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21. 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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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마신 거지?’
허공에서 나타나는 아이템들과 물약들. 그리고 그가 착용한 여러 장비들은 현대에선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을 띄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게임상의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는 듯한 모습. 그렇기에 예진은 남자가 사용하는 소모품과 장비들을 눈여겨봐 두었다. 그리고 모든 전투가 끝난 지금, 남자의 아이템을 포함한 모든 전력은 이미 파악된 지 오래였다.
보아하니 마나를 채우는 푸른 물약은 바닥난지 오래, 온몸에 두른 아이템은 그다지 등급이 높은 놈은 아닌지 위협적인 특수한 능력은 없었고, 지팡이는 마법에 사용되는 마나나 마기의 효율을 증폭시켜주는 성능을 지닌 중상급 품질의 기성품이었다.
거기에 방어구는 대(?)마법사용으로 맞췄는지 펄럭이는 로브였다. 로브는 마법 방어력은 높지만, 일반적인 방어력은 동급의 타 방어구에 비해 매우 떨어졌다. 파이터로서 로브를 낀 원거리 직업군은 그저 딜 잘 박히는 목표물에 불과했다.
아무런 장비와 소모품이 없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상대. 그게 눈앞의 남자의 전력이었다.
그랬기에, 예진은 눈앞의 남자가 검은 물약을 마시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물약의 정체가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저걸 마셔봐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예진은 ‘판타지아 온라인’내의 모든 아이템 및 장비들의 설명을 꿰고 있는 고인물이었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사기적인 장비들을 당장 저 남자에게 들려줘도 일대일 전투를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소환수들을 다루는 실력도, 본체의 전투력도, 센스도 하나같이 전번의 혜진이에 비해 후달렸기 때문이었다.
레벨 1짜리 고블린에게 성검 엑스칼리버를 쥐어 줘봐야 사용하기는커녕 들기조차 힘들어한다. 그게 딱 눈앞의 남자의 수준이었다. 그가 전투에는 그다지 사용하기 힘든 정신계 스킬에 포인트를 많이 투자한 걸 감안해도 기본적인 센스가 처참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마 게임 내에서도 pvp는커녕, 기본적인 레이드나 필드보스조차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마 pve, 즉 필드의 ai에 기반해 활동하는 몬스터들만 잡으며 장비를 맞추고 레벨을 올렸겠지.
‘자, 이제 무슨 짓을 하나 구경이나 좀 해볼까...’
그래도 나름 비장한 얼굴을 한 걸 보니 먹은 물약에 뭔가 특수한 효과가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남은 마기와 마나를 총동원해 스킬 하나를 연사했다.
“...좀비 소환?”
좀비. 언데드 하면 스켈레톤과 함께 가장 빠르게 떠오르는, ‘언데드’계열 몬스터의 얼굴마담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런 대중성과는 별개로, ‘판타지아 온라인’에서 ‘좀비’가 위치하고 있는 자리는 말 그대로 최하계층. 평균 레벨이 10 언저리인, 시도때도 없이 상위 개체인 구울에게 잡아먹히는 잡몹의 대표격인 존재였다.
“무슨 짓을 하나 했더니... 별 쓸모없는 짓을 하네.”
“과연 쓸모없는 짓일까?”
남자가 손짓하자, 생성된 좀비들이 어기적거리며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동속도가 일반인보다도 떨어지는 좀비의 특성상 모두가 모이기까진 한참이나 걸렸지만, 예진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의 마지막 발악을 지켜봐주기로 했다.
많은 흑마법사들을 상대해본 예진의 경험에 따르면, 저렇게 하위 소환수를 모아 고위 소환수를 연성해내는 흑마들이 종종 존재했다. 아마 저 남자 역시 비슷한 부류의 스킬이 있는 것이리라.
그녀의 예상대로, 좀비들은 이내 짓이겨지고 짓이겨져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마저도 덩치만 크고 실속은 없는 녀석에 불과했지만.
“거대 좀비라... 오랜만이네.”
좀비들 수십 마리를 투자해 만들어낸 녀석은 무려 레벨 60~70대의 몬스터, ‘거인의 유해’였다. 엄청나게 희귀하다는 거인족의 유해가 언데드로 일어난 녀석. 물론 단순한 시체이므로 거인족 본연의 힘에는 한참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꼴에 레벨은 높아서, 좀비나 스켈레톤을 필드 던전인 ‘무덤가’에서 사냥하던 초보자나 뉴비들을 죽이는 일종의 지역구 보스 역할을 했다. 60~70레벨이면 웬만한 중견급 이상 유저가 와야 처리할 수 있는데, 뉴비들만이 들리는 10~20레벨대 사냥터인 무덤가에 그런 유저들이 찾아올 리가 없었다.
