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16. 네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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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사견이지만, 로맨스 만화나 소설 등지에서 등장하곤 하는 금발태닝남은 전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한다.
평범한 남주랑 여주가 알콩달콩 사랑하는 이야기에 그런 등장인물이 등장한다면 십중팔구 그 용도는 정해져 있는 법.
그러나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길 바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남성은 외견만 금발에 태닝을 한 남성이었을 뿐, 그 근간을 따지고 보면 순애파기도 했고.
양복의 사내들이 내게 보여준 방 안을 다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하얀 벽지를 붉게 물들인 액체. 누가 봐도 사람의 피였다. 그것도 가해자가 모종의 방법으로 흩뿌린.
굳이 귀찮게 피를 흩뿌려 둔 의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해자에게 원한을 지닌 가해자가, 피해자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녀가 충격을 받도록 일부러 저렇게 난리통을 펴 둔 거겠지.
“...맙소사.”
“그리고 최근에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와 비공개로 전향되었던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시청하시죠.”
불타거나 반파되어 있는 고층 건물들을 뒤로하고, 흐릿한 화면에 잡힌 여성은 사차선 도로의 한복판에서 헐벗은 남성들과 칼을 맞대고 있었다.
히이익! 죽고 싶지 않아!
괴물같은 년...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서로 칼을 맞대며 전투를 이어간다기엔 한쪽이 명백히 열세였다. 열세를 넘어서 어린 아이와 격투기 선수의 싸움이 연상될만큼 일방적인 유린.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씩 잘리고, 아무것도 집을 수 없게 된 뭉툭해진 팔다리를 절망한 표정으로 휘두르는 남자들은 하나하나 최후를 맞이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팔다리가 전부 잘려 마치 도축당한 가축과도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사지가 잘린 채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분수를 내뿜으면서, 끝없는 고통 속에서 괴성을 지르며 남자들은 그렇게 죽었다.
아무리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지닌 유저들이라도 저 정도의 출혈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성경 속 지옥의 악마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잔인한 행각이었으나, 화면 속 여성은 영상의 초반부터 그랬듯 쭉 무표정이었다.
영상의 말미에서, 시체가 된 남자들의 머리를 잘라 참수된 죄인들의 머리를 전시하듯 신호등 아래엥 걸어 둘 때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고장난 인형처럼.
“저 얼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디서 찍힌 영상이죠?”
“부산, 부산 힐스테이트 아파트 단지 사거리에서 찍힌 영상입니다. 이 영상을 보면 아시겠지만, 저희가 겨울님께 요청드리는 제안은”
나는 예진과 예림, 그리고 우리 집에 놀러와 뒹굴거리던 혜원까지 끌고나와 부산 앞바다까지 이동했다. 마침 날씨도 맑아서, 하늘을 날아 이동하는 기분은 최고였다.
수도권에서 부산까지 내려오는 데에 교통체증 같은 걸 겪을 필요가 없다니, 역시 마법사가 진정한 황족 유저들의 직업이라니까.
그러나 마치 소풍을 가는 듯 들떴던 기분은, 부산에 도착하니 금방 착 가라앉았다.
“부산은... 역시나 난장판이네.”
저번에 내가 일으켰던 ‘헬반도 궤멸 사건’이후로 이쪽의 과격파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군대와 온건파 유저들이 주요 거점들은 이미 점거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저들 간의 전투가 벌어진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어, 그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구멍이 나서 수도관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도로들, 반파되어 내부가 전부 보이는 주택과 성한 유리창이 한 곳도 없는 아파트 등등.
과격파와 온건파 사이의 중립을 표방하는 쪽이라곤 해도, 평소에 종종 보아왔던 부산이 이렇게 망가져 버린 걸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니 조금 충격이었다.
“영상으로 확인했던 상태보다 훨씬 상황이 심각하네요. 무슨 다른 나라에 왔거나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나는 혜원의 평에 내심 동의했다. 현재 부산의 모습은 뉴스에서나 보았던 내전이 일어나는 아프리카 나라들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외국 재난 영화에서 본 듯한 느낌도 들었고.
“그래도 인명 피해는 재산 피해에 비해 거의 없는 수준이라니 다행이네.”
“적어도 국내에는 [헬반도] 놈들처럼 도의까지 저버린 극단주의자들은 거의 사라졌다는 거겠죠.”
“다 오빠 덕분이지 뭐. 그런 부류들은 대다수가 [헬반도]의 지원을 받고 활동했는데 길드 자체를 누가 통째로 날려 버렸으니...”
예진과 예림의 맞장구를 들으며, 나는 정부의 요원들이 보여주었던 영상이 찍힌 곳에 셋을 내려주었다.
