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15. 나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겐가!
* * *
“오랜만입니다, 겨울 님.”
“안녕하세요...”
설마, ‘[헬반도] 괴멸’ 사건을 일으킨 유저가 나라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날아서 이동했던 곳들은 cctv에 찍힐 만한 장면도 아니었고, 가족들의 품에 돌려보낸 인질이나 [헬반도]길드의 인원들 하나하나 전부 ‘내 신분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맹약을 나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맹약을 어겼다면, 내 정보에 대해 발설하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그 사건의 주범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을 터. 그 증거로, 인터넷에 올라온 수천 개의 기사들 중에는 나에 대한 정보가 적힌 글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이 내가 한 짓을 알고 찾아오진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헬반도]관련 일로 찾아왔습니다.”
“바로 확신을 부숴 버리시네요...”
역시 우리나라 최고 기구의 정보력은 무시할 만한 게 못 되는 건가. 나는 씁쓸함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모든 증인들이 입을 못 열도록 처리했는데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내가 그 뉴스들의 주인공인걸 알아낸 걸까. 무능의 극치인 우리나라 정부기관이라면 충분히 내가 범인인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유저와 일반인들간의 갈등에 내가 움직일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실제로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어쨌든 정부에 좋은 일을 한 건데... 죗값을 물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건 아니죠?”
막상 따지고 죗값을 물려고 한다면, 기물 파손이나 살해 및 상해 혐의 등등 내가 범죄자가 될 법한 껀덕지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예상이 틀렸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저으며 챙겨온 가방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뇌물?”
“뇌물도 아니고, 입막음용 대금도 아닙니다. 이걸 봐 주시지요.”
그는 내게 서류 다발을 내밀었고, 나는 그 위에 적힌 인명들의 목록을 읽었다.
“...이진성, 현상금 400만 원. 김우진, 현상금... 5000만 원?”
[헬반도]의 유저들은 모두가 범죄자들이자 현상수배자들이었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신변에는 현상금이 매겨져 있었다.
아마 내가 기절시킨 채로 경찰청 앞에떨궈버린 사람들만 수백 명. 그들 중에 일부만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고 해도 그 값어치는 무시할 바가 못 되었다.
‘다행히도 명단에 예진이나 예림이는 없네.’
그녀들이 [헬반도]의 길드장으로서 활동한 기간은 하루가 채 안 되었다. 당연히 경찰들도 그 짧은 시간 내에 그녀들이 범죄자라는 걸 파악하기 힘들었겠지.
내가 명단을 다시 돌려주자, 남자는 그것을 뒤의 부하들에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다 읽어 보셨다면, 이 돈들이 어디서 나온 건지도 아시겠군요.”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식으로 대금을 지불하시는지... 다른 방법도 있지 않나요?”
“저희가 직접 와서 현금으로 지금하는 방법을 제외하면, 전부 꼬리가 잡힐 수 있어서 말이죠.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청와대를 제외한 기관에선 전부 겨울님을 모든 수색망을 통해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겨울님과 전투했다는 랭킹 2위의 여성분도 말이죠.”
‘그 랭킹 2위의 여성이라면, 저 방 안에 메이드복을 입고 드러누워 있는데요.’
이번에 찾아온 청와대 요원들 중에는 유저들도 몇몇 있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방 안에 예진과 예림이 있다는 걸 알아채진 못한 것 같았다. 아마 눈치껏 두 사람도 이들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기척을 지우고 있는 것이리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청와대 요원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겨울 님의 신변 보호를 위해선 이 방법말곤 답이 없었습니다. 저희의 조사 결과 경제 형편이 그리 널널하지 않은 편이라서, 더더욱 지급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 돈은 전부 제 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언제나 옳다. 사회의 취약 계층으로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실감하던 명언이었다.
‘이 돈만 있으면... 더 이상 쪼들리면서 살지 않아도 돼.’
일도 안 하고 좋은 집의 좋은 침대 위에서 빈둥거릴 수 있는 밝은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졌다.
내가 차마 욕심을 감추지 못하고 슬그머니 가방을 내 쪽으로 끌어가자, 그는 웃으며 또다른 가방을 꺼냈다.
“아마 예상하셨을진 모르겠지만, 저희가 부탁할 일이 하나 더 있어서 말입니다.”
