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19. 세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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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이란 무엇인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직업군, 특히 간단한 실생활용 마법을 제외하곤 마법 스킬을 배우기가 불가능한 전위 직업군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스크롤에는 다양한 값진 재료가 들어가고, 그 재료뿐만이 아니라 마법사 유저들의 기술력까지 들어가는 귀한 일회용 도구였다. 상황에 따라선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많은 유저들은 이런 스크롤을 몇 개씩 지니고 다니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옛말, 게임상이 아닌 현실에선 스크롤을 사용하는 데에 필수적인 ‘마나 잉크’를 구할 수 없었다. 마나 잉크의 재료인 마나가 담긴 약초를 구할 방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게임에서처럼 스크롤을 생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단 소리였다.
당연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스크롤이란 유용한 도구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그리고 유저들의 몸이 뒤바뀐 지 일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어느 한 유저가 '마나 잉크'의 대용품을 발견하게 되었다.
새로운 스크롤의 재료는 바로 유저의 '피와 영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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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는 스크롤을 망설임 없이 찢었다.
이 스크롤의 재료는 100여 명분의 피와 원혼이다.
스크롤의 성능은 제작자인 마법사의 실력과 사용된 재료에 비례해서 상승한다.
그 남자는 인성은 더럽더라도 실력은 뛰어나고, 사용된 재료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고급이었다.
‘무슨 마법이 담겨있을진 모르지만, 이거 하나면 저 세 명과 맞붙어도...!’
손아귀 속에서 찢어진 스크롤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내부에 담긴 마법진이 충격을 받음으로서 발동된 것이다.
“...엥?”
스크롤이 빛으로 화해 사라지고, 그곳에서 나온 검은 기운이 시전자인 시아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마법사인 겨울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마법 사용까지 멈췄다.
검은 빛의 기운들이 연신 시아의 몸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며, 겨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맙소사.”
<상급 마법:="" 마리오네트(marionette)=""> <상급 마법:="" 인격탈취(personality="" theft)=""/>
스크롤에 담겨 있던 마법은 몸의 자유를 속박하고, 시전자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흑마법사 전용 스킬들이었다.
평범한 상급 마법이라면 시아 역시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겠지만, 무려 100여 명의 피와 원혼이 깃든 스크롤에 적힌 마법이었다.
그러나 시아 역시 랭킹 4위를 자랑하는 유저, 즉시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숨기고 있던 칼날을 허벅지에 내리찍었다.
통증은 환각과 정신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잠시 흐릿해졌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금 생기를 갖추고 또렷해졌다.
그러나 스크롤에 적힌 마법들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상급 마법:="" 자아="" 찬탈(ego="" usurpation)=""> <저주 마법:="" 유약한="" 임프의="" 정신(a="" weak="" spirit="" of="" impression)=""> <저주 마법:="" 거부할="" 수="" 없는="" 유혹(irresistible="" temptation)=""/>
게임상에선 <중급 마법:="" 영원한="" 속죄의="" 사슬(a="" chain="" of="" eternal="" atonement)=""> 이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없는, 사용자를 찾기에 힘들 정도로 희귀한 정신 계열 마법들이 연달아 발현되었다.
‘마법 저항력’ 스텟을 제공하는 장비가 없는 순전히 맨몸인 상황에서, 저 정도의 마법 연계라면 랭커여도 제정신을 유지할 가능성은 낮았다.
겨울의 판단대로, 시아는 속으로 이 스크롤을 건네준 남자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애초에, 100명분의 피와 원혼만으로 만들어진 스크롤이 아니야! 잘도 날 속였겠다..!’
마법과는 거리가 먼 도적으로서, 수도 없이 많은 스크롤을 사용해 보았던 시아였다. 그런 그녀의 판단에 따르면, 이 스크롤에 들어간 피와 원혼의 수는...
적어도 천 명.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통제권을 넘겨줄 생각은 없거든.’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시아는 이를 악물고 허벅지에 박혀 있던 칼날을 거칠게 비틀었다.
칼날이 동맥을 건드린건지 더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와 얼굴을 더럽혔다.
귓가에 아른거리던 악마의 속삭임과, 유약한 영혼들의 짓누름이 사라졌다.
서큐버스의 환영과 악령들의 속박에서 벗어나자,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다.
통증이 찾아온다는 건, 최소한 위험한 정신 마법에선 벗어났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안심하려던 시아의 코앞에서, 스크롤에 적혀 있던 나머지 마법이 발현되었다.
<하급 마법:="" 영상="" 전송(Video="" Transfer)=""> <하급 마법:="" 소리="" 전송(voice="" transmission)=""> <하급 마법:="" 입체="" 시야(stereoscopic="" vision)=""/>
앞선 스킬들에 비하면 지극히 낮은 수준의, 공격용 마법도 아닌 실생활 전용 마법들.
딱히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미약한 스킬들이라 적당히 넘기려던 찰나, <영상 전송="">마법이 발현되어 눈앞에 작은 창 하나를 띄웠다.
영상의 첫 장면은 한 금발의 남성이, 거대한 검을 든 괴한과 함께 서 있는 장면이었다.
영상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성은, 그녀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영상의 배경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순식간에 영상에 시선을 빼앗긴 시아는, 남자의 얼굴에 종이 봉투가 씌워지는 것을 보았다.
“...설마.”
남자는 괴한의 손길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니지...?”
괴한은 들고 있던 대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사무치도록 그리운, 수천만번은 더 들은 것만 같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급 마법:="" 세뇌(Brainwashing)=""/>
스크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하급 마법이, 절망에 빠진 그녀를 놀리듯 발동되었다.
마치 영상이 끝나는 타이밍을 계산이라도 한 것 같은 설계였다.
결국 흔들리던 이성의 끈을 붙잡지 못한 시아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검게 물든 그녀의 눈동자에는 붉은피로 뒤덮인신혼집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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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급 유저를 세뇌 및 조종'에 성공하셨습니다. 동화율이 증가합니다.
"...성공했네. 역시 멍청한 년이었어."
어느 한 폐가의 어둠 속, 사랑에 눈이 멀어 있던 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죽거리던 남자는 상태창에 떠오른 메세지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를 처리하기 위해선, 이젠 움직여야만 했다.
[동화율 99.7%달성. 특수 퀘스트 <당신의 운명="">이 개방됩니다.]
<당신의 운명=""/>
당신은 철저히 악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언데드'종족의 '흑마법사'로서 무고한 사람을 죽였고, 유혹하고, 세뇌시켰습니다.
당신의 카르마 수치는 '172'입니다.
그동안 걸어왔던 길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당신은 노력할 것입니다.
당신의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상태창은 마치 자아를 가진 것처럼 직접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러나 남자는 상태창의 돌발행동이 놀랍지도 않은지 미동도 없는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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