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13. 양학
* * *
도움을 구걸하며 애타게 소리를 지르던 우진은 이내 아무도 대답이 없자 고개를 푹 숙였다.
"한예진...씨발, 길드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며...왜 부르는데 안 오는 건데..."
자포자기한 녀석의 마지막 중얼거림에,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잠깐, 다시 말해 봐. 길드장 이름이 뭐라고?”
“한예진. 뭐야. 처음 듣나? 너도 알고 있는 것 아니었어?”
한예진.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성씨까지 똑같았다.
“그 랭킹 2위 한예진, 누군지 나보단 네가 더 잘 알거 아냐? 예전에 너랑 친했었잖아?”
“그러니까, 그 예진이가 나를 산 채로 잡아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리지?”
“그래! 자기 마음대로 조교해서 배빵 노예로 만든다고 했었다! 됐냐?”
나는 검지손가락을 위쪽으로 까닥였다. 그러자 그의 하반신만 감싸고 있던 얼음이 점차 그의 허리춤과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배빵 노예라... 그래, 이제야 조금 기억이 났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닉네임. 초면으로 만난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닉네임 변경권을 사용해 버려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배빵’이란 키워드를 듣자마자 떠올랐다.
당시에는 나보다 더한 변태적인 닉네임은 찾기 어려워서, 나름 충격을 받았었지. 저런 닉네임이 처벌도 안 받나 싶기도 했었고.
‘배빵성애자.’
그 닉네임도 사실 처음에 보고 나선 그냥 웃고 넘어갔었다. 실제로 현실에서 그런 취향일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예진이가 원래부터 까칠하고 약간의 s기질이 있었다곤 하지만 내가 직접 본 예진이는 답지 않은 소심한 성격에, 의외로 배려심도 깊어 현실에서 그 망상을 실현할 용기는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착했던 예진이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니.
그리고, 누나를 미끼로 나를 ‘조교’하려 들었다니.
내가 정신을 잃고 의자에 앉혀져 있던 방의 부끄러운 용도의 기구들도, 정황상 예진이의 것일 터. 만약 모든 일이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갔다면...
‘큰일 날 뻔했네...’
그런데,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있다.
예진이를 오래 본 나는 그녀가 평범한 일에도 얼마나 철저하고 꼼꼼히 대처하는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녀와 함께 공동으로 길드장이 되었다는 예림이는 예진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꼼꼼함과 철저함의 대명사였던 그 자매가, 나를 생포해놓고 마법적인 처리는 물론이고 몸을 제대로 묶어놓지도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날 도와준 조력자가 [헬반도] 길드 내에 있다는 소리였는데...
“우진아?”
“뭐, 씨발련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얼어 죽어가고 있는 놈을 부르자, 그는 소리지르는 것도 지쳤는지 축 늘어진 채 욕을 내뱉었다.
‘일단 얘가 날 구한 건 아닌 것 같고.’
만약 날 구한 사람이 이 녀석이었다면, 분명 옛 친구의 정을 못 이겨 나를 풀어줬다는 일을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며 진작에 선처를 요구했을 게 뻔했다.
나는 의심할 만한 명단에서 놈의 이름을 지워 버렸다. 그렇다면 의심할 만한 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를 잡으라고 직접 명령까지 내린 예진이 날 풀어줬을 리가 없고, 기본적으로 언니의 뜻에 따라가는 예림이는 일단 의심의 범주 바깥에 놓기로 했다.
“끄응...답이 안 나오네.”
날 풀어준 이가 남긴 흔적이라곤 날카로운 무언가로 잘린 밧줄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 무언가를 유추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마 셜록 홈즈나 모 일본 만화의 꼬마 탐정을 불러와도 무리가 아닐까. 날카로운 식칼이나 커터칼은 누구나 마음만 먹는다면 구할 수 있는 도구였으니까.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던 나는, 그 일과는 별개로, 나는 눈앞의 또 다른 옛 친구를 손봐줘야 할 명분이 하나 더 생겼다는 점을 깨달았다.
“야. 생각해보니, 그럼 넌 옛 친구가 무려 ‘감금배빵조교’를 당한다는 소식까지 들어 놓고 날 그쪽에 넘긴 거냐?”
내가 검지손가락을 위쪽으로 까닥이면서 마력을 끌어올리자, 사방에 퍼져 있던 내 마나가 그에 감응하며 얼음을 증식시켜나갔다.