“...이번 가방은 뇌물이군요?”
“맞습니다.”
방금 전 돈가방은 내 노력에 대한 합법적인 보상이었지만, 뇌물은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받았다가 무슨 귀찮은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나는 빈둥거리는게 좋다. 평생 개백수로 살 거니까 날 방해할 거라면 저리 가.
“뇌물은 안 받아요. 당신네들 부탁도 거절할 거고.”
내 대답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굳게 닫혀 있던가방을 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화려한 가방 안에는 천국이 있었다.
귀금속, 그리고 보석들의 천국이, 저곳에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당장이라도 저것들을 손에 집고 싶다.
저 보석들 위에 눕고 싶다.
보석들 특유의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어.]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강력한 끌림. 어린 시절 백화점의 장난감 코너에서 느꼈던 치기어린 감정들 따위와는 비교조차 미안할 정도의 욕망.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난 이미 가방 안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손이 먼저 나간 것도 아니고, 무려 머리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어도, 눈앞에 가득한 반짝거림의 향연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핫!”
뭔가 데자뷰를 경험한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재빨리 고개를 가방에서 빼냈다. 남들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이 용의 프라이버시와 맞물려 수치심을 형성했다.
나는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어째 만날 때마다 자꾸 못 볼 꼴을 보이네요...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솔직히 좀 귀여웠어요.”
남자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고, 나는 귀여웠다는 사심이 담긴 말에 얼굴을 붉히며 애써 그의 품 안에 있는 보석들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 나중엔 아예 침까지 나왔다.
“그래서, 저희의 제안을 들어보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흘러나온 침을 닦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뇨. 아무리 그래도 뇌물까지 제공하면서 하실 제안이 얼마나 귀찮고 위험한 일일지 상상이 안 가서요. 보아하니 청와대에 합류한 유저 분들도 꽤나 있어 보이는데... 그분들만으론 해결이 안 되시나 보죠?”
내가 그의 등 뒤에 선, 긴 귀를 가진 엘프 유저를 가리키며 묻자 그는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저희 측의 유저들도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저번 [헬반도]의 사례로, pvp상위 랭킹, 그것도 탑 100내의 유저들의 수준에선 비슷한 순위권의 유저가 아니라면 싸움이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부에서도 실감해서 말이죠. 실제로 겨울 님 혼자서 수백여 명의 유저들을 제압하셨으니.”
“그건 그렇긴 한데...”
“저희가 부탁할 일은, 랭킹 4위의 유저에 대한 일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제안을 수락하시기 전까진 말해선 안 되는 기밀”
“거절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거절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나는 눈앞에서 날 놀리듯 내부의 내용물을 보이며열려 있던 가방을 닫았다. 랭킹 4위라니. 그의 음침함과 꺼림척함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게는 이 제안을 거절하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 놈과 엮이는 건 아무리 보석이 보상이라고 해도 싫어.'
아예 청와대 요원들을 처리하고 보석을 뺏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저 정도 양의 보석들을 가지는 대가로, 청와대 요원들을 죽여 국제적인 범죄자로 낙인 찍힌다니. 귀찮은 일이 수도 없이 몰려올 법한 선택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내 모든 욕망과 욕구를 잠재우는 데에 성공했다.
'후우... 이제 좀 진정이 되네.'
가방이 닫힘으로서 시야 내에서 보석과 귀금속의 향연이 가려지니 조금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돌아가세요. 다시금 말하지만, 저는 당신네들의 속임수에 넘어갈 생각이...”
“저희 측에선, 임무 성공의 보상으로 덤프트럭 한 개 분량의 보석과 귀금속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아까 눈여겨보았던 엘프 유저가 공중에 화면을 띄우더니, 내 말을 끊어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거기에 보상으로 단순한귀금속과 보석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보석으로 꾸며진 침대, 옷장은 물론이고...”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침대, 자수정과 에메랄드로 꾸며진 옷장, 금과 대리석으로 도금되어 있는 자택, 비싸다는 보석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샹들리에가 찍힌 사진과 영상들이 화면으로 송출되었다.
“...그래서, 총합하자면 3000억 가량의 보상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겨울 님이 작전에 성공하신다면요.”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엘프 유저 뿐만이 아니라 모든 요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그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 다음엔 마치 예진과 예림이 그랬듯,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무슨 일이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항복 선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