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손잡이 두 개 달린 용족이 되었다-48화 (48/59)

〈 48화 〉 20. 발악

* * *

저 멀리서 해가 밝아온다.

새하얀 뼈로 뒤덮인 거대한 언덕 위, 남자는 그곳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털렸다. 그것도 완벽하게.

아이템 하나 끼고 있지 않은 상대에게, 있는 포션까지 치사하게 마셔 가며 싸웠는데도 졌다.

기세 좋게 소환한 소환수들은 말 그대로 골통이 부숴져 산화했고, 유일하게 전위에서 시간을 벌었던 본 드래곤도 얼마 버티지 못한 채 쓰러졌다.

지천에 널린 뼈들을 밟으며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요란하게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남자는 마지막 여분의 사기를 쥐어짜 손바닥 위에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었다.

무려 그 강력하다는 본 드래곤의 이빨로 만들어진 칼날. 급소에 제대로 찌를 수만 있다면 아무리 여력이 많이 남아있다고 해도 단숨에 승기를 쥘 수 있었다.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 아무리 강한 유저라고 해도 약점에 칼침 한번 맞으면 그대로 죽는 세상이다.

“죽어라!”

말 그대로 지척, 한 걸음도 채 안 되는 거리까지 상대방이 다가온 순간­ 남자는 일어나 팔을 휘둘렀다.

선형적인 궤적을 그리며 칼날은 목표물의 급소, 목을 향해 나아갔다. 비록 원거리 계열 직업인 흑마법사지만, 기본적으로 유저는 유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근력을 지닌 그가 휘두른 칼날은 빠르게 예진의 급소로 쇄도했다.

­콱.

나아가던 칼날이 멈췄다. 완벽하게 막힌 것이다.

“뭣...!”

기습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남자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기습을 주력으로 삼는 암살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방심하기를 바라고 내지른 마지막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기습이, 아무리 어설펐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막힐 줄이야.

반쯤은 마구잡이로 휘두른 칼날은, 예진의 이빨에 가로막혀 있었다. 말 그대로 턱을 사용해 날아오는 칼날을 잡아챈 것이다.

날카로운 고양이 수인 특유의 송곳니가, 칼날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실제 고양잇과 짐승을 연상시키는 말도 안 되는 치악력이었다.

‘이게 무슨 서커스도 아니고...!’

남자가 당황하든 말든, 무심한 표정을 한 예진은 그대로 턱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그러자 곧바로 칼날은 내구도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듯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검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바스라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맛 없어.”

“...”

“발악은 다 했어?”

쓴 맛이 난다며 바스라진 뼛조각을 바닥에 뱉어내는 예진을 남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드래곤 뼈다. 최고급 장비를 만드는 데에 쓰이기도 하는 그 드래곤 본. 그걸 치악력만으로 부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게 세계 랭킹 3위와의 격차인가.’

드래곤본을 단순한 치악력만으로 바스라트릴 정도의 신체능력이라면, 방금 전에 소환했던 군세도 원한다면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을 터.

한마디로, 가지고 놀아졌다. 자신의 발악은 그저 눈앞의 괴물에겐 샌드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주 망신살은 다 뻗치는군.’

랭킹 3위의 능력을 무시하다가 역추적을 허용하고, 만반의 상태라면 웬만한 랭커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한 정면에서의 싸움에서마져 랭킹 2위에게 압도당했다. 물론 상대가 상대인만큼 객관적으로 보면 충분히 당연함은 물론이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었지만, 스스로의 계획에 랭킹 1위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차질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남자였기에 허탈함과 쪽팔림은 배가 되었다.

남자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마지막 방법은 말 그대로 자폭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방법을 사용하기 전에 말로 시간을 벌어둔 뒤 도망칠 각이 나올지 간을 볼 생각이었다.

몇 번의 고의적인 기침으로 떠는 몸을 다시금 바로잡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너희들을 얕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그러나 아직 한 가지의 수가..”

“난 뼈를 싫어해.”

남자의 일장연설이 시작하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 한 마디가 시작부터 설득의 흐름을 끊어놓았다.

“...뭐?”

