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16. 네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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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맞닿아 있는 구역의 한 산 속에서,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모습들을 한 유저들은 공포에 떨며 제각각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처럼 문이 닫힌 상점을 습격해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턴 다음 산 속의 은신처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각종 총기와 현대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을 피하기 위해 택한 험한 산길.
사실상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들이었기에, 군인들이나 온건파 유저들을 제외하면 두려워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이 산에 존재하는 야생동물들 역시 그들의 경계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심하고 있었다. 이곳은 군인들조차 모르는, 야생동물만이 이용하는 샛길이었으니까.
“...저게 뭐지?”
나무와 풀숲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야생 토끼인가.”
“별 것 아니었군. 다시 이동하자!”
풀숲 사이에서에 튀어나온 쫑긋거리는 토끼 귀.
저 귀를 보았을 때도 모두들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다. 당연히 별 위협도 되지 않는 평범한 야생 토끼겠거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순간,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무리를 이끌던 리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뒤를 따르던 아람은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났다.
방금 전의 바람은 절대로 자연적인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행 중에 그 사실을 알아챈 자는 그녀밖에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단순히 식자재를 구해오는 일을 실력파 유저들이 할 리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눈앞의 리더의 움직임이 멈춘 것에 이상함을 느낀 한 여성이 입을 열었다.
“...혜성 오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핏물이 비산하고, 리더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산골짜기의 작은 샛길은 그렇게 피와 비명이 오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게, 방금 전까지의 일이었다.
은신에 특화된 암살자 직업 유저였던 아람은 리더의 죽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은신 스킬을 활성화시킨 채 낙엽 더미에 몸을 숨겼다.
주변에선 방금 전까지 함께 걸었던 동료들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단숨에 목이 잘린 리더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살아 있었다.
저들을 살려 둔 이유가 뭐지? 단순히 가지고 놀기 위해서? 아니면 무언가 목적이 있는 걸까?
온건파 유저 측의 기습이라고 보기엔, 방금 전에 보았던 리더의 목을 단숨에 자른 처사는 너무 잔인했다. 과격파 유저들도 장기적으로 보면 국력에 도움이 될 존재들인 한, 당국에선 최대한 생포를 시도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검격, 눈앞에서 온 몸이 두꺼운 근육 갑옷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탱커였던 리더의 목을 자른 일격은 살기가 듬뿍 담긴 명백한 살초였다. 실수조차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우릴 공격하는 상대방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걸 알아야 협상을 하든, 동료들을 데리고 최대한 도망쳐 보든 할 것이 아닌가.
‘정신 바짝 차리자, 다른 사람들이라도 살리려면 내가 해결해야 해.’
그 살초는 자신의 수준을 한참이나 웃도는 이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의 수준에선 인식조차 불가능한 공격. 그나마 공격이라도 인식할 수 있는 아람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공기의 흐름에 집중했다. 신경계가 극도로 활성화되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됨과 동시에 패시브 스킬들이 활성화되었다.
인간의 수준을, 정확히는 생명체의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기감이 주변 십수 미터를 훑었고, 기척 하나를 찾아냈다.
그 기척의 위치는
바로 그녀의 등 뒤였다.
“안녕?”
“흡!”
등 뒤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아람은 즉시 품속에 숨기고 있던 식칼을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휘둘렀다.
순발력을 배로 늘려 주는 스킬들이 근육의 움직임과 함께 자연스럽게 발동되고, 하얀 칼날은 묵빛의 기운이 머금어져 예리도를 더했다.
10분지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아람의 반격은 일반인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섬광에 가까웠다.
승리를 확신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상대방은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압도적인 격차를 지닌 유저였다.
아람의 팔이 채 휘둘러지기도 전에, 식칼을 든 그녀의 손목이 저 멀리 날아갔다.
“...기초적인 센스는 있네요. 물론 그뿐이지만.”
“끄아아악!”
절단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를 맞으며, 상대는 간단히 희생자를 평가했다.
“미안해요.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저도 사연이 있어 어쩔 수 없네요.”
울음 섞인 어린 소녀의 사과. 그게 희생자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상대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이자, 아람은 무언가가 몸을 스쳐지나간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나름 암살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지닌 유저였던 아람은, 그 느낌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칼날이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
점차 역동적으로 기울어지는 시야각을 보며, 아람은 드디어 등 뒤에 서 있던 상대방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붉은 눈, 하얀 피부, 그리고 토끼 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명한 네임드 유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이곳에
그녀의 의식은, 단말마와도 같은 의문을 지닌 채로 영원히 사라졌다.
