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23. 비밀
* * *
저건 못 이긴다.
정확히는, 지금의 나로선 못 이긴다.
지하 2층, 그곳에 있었던 ‘무언가’를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이었다.
“...미친.”
한 나라를 넘어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가 된 뒤로, 단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존본능이 미약하게나마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계단을 내려오기 전까지 느껴지던 위화감은, 이제 나를 향한 선명한 살기로 변했다. 지금껏 느껴본, 심지어 나름 상위권 유저들이 포진해 있던 [헬반도]를 쳐부술 때조차도 느끼지 못한 위기감이 피부 위에 엄습했다. 단순한 살기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잠깐, 그런데 살기가 이쪽을 향한다는 건...’
...바로 코앞의 천장에 붙어있는 저 괴물이 나를 알아챘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은신 마법을 몇 겹이고 두른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내 얼굴이 위치한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용언 마법: 아스트라피(Αστραπ)].
기척을 들켰다면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는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은신 마법들과 함께 미리 준비해두었던 용언 마법이 즉시 사출되었다.
일반적인 마법 체계와는 궤를 달리하는 파괴력을 담은 룬 문자가 허공에 수놓아졌다. 저 괴물이 내게 발산하던 살기가 순간 옅어졌다. 다행히도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는 문자들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딜러, 그것도 한순간 고화력을 낼 수 있는 마법사를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파는 멍청한 실수는 그 고인물들이 귀엽다고 아끼는 뉴비들조차 하지 않는 실수였다.
‘생각보다 지능은 낮은 건가?’
녀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으로 내려와 허공을 떠다니는 룬 문자를 잔뜩 뒤틀린, 유추해 보자면 손에 가까운 기관으로 만지려 들었다. 그러나 녀석의 단순한 호기심이 충족될 수는 없었다.
용만이 읽을 수 있다는 룬 문자 수십 개가 모여 이룬 문장에 담긴 힘, 순수한 파괴력이 담긴 한 줄기의 섬광이 어두운 지하실 내부에 작렬했다.
환한 빛이 잦아들고, 나는 <비행>을 통해 날아올랐다. 섬광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저 연기 안에 녀석이 아직 살아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진 걸 보아 분명히 어느정도 타격을 입히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살기는 오히려 한층 강해졌다.
녀석은 명백히 나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보랏빛 안광이 불길하게 번뜩였다.
연기가 걷히고 녀석의 실루엣이 드러나려던 순간 사자의 갈기가 달린 괴물은, 말발굽 소리를 내며 연기를 뚫고 내게 달려들었다.
인간의 손으로 보이는 무언가가를 내밀어 나를 잡아채려는 움직임에, 나는 재빨리 <점멸>을 통해 거리를 벌렸다.
연기 밖으로 나온 녀석은 몸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었다. 몸통의 중간. 그 어떤 종족이든 이족보행을 하는 생물이라면 가장 중요한 장기가 위치해 있어야 할 부위에 수박만한 구멍이 뚫렸는데도 녀석은 팔팔하게 날뛰었다.
그러나 뛰는 놈은 나는 놈을 못 이긴다. 이는 단순힌 비유만이 아니라 실제 싸움에서도 어느 정도는 적용되는 속담이었다.
<비행>마법을 통해 위치를 바꾸며 공중에서 견제용 마법들을 시전하니, 녀석은 따끔거리는 견제기들을 뚫어내며 내 속도를 따라올 엄두를 못 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벌고, 다시 한 번 용언 마법을...’
생각보다 쉽게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 같아 긴장이 풀리려던 순간.
챙강.
잠깐 견제용 마법을 캐스팅하던 사이 보험용으로 신체 전반에 걸어 두었던 수겹의 보호마법이 단 한 순간에 깨져나갔다. 녀석을 계속해서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다행히 충격량이 설정해둔 보호 마법의 성능 이상으로 크진 않았는지 공격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내 몸은 작용 반작용의 원리에 따라 그대로 튕겨나가 안쪽의 시설에 부딫혔다.
당연히 직접적인 공격에 깨진 지 오래인 보호 마법이 벽에 부딫힌 충격을 완화해 줄 리가 없었다.
재빨리 보호 마법을 캐스팅하며,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농락하던 괴물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마법?”
녀석의 세 번째 손이, 마나를 응축시켜 하나의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육탄전 원툴이 아니었네.”
가장 높은 딜을 한순간에 넣을 수 있는 <아스트라피>를 맞고도 멀쩡한 몸에, 마법까지 쓸 수 있으며, 육체적 능력은 랭커급. 완전히 사기캐 그 자체였다.
그러나, 상대방이 사기 캐릭터라고 해서 이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단순한 성능만으로 모든게 결정된다면 쓰레기 종족인 용족을 고른 내가 랭킹 3위까지 오르는 것도 불가능했겠지.
언제나 방법은 존재한다. 그게 바로 내 신념이었고, 나를 랭커 자리까지 올려준 원동력이나 다름없는 한마디였다.
나는 다시금 마법을 캐스팅했다. <비행>과 <점멸>이 존재하는 한, 기동력 면에서는 내가 한참이나 우위에 있었다. 다시금 거리를 벌리면서, 이번엔 상대방의 원거리 공격을 주의해야만 했다. 지능이 높지 않으니 복잡한 고위 마법이나 응용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스킬을 사용하진 못할 터.
승산은 충분했다.
...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녀석의 등에 날개가 돋아나기 전까진.
용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강하고, 호전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지만... 결국 그것도 생물. 생존 본능 앞에선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대폭팔(Explosive)> <점멸(Blink)/>
나는 그 즉시 폭팔 마법으로 건물의 중심부를 뒤흔든 다음, 냅다 <점멸>을 통해 상층부로 줄행랑을 쳤다.
