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16. 네임드
* * *
세상에는 두 부류의 유저가 있다.
매너있는 유저와 비매너 유저.
그 중에서도 후자, 흔히 트롤러라고 불리곤 하는 부류에 속하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그 남자 ‘pvp랭킹 4위’의 미친놈이었다.
그 남자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유튜브에 한 영상이 퍼지면서부터였다.
평범한 중상위 수준 유저들이 모여 만든 한 길드의 인원들이 모여 레이드를 뛰기 위한 공대를 만들고, 보스 몬스터의 방 앞까지 진입에 성공하는 것이 영상의 말미까지의 내용이었다.
여기까지는 mmorpg나 비슷한 장르의 게임에 몰두해 본 적이 있을 사람들에겐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었다. 그런 이 영상이 컬트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후반부의 단 몇 초 정도를 차지하는 짧은 트롤링 때문이었다.
그 공대가 레이드의 목표인 ‘레드 와이번’이라는 보스 몬스터의 방 앞에서 작전을 짜던 도중 근접 직업군 유저 하나가 갑작스럽게 혼자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외친 시끄러운 괴성.
사실상 별 의미도 없는 단순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주목받아 밈까지 탄생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그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알고보니 천생 관종이었던 그 근접 직업군 유저는 관심을 받는다는 일에서 나오는 쾌락을 그 이후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종 중 하나. 랭킹 4위의 유명 비매너 유저, ‘만렙유리겅듀’.
참고로 본인 피셜 남자다.
목소리 하난 엄청나게 걸걸한, 자칭 헬창 근육남임에도 불구하고 닉네임이 저따구인 건 ‘여자로 보이는 편이 더 관심을 끌기 편리해서’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유명한 밈의 주인공’+‘넷카마’+‘높은 랭킹이란 환장의 조합으로 관종의 완전체가 된 그 인간은, 도적 클래스 특유의 은신 스킬과 기습 공격에 능통한 패시브를 활용해 양민학살, 트롤링을 일삼곤 했다.
예를 들어 뉴비촌에 찾아가 막 게임을 시작해 슬라임이나 잡고 있는 유저들을 썰어버린다던지, 보스 몬스터를 거의 공략한 공대에 찾아가서 막타를 치고 아이템만 쏙 빼먹는다던지 등등...
그 트롤링의 강도가 워낙 강해 몇몇 유저들에게 살해 협박까지 당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트롤러가 바로 그 놈이었다.
아니, 지금은몸이 본인이 키우던 여캐의 몸으로 뒤바뀌었을 테니 이젠 놈이 아니라 년인가.
“근데 그 인간, 몸 바뀐 뒤로는 개과천선 했다고 들었는데.”
몸이 바뀐 뒤로 바깥으로 나갔다간 그 유명한 외모 덕에 보복을 당하곤 해서, 자연스럽게 ptsd가 생겨 방구석에서만 지내는 히키코모리가 되었다고 들었었다.
나와도 비슷한 랭킹권의 유저라서 접점이 있어, 녀석의 지인을 통해 소식을 듣곤 했는데 비록 방구석 폐인이지만 남들에게 민폐도 안 끼치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안심했었다.
최근엔 무슨 소설을 써서 돈을 번다고 들었는데, 나름 잘 되는 모양이라 축하도 해 줬었지. 장르는 잘 기억이 안 난다. t...뭐였더라?
하여튼, 힘을 되찾은 뒤에도 딱히 소식이 안 들리길래 그 친구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정부 쪽에서 뇌물까지 지급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는 걸 보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뭔가 사고라도 쳤나요? 역시, 그 관종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못 버렸나? 아니면 ptsd로 인한 실수라도 저질렀나요? 민간인을 공격했다던지..."
“아, 그 분이 원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정도까지 몰려 있었다지만... 언제부턴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소꿉친구와 동거하게 된 이후로 괜찮아졌다고 하더군요. 안정되신 후로는 유저로서의 힘을 민생안정에 사용해 주심으로써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잠깐, 소꿉친구요?혹시 그 소꿉친구가 남자...?”
“협조를 구하려 방문했을 당시 만나봤는데, 금발에 검은 피부를 지닌 멋진 유저분이셨습니다.”
"아, 그 녀석..."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과거에 서로 친구추가도 해 뒀던 유저였다. 둘이 종종 붙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불알친구였구나.
