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손잡이 두 개 달린 용족이 되었다-47화 (47/59)

〈 47화 〉 20. 발악

* * *

흑마법사.

흑마법사 하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칙칙하고, 어두운 색을 떠올린다.

종족 중에 어둡고, 칙칙하고, 무엇보다 가장 호러틱한 종족이 무엇일까?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언데드를 선택했다. 흑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리치. 여느 판타지 소설이라면 한 번씩은 꼭 나오는 악역의 종족.

일반적인 시선으론 조금 특이한 취향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남자는 나름 그 컨셉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그의 캐릭터의 종족은‘언데드 '가 되었다.

그리고 그 가벼운 선택은, 최악의 불행이 되어 남자에게 되돌아왔다.

­차라리 다른 예쁘고 멋있는 종족을 고를걸 그랬어.

수천 번을 넘어 더 이상 샐 수 없을 정도로 떠올린 생각을 오늘도 반복하며, 남자는 하얀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언데드는 기본적으로 죽은 시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판타지아 온라인’의 언데드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재생력이었다. 사지가 잘리더라도, 붕대나 테이프 같은 걸로 다시 붙여 두기만 하면 며칠 내로 회복된다.

이미 죽은 시체가 살아서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재생력까지 갖췄다?

인류가 그렇게나 찾아 헤메던 불로불사(不?不死)에 가장 가까운 해답이, 바로 여기 있었다.

당연하게도, 각국에선 이미 언데드 유저들을 데리고 각종 실험을 하고 있다는 비밀 아닌 비밀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아무도 내색을 하지 않는 건, 언데드 유저들이 극히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이겠지.

심지어 언데드 유저들은, 그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할 가족들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언데드 유저들의 몸은 기본적으론 일반적인 시체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무런 처리가 없으면 역한 시체 냄새가 나고, 그중 일부는 커스터마이징에 따라 내장을 바깥에 드러내거나 얼굴 가죽이 존재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적어도 가족들이 귀신의 집 마니아거나, 공포영화 애호가 같은 특수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런 흉하고 냄새나는 시체와 함께 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게 당연했다. 아무리 그게 가족이라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언데드 대다수는 스스로 집 밖으로 나오는 걸 택했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집을 나오게 된 계기가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는 각자 달랐지만.

남자 역시 다른 언데드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언데드는 먹을 것과 기온에 구애받지 않는 몸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잠깐의 길거리 생활은 편했다. 얼마 가지 않아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이곳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팔목을 타고 들어오는 액체가 담긴 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Blowfish poison], 직역하자면 복어 독.

이젠 하다하다 독까지 실험하는 건가.

언데드는 기본적으로 독에 면역이다. 당연하게도 무언가가 몸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기묘한 감각 이외에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그의 얌전한 반응을 보며 타자를 두드리는 연구진들이 보인다.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이번엔 칼날이 다가온다. 이번엔 도대체 어느 부위를 원하는 걸까.

어제는 손가락이었고, 엊그제는 이빨과 잇몸, 그보다 더 전에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언데드도 고통은 느낀다. 그러나 타 종족들에 비해 훨씬 둔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신체 일부가 잘리거나 뽑혀나가는 고통은 둔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일반인이 제정신으로 버틸 만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고통 어린 소리를 지르든, 돼지고기를 자르는 용도였던 회전하는 칼날이 작업을 멈출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언데드의 몸이 아니었다면 혼절하기라도 할 텐데, 남자의 정신은 쭉 뚜렷했다.

빌어먹을 이 몸 때문이었다.

*******

­쿨럭, 콜록.

기침이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호흡기에 문제가 생간 건가.

거친 기침과 함께 눈을 뜨자마자 검푸른 밤의 하늘이 시야를 가득히 채웠다. 시원한 새벽 특유의 공기를 몇 번 들이쉬고 나니, 기침도 멎고 제대로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분명 건물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 천장이 무너져내린 것이었다.

주변은 충격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넘어서서, 거대한 크레이터가 형성되어 있었다.

남자는 말 그대로 지하에 제대로 쳐박힌 상태였다.

“...젠장할.”

코끝을 스치는 화약 냄새를 보아하니 만에 하나, '비장의 수'마저 먹히지 않을 경우 사용하려고 했던 자폭용 폭약이, 모종의 이유로 터져 버린 것 같았다.

“데님은... 죽었군.”

영혼과 결속되어 있던 링크가 완전히 끊겼다. 골통이 완전히 박살나지만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있게끔 만들어 둔 놈이었기에, 녀석을 완전히 죽였다는 건 상대가 꽤나 실력자라는 일종의 증거나 다름없었다.

폭발의 여파로 온몸에 쌓여 있던 먼지와 건물의 잔해를 털고 일어난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쓰러져있던 곳 바로 옆에 데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사체가 놓여 있었다.

녀석의 피부는 와이번과 오우거의 거죽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성하는 데에 쓰인 몬스터의 시체는 고레벨의 하이 오우거였다. 이런 녀석을 정면에서 이렇게 작살낼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적어도 국내에는 그가 아는 바로는 단 세 명.