한 마디로, 뉴비들은 녀석에게 반항할 생각조차 못한 채 마치 공포게임을 하듯 숨어서 몰래 사냥을 이어가야 했다.
그래도 반복적인 사냥을 질리지 않게 해 주는 일종의 자극제 역할도 겸임했기에, ‘판타지아’를 오래 즐긴 유저라면 누구나 추억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애증 어린 녀석이다. 무엇보다 의외로 매크로를 박멸하는 데에 좋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스킬도 사용하지 않은 가벼운 주먹질에, 불과 두 자릿 수 레벨대 소환수의 대가리가 그대로 분쇄되었다.
꼴에 언데드라고 생명력은 질겨 머리통을 잃은 몸통과 팔다리가 예진을 향해 쇄도했으나, 피할 가치도 없는 공격이란 듯이 예진은 검지와 엄지를 그러쥐었다.
딱.
가벼운 딱밤 한 방에, 팔다리가 하나하나씩 재가 되어 날아간다.
이내 몸통만 남아서 팔다리와 머리의 단면으로 검은 피를 쏟아내는 시체. 완전히 상대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준 예진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후련한 표정을 지은 남자를 천천히 노려보았다.
“정말로, 이걸로 끝이야?”
“...”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못해 좀비들을 소환하는 모습을 보고 흑마법사들 특유의 자폭기인 [시폭(??)] 시체 폭발 이라도 광범위하게 사용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럴 용기도 긍지도 없는 패배자였나.
물론 오빠에게 패배한 내가 이런 감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만큼 눈앞의 남자는 한심했다. 당장 목숨도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도 아니꼬웠다.
“재미없네, 너. 살려서 데려오란 오빠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쯧쯧거리며 혀를 두어번 찬 예진의 주먹이 남자의 명치를 기습적으로 꿰뚫었다.
치명적인 급소를 꿰뚫린 남자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질 즈음, 소환되었던 좀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개체가 망가진 도심 속으로 몸을 숨겼다.
품 속에, 하얀 물약 한 병을 숨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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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이와 예진이가 놈을 데리고 돌아온 건 아침 아홉 시가 지날 때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연유를 모르겠지만 계속 잠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도 된통 정신을 차리질 못해, 스스로에게 피로를 회복하는 버프를 걸어야만 했다.
어찌저찌 잠을 달아나게 하고 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청와대 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커다란 군용 차량에 탑승한 상태였다. 아마 압송 및 정보를 캐내는 데에 도움을 달라고 했었나.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보석을 더 준다는 말에 혹해 버리고 말았다. 딱 전에 이야기했던 화려한 저택과 보석들만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정부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울산광역시의 자수정 광맥을 통째로 넘겨드릴 테니, 정부에 협조하라’는 소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자수정 매장량만 무려 광구로 지정된 곳만 1억 톤이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진짜 1억 톤 맞다. 자수정 1억 톤. 이걸 어떻게 참아...
물론 울산광역시에선 장비나 자본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채굴이 2005년도 이후로 거의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내가 누군가. 위대한 마법의 총주인 드래곤 종족의 일원이었다.
‘그깟 채광 쯤이야 마법 좀 세심하게 쓰면...’
정부기관에 조금만 협조해 주고, 노력 조금만 하면 자수정 더미가 생겨난다. 심지어 질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울산광역시의 자수정은 세계적으로 품질이 인정받는 자수정이라고 미국의 국제보석협회에서 인정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나선 내게 선택지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보석이란 말과 위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자본력에 굴복한 유순한 드래곤이 있을 뿐.
울산광역시의 자수정은 붉은 빛이 섞인 보랏빛을 내는 것이 특징이라고 들었다. 보라색과 붉은 색의 자수정으로 가득한 방을 만드는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여긴 어딘가요?”
“어딘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겨울 님이 캐묻는다면 저희 입장에서야 알려드릴 수밖에 없지만요.”
“그럼 안 들을게요.”
굳이 이곳의 위치를 듣겠다며 정부 측 요원에게 미움을 살 필요는 없었다. 상대의 뒤에는 무려 자수정 1억 톤을 선뜻 건내신 물주님이 계시니까.
물론 채광량도 거의 없는 버려진 광맥이라 나라에선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어도, 1억 톤이란 이름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니 최대한 정부 측 인물들에게 유하게 굴 생각이었다.
막말로, 앞으로 또다른 콩고물이 떨어질지 누가 아는가.
그렇게 여차저차,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와 각종 서류에 싸인을 하고 난 뒤에서야 나는 정보를 캐내야 할 대상 앞에 자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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