나는 가장 친했을 친구에게 소중한 것을 잃었을 토끼겅듀에게 애도의 묵념을 남기며, 둘 사이에 있었을 헤프닝을 떠올렸다.
금발에 검은 피부를 지닌 남자,그리고 그 남자와 동거하면서 얌전해진, 과거에는 말썽꾸러기였던 여자?
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진 말 안해도 뻔할 뻔 자였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농밀한 암컷타
“저기요, 겨울 씨? 제 말 듣고 있는 겁니까?”
“아, 네! 듣고 있어요!”
나는 망측한 상상을 머리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냉수를 들이켰다. 몸이 변하면서 지능도 높아진 부작용이 이런 쓸모없는 상상이나 망상을 할 때마다 쓸데없이 디테일한 장면이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컴퓨터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머릿속에 야한 망가나 일러가 상상하는 그대로 떠오르니까.
딴 생각을 하던 나를 다그친엘프 유저는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한 번 환기시키더니 자연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두 분이 저희 측에 협조해 주시는 온건파 유저 측의 주축이었고,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라는 점이죠.”
“네? 연락이 안 닿아요?”
나는 그들의 설명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냈다.
pvp랭킹 4위라는 수치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한 시즌에 한정된 순위이긴 하지만, 결국 pvp랭킹은 비슷한 수준의 유저들 간의 싸움을 통해 정해지는 것.
막말로 랭킹 네 자릿수 안쪽쯤 되는 랭커들은 간단한 중소길드 하나 정도까진 단신으로 쓸어버리고도 남는다.
사실상 평범한 유저 10~20명이 모인 중소규모 길드 하나가 현재 육군 보병대대 하나와 비슷한 전력 취급을 받는 걸 보면, 그 실력이 평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막말로 수도에 1000위권 랭커 하나 떨구고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하면 그 효율이 핵폭탄보다 낫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건물이나 산업의 기반이 될 시설들은 파괴하지 않은 채로 도시 하나를 통으로 집어삼킬 수 있으니까.
근데 그런 실력파 유저마저 양민학살하듯 쓸어버리고 유유히 사라지던 녀석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됐다고?
“그냥 둘이 신혼여행이라도 간 거 아닐까요? 아니면 집구석 어디에서 둘만의 진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던가.그게 그나마 현실성이 있는데요.”
객관적으로, 이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국내에 있는 녀석에게 일대일로 위협이 될 만한 10위 안쪽의 유명한 랭커들은 나와 ‘만렙토끼겅듀’, 그리고 예진이이 이렇게 세 명인데, 나나 예진이조차도 녀석이 마음먹고 도망치는 걸 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 애가 실수를 하거나, 일부러 잡혀 주는 거라면 모를까.
애초에 나와 예진이는 서로가 몸이 변한 뒤 무슨 일들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계속 붙어 있었으니까.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으니 우리 둘은 용의선상에서 벗어난다.
만약 그 인간이 위협을 느끼고 진심으로 도망치는 걸 붙잡을 수 있을 수준의 유저가 있다면, 시즌 초부터랭킹 1위를 쭉 지켜왔던 그 남자 하나 정도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여러 조건이 따라붙어야 했다.
물론 그 랭킹 1위는 미국인이고, 지금 미국 펜타곤에서 협조를 요청받은 뒤 철저히 감시받고 있다고 들었으니 용의선상에서 벗어난다. 그럼 직접적으로 녀석을 강제로 잡을 수 있는용의자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녀석이 옛 버릇을 못 이기고 또 관심을 받기 위해 장난질을 하는 경우거나... 스스로 누군가에게 신변을 넘긴 경우 딱 두 가지 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전자와는 거리가 멀겠지.
“...저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나 되시는 분이, 연락 하나 없이 누군가에게 당한다는 건 믿기 힘든 소리니까요. 그래서 연락을 기다렸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이쪽에 연락을 돌리는 걸 잊지 않던 분이었으니까요.”
양복을 입은 엘프 유저는, 쉼없이 말해서 숨이 찬지 호흡을 가다듬더니 내가 내온 냉수를 한 번만에 전부 들이켰다.
“문제는, 연락이 두절된 기간이 나흘을 넘어갔고, 요원을 파견해 자택에 방문했을 때에는...”
“그 분과 동거하던 남자분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흔이, 집 안 모든 곳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