녀석의 사체를 살펴보니 마법에 당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참격에도 당하지 않았다.

오직 단순한 물리력만으로, 그 단단한 피통을 자랑하던 녀석이 단번에 쓰러진 것이다.

‘일단, 저 위에 있는 상대가 누군지는 알겠군.’

배빵성애자. 자신의 욕망을 대놓고 닉네임에 드러낸 추악한 유저 중 하나였지만, 그녀의 실력은 얕볼 게 못 되었다.

전 세계에서 탑 10, 그 중에서도 차석의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유저는 존경받아 마땅했다. 그런 수준의 유저가 왜 인간의 편에 서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상대할 준비를 해야겠지.”

여기까지 몰린 이상, 도망쳐봐야 포위망을 좁혀오는 쪽이 훨씬 빠르다. 유일한 답은 정면돌파. 이곳에서 기세로 치고나가야 했다.

<뒤틀린 드래곤의="" 요람(Dragon's="" twisted="" cradle)=""/>

<발할라는 존재치="" 않는다(Balhala="" doesn't="" exist.)=""/>

<불사왕의 재림(The="" return="" of="" the="" immortal)=""/>

흑마법(Black Magic) 계열에 해당하는 고위 마법들이 그의 손끝에서 발현되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검은 사기가, 세 개의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했다.

첫 번째 마법진에선 십수 미터의 거체를 자랑하는 골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마법진에선 명예로운 최후를 맞았을 전설 속 기사들의 시체가 천천히 일어나 흑마법사인 남자에게 경례했다.

세 번째 마법진에선 붉은 보석을 단 스테프를 든 검은 해골, 리치들이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하나하나가 세 자릿수 레벨대의 강력함을 자랑하는, 말 그대로 남자의 전력이나 다름없는 소환수들. 이들의 전력만으로도 남자는 웬만한 국가 하나는 전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재밌는 짓을 하네.”

문제는, 상대가 국가 하나를 전복시키고도 남는 괴물이라는 점이었다.

*******

공격을 흘리고 받아친다.

흔히들 카운터(Counter)라고도 부르는 이러한 기술은 예진의 기본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손바닥으로 검격을 흘려내고, 휘둘러진 검에 쏠린 무게중심을 이용해 기사의 갑옷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안쪽의 골격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투구 안에서 빛나던 붉은 안광이 몇 번 껌벅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유사의 늪(Quicksand)=""/>

<산성 화살(Acid="" arrow)=""/>

예진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여러 마법이 리치들의 붉은 스테프에서 사출되었으나­ 모든 견제기를 뒤집어 쓴 상태로도 예진은 너끈히 죽음의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수십 기의 죽음의 기사가 순식간에 서넛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리치들의 마력도 한계에 직면했다.

남자는 승부수를 던질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모두, 속박 마법을 시전해라.

그의 명령대로, 리치들은 일사불란하게 CC 효과가 있는 마법들을 일제히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중력 역전(Reverse="" Gravity)=""/>

<강제수면(Forced sleep)=""/>

<마비의 손길(The="" touch="" of="" paralysis)=""/>

기계적인 손짓으로 시전된 스킬들에 따라 역전된 중력이 발을 묶고, 수면 마법이 정신을 혼미하게 했으며, 마비의 손길이 반응속도를 둔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군세의 주인인 남자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마법을 캐스팅했다.

<상급 마법:="" 자아="" 찬탈(ego="" usurpation)=""/>

<자아 찬탈="">은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거나 동등하다면,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효과를 보기 힘든 마법. 예진 역시 그 즉시 스킬의 효과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분명, 예진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의 표정에 담긴 속내를 직역하자면 이럴 것이다.

상급 마법은 마법사들에겐 일종의 중요한 패나 다름없었다. 그런 카드를 이렇게 허무하게 소비한다는 건 일종의 트롤이나 도발과도 같은 행위였다.

그러나 당장 목숨이 급한 남자가, 아무런 의미 없이 상급 마법을 남발했을 리가 없었다. 그 증거로, 남자는 자신이 타고 있던 본 드래곤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명령했다.

“지금이다.”

스킬의 효과에 저항하기 위해 투자한 약 1초간의 텀. 그 정도의 시간이면, 효율적인 직격타를 먹이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본 드래곤의 입 안에 검은빛으로 빛나는 사기(死?)가 모여들었다.

어두운 주변을 가득히 채운 드래곤의 보랏빛 안광이 한 차례 환하게 빛나고, 입에 모인 막대한 어두운 기운이 목표물과 그 주변을 휩쓸었다.

용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브레스를 자랑하는 본 드래곤의 브레스에 직격했다. 적어도 의미있는 타격을 입었을 게 분명했다.

­전부, 저 여자를 향해 마지막 마력까지 쥐어짜 공격해라.

이지 없는 언데드들은 모두 그의 명령에 따라, 검기를 형성하고 마법을 캐스팅했다. 먼지 구름에 가려진 예진의 신형에 바위쯤은 간단히 작살낼 수 있는 스킬들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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