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20. 발악
* * *
“저긴가.”
파이터 특유의 민첩성으로, 느려 터진 동생을 저 멀리 버려둔 채 먼저 목표물 근처에 도달한 예진은 운동장 한켠에 서서 주인님... 아니, 오빠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을 범죄자가 숨어 있는 학교를 올려다보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붉은 벽돌로 세워진 학교는, 보아하니 작년부터 폐교된 학교로 처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폐교에 사람이 찾아올 일은 없으니, 들키지 않는 근거지로 삼기 딱 좋았겠지.
그러나 오빠의 추적마법에 걸린 이상, 그가 도망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못 미덥긴 하지만 정부 측의 유저들만 수백 명이 동원되었고, 랭커인 자신과 동생 역시 저 남자를 잡기 위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양학이었다. 아군의 양도, 질도 상대방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적을 말 그대로찍어누르는 양학.
“그러니까 조금, 스트레스를 풀어도 되겠지.”
저 멀리, 정문을 지키는 것처럼 서 있는 언데드 오우거를 보며, 예진은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었다.
듣자하니 이 근방에는 유저들의 폭동으로 일반인들이 살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저 오우거 친구와 함께 조금은 요란을 떨어도 불평을 표할 사람은 없다는 소리였다.
“우우우! 데님! 침입자 막는다!”
일부러 기척을 감추지 않고 다가갔더니, 녀석은 금새 이쪽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아챘다.
언데드 오우거. 피통만 더럽게 많고, 공격력은 떨어져 초보자들에겐 위협적이지만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 즉 샌드백밖에 되지 않는 몬스터.
보아하니 만든 흑마법사가 나름 신경을 써둔 듯 평범한 오우거보단 한참이나 강해 보였지만, 결국 ‘종의 한계’를 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종의 한계, 그러니까 각성한 보스몹 수준이 아닌 이상 결국 예진에겐 조금 질긴 샌드백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침입자! 침입자는 이 정문에서 떨어진다. 여기를 지나가게 하면 데님 혼난다.”
“...그래? 난 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못 지나간다!”
"지나갈 거라니까?"
"바보 고양이 수인은 말 못 알아듣는다! 데님 수인 말 무시한다."
몇 번을 말해줘도 못 알아먹는 고양이 수인은 역시 멍청하다며, 애꿎은 땅에 화풀이 삼아 발을 굴러대는 오우거를 보던 예진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이 정도로 대화가 가능한 고지능의 개체라니, 나름 마음에 들었다.
“생긴 건 내 취향은 아니지만...”
녀석의 축 늘어진 지방층을 노려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말도 잘 하고... 무엇보다타격감은 꽤나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우어어어!”
살이 쪘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그녀의 발언을 도발로 받아들였는지, 냅다 예진을 향해 달려드는 오우거.
녀석이 들고 있던 거대한 대검이 그녀를 향해 휘둘러졌다.
쾅.
굳힌 콘크리트와 모래로 덮여 단단하기 짝이 없을 운동장에 거대한 흠집이 하나 생겼다.
예상을 뛰어넘는 공격력에 당황함도 잠시, 예진은 다시금 휘둘러진 대검을 백스텝을 통해 사뿐히 피해냈다.
‘당연히 언데드니까 생긴 거에 비해 근력이 약해서 대검도 제대로 못 휘드르고 붕쯔붕쯔 거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재미난 샌드백이었다. 그래봐야, 샌드백이었지만.
[소림사 절기백보신권(????)]
흔히들 소림의 칠십이종절예(七?二??) 중 가장 유명한 권법이,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금빛의 기운이 손과 손목을 감싸고, 권에 모인 막대한 기파가 주먹에서 방출된다.
서유기에서 파생된 모 일본 만화의 등장인물들이 쏘는 에너지파와 똑 닮은 거친 기운이 오우거를 관통했다.
주변이 모래로 가득한 운동장 특성상, 순식간에 뒤로 튕겨져나간 오우거의 형상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래바람에 가려졌다.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오우거는 금새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바람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기습할 타이밍을 노리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안타깝게도, 예진의 기감에 녀석의 움직임은 모두 잡히고 있었다.
‘...지능이 엄청 높네. 단순히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초보적인 전술도 구사할 수 있어.모래바람으로 시야가 가려진 사이에 기습이라... 언데드 맞나?’
이 위기나 다름없는 상황을, 단순하기 짝이 없긴 하지만 나름 전략적인 방식으로 타개하려는 오우거의 움직임에 예진은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지능이 높은 개체를 만들어내는 흑마법사라면 위험성이 짙었다. 빠르게 문지기를 처리하고, 이 녀석의 주인 역시 허튼짓을 하기 전에 생포해야 귀찮은 일을 예방할 수 있겠지.
흑마법사가 각을 잡고 분탕을 치려 든다면 마법엔 조예가 없는 예진이 수습하기엔 불가능에 가까웠다. 역병을 퍼트린다거나, 일반인에게도 저주를 전염시키는 언데드를 만들어 거리에 풀어버린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 예였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 오빠에게 대차게 까이고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라. 그건 조금 괜찮을지도.