“내가 보여준 그 영상이 찍힌 위치가 바로 이곳이야. 이 사거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나가면서 수색을 할 예정이고.”
나는 잠깐 말을 멈춘 채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혜원에게 건넸다. 내가 기억하는 ‘만렙토끼겅듀’의 정보였다.
탐색 마법을 위해선 대상자의 정보가 필요하고, 나는 이 정보 대부분을 외워 놓고 있었다. 쓸데없이 자세한 부분까지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상대를 알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법. 마법사라는 pvp똥캐로 순위권 내에 들려면 이 정도의 노력은 당연지사였다.
그렇게 쌓아 두었던 지식들이 이런 수색 마법에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종족은 토끼 수인... 성별은 여성. 이 두 개는 원래 알고 있던 거긴 한데... 레벨이나 능력치, 스킬 레벨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에요? 무기 숙련도 레벨이랑 매력 수치까지도 알아요? 혹시 그 사람 계정을 해킹한 전적이라도 있으신지...”
“걔가 대회에 나왔던 영상을 분석하거나, 직접 상대하면서 낱낱이 유추해낸 정보야. 직접 들어온 데미지와 스킬 레벨이나 계수, 자세 보너스, 무기 숙련도, 피격 대상의 방어력, 특성 및 패시브 스킬같은 변수들을 전부 고려하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수치들이지. 아마 대다수가 정확할 걸.”
원래도 몇십 분이 채 걸리지 않는 단순한 계산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몸이 용족으로 바뀐 이후론 이런 딜계산과 딜계산을 역산해서 나오는 상대방의 능력치에 대한 정보도 수십 초, 짧게는 수 초만에 암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라서 적당히 대답해준 뒤 설명을 이어가려는데, 혜원이 뭔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세 사람 중 가장 정상적인 분인 줄 알았는데... 이런 변태적인 면이 있을 줄이야...”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흠흠, 설명을 계속하자면”
뒤에 이어진 설명을 요약하자면, 아까 이야기했듯 이 사거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수색을 해나갈 것이며 확실한 수색을 위해 두 조로 나누어 활동할 거란 이야기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각 조 당 한 명씩은 수색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 직업군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내게 달라붙으려 드는 혜원을 떨어트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예림이나 예원이의 직업군인 전사와 파이터는 수색 스킬은커녕 범용성 있는 탐색 스킬도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한적인 경우의 추노에 쓰이는 스킬이야 있다지만, 이들은 단순히 누군가를 찾기 위해 쓰기엔 리스크가 많은 스킬들이었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하는 운명”
“저는 그런 소리는 전혀 못 들었거든요! 저 미친 여자와 한 조라니요! 애초에 제가 꼭 필요한 일도 아니고, 돈은 안 받을 테니전 이만 돌아가겠”
“알았으니까 도망치지 말고... 예림이랑 조 해. 내가 예원이를 데려갈게. 그럼 됐지? 여기서 더 불만을 가지면... 강제로 예진이랑 같은 조를 시킬 수밖에 없어.”
"..."
당장이라도 우리 집의 방향으로 날아가려는 그녀의 옷깃을 붙잡은 채 차선책을 제안하자, 혜원은 예림이의 순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할게요.대신, 약속한 돈은 꼭 줘요. 알았죠? 안 주면 평생 악마족이나 남자만 보면 발정하게 되는 서큐버스의 저주를 걸어버릴 거에요.”
“오냐.”
뭔가 애매하게 무서운 저주를 걸겠다고 협박하는 혜원을 귀엽게 무시해 준 나는 예원과 예진을 불러 조를 편성했다.
미리 의견을 나눈 대로 조는 내 제안을 통해 예진과 내가 한 조,혜원과 예림이가 한 조를 구성하도록 정해졌다. 혜원이와 예진이를 단둘이 두면 제대로 된 수색이 불가능할 거란 내 판단에서였다.
방금 전 그녀가 기겁하는 모습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듯, 혜원이는 예진이를 엄청나게 꺼리니까. 내 쪽에서 예진이를 데려가는 것 말곤 선택지가 전혀 없었다.
둘둘씩 조를 나눈 이후, 나는 나와 떨어지게 될 두 사람에게 만약을 위한 브리핑을 남겼다.
“과격파 유저들과 교전이 일어나면 통신 마법으로 연락해. 전화를 해도 상관없고. 만약 이쪽이 지원을 가기 전에 전투가 일어나면 되도록 상대방을 생포하되, 귀찮아지면 사살해도 돼. 애초에 과격파는 대다수가 중범죄를 저지른 놈들이니까. 윗선에서도 작전 중 ‘부득이한 사고’가 있으면 적당히 숨겨주겠다고 했거든. 다만 일반 시민이 상대면 적당히 기절시키거나 제압하고 연락하도록.”
"네!"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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