“...이걸로 아흔아홉 번 째.”
*****
“...부산 시내의 과격파 유저들은 전부 처리된 것 같네.”
나는 의식을 잃은 각양각색의 과격파 유저들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단순히 정신을 잃고 쓰러졌거나, 밧줄에 묶여 있는 상태면 양반이었다.
얼음 마법에 직격당해 산 채로 얼음에 갇히거나, 저주로 인해 영원한 악몽의 잠에 빠져 발작을 해대거나, 점혈과 독에 당해 칠공분혈(七??血)을 하며 바르작거리는 놈들 등등...
생포한 과격파 유저들과 그들에게 잡혀 있던 피해자들을 모아놓은 광장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 귀찮은 인간들 좀 데려가라고 부른 군인들이 광장을 치우고 범죄자들을 인계하는 등 절차를 밟고는 있었지만, 각종 오물과 얼음, 불길들을 잡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이러려고 여기로 온 게 아닌데 말이지.”
“날면서 온 시내를 탐색했지만, 수색 대상이던 저희와 비슷한 수준의 유저는 없었어요. 수인족 유저들은 몇 찾긴 했지만... 대부분이 성노로 전락한 채였죠.”
나와 다른 조로 떨어졌던 혜림이가 말했다. 그녀가 웃으며 가리키는 방향엔 몸을 가린 채 구급차에 실려 가거나, 군복을 입은 군의관들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 수인 유저들과 일반인들이 보였다.
“우리도 그래. 민간인들, 피해를 본 유저들이나 구출하고... 과격파 유저들 몇 명 생포하고. 애초에 이런 무급봉사를 하러 온 게 아닌데 말이지...”
“결국 수확은 없었네요. 하루 종일 이랑 수색 마법들만 시전하면서 날아다녔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다니...”
혜림이가 지쳤다는 듯 광장의 벤치에 주저앉자, 일행들 사이로 무기력한 분위기가 퍼졌다.
다들 적당한 의자에 쓰러져 뒹굴거리고 있자니, 예진이의 머리가 내 쪽으로 드리웠다.
“...쓰다듬어 줘?”
“아, 아니... 손이 심심하면...”
이렇게 일이 안 풀릴 때는 조금씩 쉬어 줘야 하는 법. 나는 부슬부슬한 혜진의 머리칼과 고양이 귀를 찬찬히 쓸어내렸다.
골골골...
고양이들이 기분 좋을 때마다 나는 소리라는 골골송. 옛날에 편의점 앞의 고양이에게서 들었던 그 귀엽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한 예진은, 스스로가 그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 싶었다.
스킬 탓에 내 하수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예진은, 처음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거부했다. 그런 그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매번 손이 심심할 때마다 쓰다듬다 보니이젠 스스로 쓰다듬을 조르기까지 하는 수준까지 왔다.
역시, 수인들은 쓰다듬기로 혼내줘야지.
그렇게 골골송과 손의 부들부들한 감촉을 즐기던 도중, 저 멀리서구두 특유의 딱딱한 걸음소리가 들려와 예진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김 대장님.”
우리 집을 찾아왔던 요원들을 이끌던 중년의 남자, 김 대장이 엘프 유저를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예진이와 예림이에게 인식 저해 마법을 걸었다. 내가 이 둘을 데리고 있다는 걸 저들이 알면 곤란해지니까.
“하룻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부산 시내엔 이번 작전의 대상이 없다는 보고는 잘 받았습니다.”
“진전이 없어서 죄송해요. 아, 이쪽은 혜원이라고 해요. 이번 일을 도울 친구죠.”
“...믿을 만한 분입니까?”
“비밀 유지 계약을 맺었어요. 이번 일과 관련된 정보를 입 밖으로 내려고 한다면...”
나는 치켜든 검지손가락 위로 작은 폭팔을 일으켰다. 중급 마법인 을 마나를 통제해 소규모로 시전한 간단한 활용이었다. 옆에서 그걸 어떻게 했냐며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혜원과 엘프를 밀어낸 나는, 태연한 척 말했다.
“심장이 이렇게 되거든요.”
내가 폭팔로 일어난 연기를 후 불어 꺼트리자, 대장은 허허로이 웃으며 우리를 그가 타고 온 헬기로 이끌었다.
“흠흠, 그럼 우선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죠. 대상에게서 습격받은 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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