맥락이라곤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모를 헛소리에 저도 모르게 반문하자, 기다렸다는 듯 뒤이어 부연설명이 시작되었다.

“때리는 맛이 없어. 툭 치면 바스라지고. 이미 죽어서 그런가 타격감이라는 것 자체가 없더라고.”

“그게 당최 무슨­”

“같은 맥락에서, 난 언데드도 싫어해. 때리면 칠퍽거리는 소리가 나거든.”

남자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눈앞의 이 여자는 자신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만이 갑작스런 발화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래도 넌 꽤 성가셨으니까, 괜찮은 타격감을 보여주리라 믿어. 양심이 있다면 날 귀찮게 한 값은 치러야겠지?”

“...”

감정의 편린조차 찾아보기 힘든 무표정 사이로, 남자는 자신을 향한 짙은 살기를 희미하게나마 찾아냈다.

이대로 멍하니 앉아만 있으면 죽는다. 수를 아낄 때가 아니었다.

남자는 전과는 달리 거의 비어있는 인벤토리에서 미리 제조해 둔 두 개의 약물을 꺼내들었다.

둘 중 하나, 즉 검은 사기가 넘실거리는 약물의 제조식은 인간의 뇌수 1?, 드래곤의 피 1.5?, 소 눈알 한 조각, 레벨 100 이상 리치의 라이프 베슬 한 스푼, 그리고 고위 언데드의 신체 일부분.

마지막으로, 자신의 순수한 사기(死?)와 순수한 마나 용액까지.

복잡하고 요구하는 재료도 하나같이 까다로운 이 제조식으로 만들 수 있는 약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질병 테크트리용 물약.’

마법사 중에서 원소 계열 법사가 있듯, 흑마법사 역시 여러 하위 분류와 계열이 존재했다. 소환술, 마법 봉인, 저주 등등. 그 중에서 남자는 소환술과 저주에 특화된 흑마법사였다.

그러나 남자가 저주 스킬을 사용했듯, 한쪽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서 다른 분야에 손을 대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흑마법사가 종사하곤 하는 한 분야인 ‘질병’테크에도 약간의 조예가 있었다.

그가 이번에 만들어 둔 물약에 인챈트된 질병 효과는 바로 ‘언데드화 질병:전염성.’

마신 사람은 몇 시간 동안 ‘감염자’가 되어 hp가 아주 조금씩 깎여나가고, hp가 0에 달할 시 언데드가 되며, 감염자 근처에 있으면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가 든, 아주 간단하고도 별거 없는 효과를 지닌 물약이었다.

hp가 차고 넘치는 유저들 입장에선 걸려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인 효과였다. 레벨이 어느 정도 이상인 유저들은 hp가 깎이는 속도보다 자연 치유력이 더 높았으니까. 굳이 질병에 걸린 상태가 거슬린다면 사제 유저나 게임 내의 교회에 찾아가서 ‘치유의 축복’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현실과 게임 속은 상황이 천차만별이었다.

국내의 사제 유저는 이미 광신도들과 각 종교들의 교인들에 의해 핍박받아 해외로 뜨거나 잠적한 지 오래였고, 게임 속에선 수두룩했던 축복이 가득한 교회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hp도 일반적인 몬스터보다 부족하며 질병 스킬의 권한 내에 닿는 ‘일반인’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다.

남자는 질병 테크트리에 말 그대로 ‘찍먹’만 한 수준의 숙련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일반인, 그러니까 lv.1 유저 기준으로 위협적인 효과를 내는 물약쯤이야 ‘재료가 있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였던 재료의 부족이, 얼마 전 ‘동화율’상승의 보상으로 열린 인벤토리로 단번에 해결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낼 생화학 테러범이 내가 되는 거다.’

죄없는 유저들은 이러한 영향권에서 피해나갈 수 있고, 유저들을 핍박한 사람들은 죽는다. 거기에 죽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들이 무시하고 배척하던 의지 없는 ‘언데드’ 종족이 되어 지천을 떠돌게 된다.

말 그대로 완벽한 복수 그 자체였다. 남자는 자신을 악질적으로 괴롭혔던 여러 연구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검은 물약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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