사지가 전부 얼어붙어 잘려나간 그의 볼품없는 몸뚱이가 완전히 얼음으로 뒤덮이기 직전, 그가 마지막 기운을 담아서 외쳤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씨발련아! 솔직히 그 정도의 미인한테 조교당하는 거면 오히려 좋아할 줄 알았지! 미안하니까 한 번만 살려”
"끝까지 년이라고 부르네. 병신같은 놈."
그의 절규 어린 외침은 끝을 맺지 못한 채 끊겼다. 얼음이 얼굴과 성대마져 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죽지는 않았겠지.”
오우거는 질긴 목숨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종족. 이 정도로는 쉬이 죽지 않는다. 잘린 팔다리도 의료진의 조치를 받는다면 몇 개월 내로 새로 돋아날 것이다.
물론 사지를 다 자른 다음 온 몸을 얼린 것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으면 나야 알바 아니지. 내가 죽였다는 증거도 없는데 알 게 뭐야.
친구를 팔아넘겼으니 이 정도의 복수는 녀석도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다.
산 채로 얼음 동상이 되어버린 그의 신체를 스킬을 통해 들어올린 나는, 저 멀리 유저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경기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
그리고 현재.
"안녕, 길드장님."
나는 눈앞에, 당황스러운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예진이를 두고 있었다.
“우리누나 어딨어.”
“그, 오빠, 이건...”
“대답부터 해야지?”
내 물음에, 예진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빨리 대답 안 하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아픈 꼴을 볼 수도 있는데.”
나는 능숙하게 허공에서 <아이스 볼트="">를 양산해냈다. 경기장이 어두워질 정도로 늘어난 얼음의 화살들이 노리는 곳은 명백했다.
“내가 지금 조금 화가 나서 말이야.”
날카로운 화살촉이 노리는 곳은 경기장의 관객석에 앉아 있는 유저들의 급소들.
장인이 모든 힘을 다해 만들어진 명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하게 벼려진 살기를 받은 모든 유저들이 알 수 없는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화율: 0.5% 달성. <히든 종족="" 특전="" 스킬드래곤="" 피어(Dragon="" fear)="">가 개방됩니다.]
발밑의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에 감응한 듯, 위대한 종족의 피가 달아올랐다. 심장이 격동하며 피에 담긴 정순한 마력이 온 몸으로 미친 듯이 전달되기 시작한다.
나는 발작적으로 상태창을 열어 마력 스텟을 확인했다. 어째서인지 마력 스텟은 네 자릿수를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게임 속에선 각종 종결 아이템까지 착용한 상태로 겨우 700을 넘겼었을 마력 스텟이, 아이템 하나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최고 기록을 한참이나 상회하고 있었다.
“후우우...”
방금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난생 처음 겪어 보는 쾌감과도 같은 우월감.
문득 어렸을 적, 나를 보고 멍청하다고 놀렸던 모범생 친구보다 시험 성적이 잘 나와 녀석을 울렸을 때 느꼈던 우월감, 그리고 쾌감이 떠올랐다.
느낌 자체는 그와 비슷했으나, 강도가 그때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때의 경험이 음주와 흡연으로 느낄 수 있는 안도감 정도였다면, 해본 적은 없지만 이 순도 높은 쾌감은 니코틴이나 헤로인조차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린 시절의 경험보다 수천 배, 수만 배는 제곱한 것과 같은 감각이 중추신경을 타고 올라와 뇌를 녹여버리는 것만 같았다.
[당장 저 우매한 것들을 쓸어버려라!]
머릿속에 울리는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스스로의 욕구를 잠재웠다.
이 이상 저 목소리의 말을 들었다간,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우리 간부를 해치운 놈이다! 전투원들! 당장 놈을 쳐라!”
예진과 나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방해가 들어왔다. 팔다리가 잘린 채 바닥에 나뒹구는 우진을 본 [헬반도]의 유저들이 무기를 빼들었다.
대부분은 생활 컨텐츠를 즐기던 생산직 유저나 뉴비인 듯 수준이 낮은 편이었지만, 수준의 고하에 상관없이대화에 방해가 됨은 마찬가지였다.
성가신 잔챙이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마법을 캐스팅했다.
하급 마법 수천 개를 연산할 수 있는 시간을 투자해 그려낸 단 하나의 마법진은 축구장 하나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용언 마법:="" 유피테르의="" 벼락(JUPITER’s="" Lightning)=""/>
푸른 빛의 마법진 위로, 검은 빛의 구름이 모여 거대한 뇌운을 형성했다.
신화 속의 기적과도 같은 날씨의 급격한 변화에 모든 유저들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한 순간,
섬광이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