 성적인 용도로 쓰였을 꼴도 보기 싫은 기구들을 소각해 버렸다.
“...아무도 없네.”
화염계 마법을 통한 소각 절차를 끝낸 뒤, 기감을 키워 주변을 살폈다.
길드 간 쟁을 할 때나 쓰이는 색적용 탐지 스킬까지 돌렸는데도 나오는 인기척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이 창고 건물 내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 대신, 수 킬로미터 바깥에는 수천 명 가량의 인파가 모인 듯한 거대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헬반도]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 및 유저들은 저 쪽에 모여 있는 듯싶었다.
“예진이랑 예림이도 저쪽에 있나 보네...”
거대한 기척 하나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세 명의 상대방을 농락하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pvp랭킹권 내에도 몇 명 없는데, 아마 상황 상 예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내 사연을 전부 적은 메시지를 보내뒀으니, 아마 연락이 끊긴 걸 보고 나를 구하러 온 것이리라.
나는 랭킹 2위였던 그녀라면 웬만한 적들에겐 위협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며, 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었다.
“그래도 랭킹권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인데... 요즘 너무 당하고만 사는 것 같네.”
사실, 마법사들은 원래부터 기습에 약했다.
모든 마법사들의 이명이 ‘준비된 자’라는 설정처럼, 그들은 만전의 상태가 아니라면 타 직업군보다 전투의 효율이 떨어졌다.
기본적으로 주력기인 상급, 초위 스킬들을 메모라이즈 해 둬야 함은 기본이고,
마나 실드같은 방어 스킬들을 미리 완비해 두어야 하며,
버프 스킬 역시 몸이 버텨낼 수 있는 대로 사용해야만 근접 직업군과 1대1이 성립했다. 괜히 마법사들이 암살자들을 혐오하는 게 아니었다. 열심히 버프 마법을 걸던 도중에 암살자들이 나타나면 눈 딱 감고 찾아올 죽음을 기다려야 했으니까.
애초에 마법사는 다대일, 혹은 다대다 상황에 특화되어 있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직업의 한계였다. 이런 단점 탓에, 일대일 승부를 즐기는 많은 유저들이 마법사 직업군을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 둘 시간만 주어진다면 마법사는 원거리도, 근거리도 상대할 수 있으며, 일대일, 대대일 등등 그 어떤 상황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사기 캐릭터가 된다는 소리였다.
‘실제 전장이나 pvp구역에선 그럴 수 없긴 하지만...’
수십, 수백 명이 각자의 편에 서서 싸우는 전장이나, 지나가는 모든 플레이어를 공격할 수 있는 특정 구역에선 저런 식으로 마법사들이 준비를 하는 도중에 암살자들의 칼이 먼저 찔려 들어온다.
그러나 지금, 같은 건물에 그 누구도 있지 않은 이 상황에선,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플레이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하급 마법:="" 강철="" 피부(Steel="" skin)=""> <하급 마법:="" 고통="" 경감(relief="" of="" suffering)=""> <중급 마법:="" 산성="" 피(acid="" blood)="">...
수십 개의 중급, 하급 버프 마법이 시전되자 몸에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마나가 조금 부족해지긴 했지만, 용족 특유의 높은 마력 스텟 탓에 금방 다시 차올랐다.
신체능력은 확실히 강해졌으나, 캐스팅에 집중한 뇌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이런 식으로 한번에 수십 가지의 마법을 사용해 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쉴 수 없었다. 이런 중급, 하급 마법들 수십 개보다 더 중요한 마법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급 마법:="" 수호령의="" 축복(Blessings="" of="" the="" Guardian="" Soul)=""> <용언 마법:="" 드래곤의="" 심장(Dragon="" heart)=""/>
거대한 수호령이 허공에서 나타나 나를 축복하듯 머리칼을 쓸어내렸고, 용족으로서의 자긍심이나 다름없는, 반은 용의 피가 섞인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게임 상에선 단순히 버프 마법을 받았을 때의 기분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으로 표현했는데, 지금의 내 상태가 딱 그러했다.
당장이라도 마법을 미친 듯이 쏘아내고 싶다.
이 우월한 신체의 능력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하늘을 날아올랐다. 날 배신한 우진이와, 누나의 얼굴을 생각하며.
다대일 상황에서의 원소 법사의 우월함을 모두에게 보일 차례였다.
화풀이와 복수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