“우어!”
자신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듯, 모래바람을 가르고 나타나 괴성과 함께 대검을 내리치는 오우거. 그러나 이전과 달리, 예진은 대검을 피하지 않았다.
[소림파 절기관음수(?音手)]
예진은 눈앞에 대검이 짓쳐듬에도 불구하고, 부동심을 유지하며 손을 한 바퀴 허공에 둘러 합장을 이뤘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로, 백여 개의 장영이 마치 천 개의 손을 지녔다는 천수관음(?手?音)의 손처럼 화려한 형태를 이뤘다.
[관음수]는 혜원을 단번에 쓰러트렸듯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기술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론 사각지대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절기였다.
텁.
단단한 운동장을 두 쪽으로 갈랐던 대검이,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잡혔다.
백여 개의 황금빛 손 중, 대검을 붙잡은 건 겨우 세 개의 손 뿐. 그러나 오우거는 그 빛나는 손아귀에서 자신의 대검을 빼낼 수 없었다. 예진의 허리춤보다 더 두꺼운 팔뚝에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무당파허운종(?雲?)]
허공의 구름을 쫒는다는 뜻의,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효과의 이동기가 발동되자예진의 몸은 자연스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자연스럽게 [관음수]에 붙잡혀 있던 대검 역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우우!?”
그리고 당연하게도, 미련하게 대검을 계속 붙잡고 있던 언데드 오우거 역시 마찬가지로 밤하늘 위로 떠올랐다.
“피통이 많은 녀석들을 잡을 땐 이 방법이 딱이거든.”
“우우!”
점차 멀어져 가는 땅을 보곤 그녀가 무슨 짓을 할 건지 뒤늦게 알아챈 오우거가 대검에서 손을 놓으려 들자, 예진은 등 뒤의 남는 아흔일곱 개의 장영으로 녀석이 떨어지지 않게 붙잡았다.
말 그대로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강제된 오우거는 계속해서 발버둥쳤다. 이미 한 번 죽은 언데드 주제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 3개만으로 녀석의 팔뚝 힘을 압도한 손이 97개나 있는 상황에서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참나 떠올랐을까, 저 멀리 지나가는 차량이 장난감 정도의 크기로 보일 정도로 높아진 고도 위에서, 예진은 녀석을 하늘 위로 던져 버렸다.
이대로 떨어져서 죽어 준다면 간단하겠지만, 녀석은 피통도 높고 재생력이 뛰어난 오우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언데드. 추락의 충격을 단번에 죽지 않는다면 다시 몸을 재생해 싸움을 걸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귀찮아 지는 건 차치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추락사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지도 않으니까.
진심으로 한 방 날려서, 저 밑에서 수작질을 버리고 있을 범죄자가 숨어 있는 학교까지 통째로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녀석이 무슨 비장의 수를 감추고 있든 간에, 그 비장의 수마저 통째로 소멸시켜 줄 생각이었다.
나름 실력이 좀 있는 흑마법사라면 제물을 쓰든 혈마법을 쓰든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하겠지.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예진은 목표물인 학교와 오우거의 위치를 확인했다.
난데없이 허공에 던져진 오우거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팔을 휘저으며 잠시 떠오르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후우우...”
그녀의 등 뒤를 든든하게 지키던 [관음수]가 지속시간이 지나 사라졌다. 오랜만에 [관음수]같은 방어용 스킬이 아닌, 다른 스킬을 사용할 타이밍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용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오빠의 도움과 동생과의 대련을 통해 능숙해진 주력기들을 실전에서 시험해 볼 기회.
스트레스도 풀 겸 해서, 이런 기회를 져버릴 예진이 아니었다.
그녀의 피부에 고지대 특유의 적지만 순수한 기운이 모이고, 단전 내의 내기(??)가 맹렬하게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단혼청염(???)]
예진이 주먹을 맞부딪히자, 그녀의 단전을 따라청염(?)이 시전자의 온 몸을 감쌌다.
[청룡출진(??出?)]
진하고 순수한 그녀의 기로 이루어진 불꽃은, 단전 내의 내기의 움직임에 따라 청룡(??)의 형상을 그렸다.
[용왕불패(?王不?)]
그렇게 예진은 제 몸을 감싸고 있는 푸른 용왕과 함께, 하늘을 날아저 멀리 지각을 향해 낙하하고 있는 오우거의 몸을 내려찍었다.
오우거의 거체(巨?)는 그렇게 제 주인이 몸을 숨겼을 학교에마치 푸른 유성과도 같은 아름다운 궤적으로직격했다.
수 킬로미터 위의 상공에서 떨어지는 위치 에너지,
그리고 음속을 한참은 초월한 가속력,
오우거의 코끼리는 우습게 뛰어넘을 몸무게,
마지막으로 막대한 예진의 내공과 절기까지.
이 모든 요소가 모여 작은 운석,그 이상의 위력을 낸 예진의 미친 짓은 그녀가 원했던 그대로의 효과를 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원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내었다.
충주시의 변두리, 폐교가 된 지 일 년이 넘은 학교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