굉음과 함께 연구소는 무너저내렸고, 그 괴물 키메라는 콘크리트 더미 밑에 깔려 영원히 바깥으로 나올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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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
여러 개의 생물이 합쳐진 모습의 괴물들을 총칭하는 단어이자, 유저 수 세계 1위 게임 ‘판타지아’의 오랜 떡밥.
한 마법사 npc, 정확히는 한 최고 등급 던전의 보스이자 적대적 관계인 리치 npc를 처치하고, 그의 방에 숨겨진 마법진을 발동해 벽 뒤의 비밀 실험실에 들어가면 만드는 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만드는 방법이 너무나 잔혹한데다 현실적으로 판타지 세상에서 우라늄 농축액 같은 현대의 기술이 필요한 재료를 전부 모을 수도 없었기에 그저 오래토록 ‘키메라 만드는 법’은 떡밥으로만 남았다.
‘아니, 이젠 떡밥도 아니지. 사실상 판타지아는 접속 불가로, 섭종한 상태나 다름없으니 맥거핀인가.’
키메라는 나름 유명한 떡밥이었다. 국내 번역본에선 검열 탓에 제대로 읽어볼 수는 없었지만, 영미판, 그러니까 번역이 첨가되지 않은 원작에서 읽어볼 수 있는 리치 npc의 실험 기록이 굉장히 고어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늘 자극적인 떡밥을 좋아한다. 관심을 쏟기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키메라에 관련된 2차 창작물이나 괴담도 돌았었다.
“...그 키메라를 실제로 만들었을 줄이야.”
나는 고의로 무너트린 연구소의 잔해 위에서 머릿속으로 녀석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분명 목덜미에는 핏빛으로 물든 황금색 갈기가 나 있었다. 고화력 용언 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탓에 전부 흔적도 없이 타버렸지만, 그건 분명 사자의 갈기였다. 그렇다는 건 그 갈기가 나 있던 거죽 역시 사자의 것이리라.
물론 일반적인 사자의 갈기와 거죽이 <아스트라피>를 맞고 형체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는 데다가 인간에 가까운 형상을 한 뒤틀린 팔다리. 거기에 이족보행이 가능한 신체. 누가 봐도 일반적인 사자가 변형될 만한 범위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녀석의 신체적 특징을 여러 종족 및 직업군의 특성에 대입해봄으로서 대충 어떤 부류의 유저의 어느 부위를 사용해 붙여놨는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단순하긴 하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사용하는 마나의 순도 역시 높았다. 그러니까 마나 서클이 그려진 심장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어둠 속에서도 한낮과 다름없는 선명한 시야를 얻을 수 있으며, 은신을 꿰뚫어볼 수 있는 마안을 지니고 있었다. 보랏빛의 안광을 확인했기에 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추가로 다리는 켄타우로스, 혹은 발 수인의 다리였다. 달릴 때마다 종종 말발굽 소리가 났고, 무엇보다 다리 부분만 체모가 갈색으로 상체와 크게 차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등 뒤에 튀어나왔던 날개. 그건 마족이나 용족의 것이 아니었다. 깃털이 달려 있었으니, 아마 조인의 것이겠지.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준랭커급 유저들이 희생되어 만들어진 실험체였다.
나름 완성에 가까운 형태였는지, 몸 내부의 장기는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이어져 있었다. 물론 외관은 못 봐줄 정도였지만, 이곳의 연구자들이 실험체의 외관까지 신경써줄 정도로 선하리라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추정하기로, 이 비밀스러운 지하 실험실의 인간들은 이종족의 생태를 연구하는 것도 모자라 ‘판타지아’에서도 금기로 여겨지던 금술에 발을 들인 모양이었다.
‘...분명 암시장에 팔려갈 뻔했을 때, 납치범들이 이종족 유저들에 대한 인체 실험이 각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했었지.’
인체 실험이라길래 단순히 약재나 마약으로 사용이 가능한 일부 종족의 신체를 탐구해보거나, 심해봐야 내부 장기를 들어내 그 내부의 구성요소를 알아내려는 실험들이리라고 생각했다. 설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인간이었던 사람들의 사지를 잘라 붙이고, 장기를 연결하고, 산 채로 피를 뽑아내는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상상보다 더하다고, 이미 일반적인 유저는 물론이고 인간 수천은 가볍게 학살할 수 있는 괴물을 인류는 결국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이런 놈들이 한국에만 있을 리가 없어. 심지어 더 강한 놈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해..’
이 키메라라는 녀석들이 강한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 역할을 하는 장기들, 예를 들자면 방금 전의 키메라와 같이탱커의 튼튼한 거죽, 검사의 팔근육, 마법사의 심장, 격투가의 다리와 같이 특정한 직업군들이 주로 사용하는 부위를 합성하면 말 그대로 약점이 없는, 메리트 없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존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이한 단점은 한마리를 만드는 데에만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깨지며 재료인 강한 실험체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는 점이었지만, 선진국쯤 되면 연구비 걱정은 거의 없을 것이며 적합한 실험체 역시 구할 수 있는 루트가 마련되어 있을 터.
그러니 이 실험의 관련자들과 후원자인 국가의 높으신 분들은 변수가 많은 유저들에게 장단을 맞춰 주며 무릎을 꿇고 국가 간 갈등 및 문제해결을 부탁하는 것보단, 그보다 훨씬 강하고 조종하기도 쉬운 괴물을 만들어내는 편이 수지타산에 맞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생각을 외국인이라고 안 했을 가능성은 역시 없었다.
‘만약 그 인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여러 나라들이 전부 이런 키메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면...더 강한 키메라가 수백 마리쯤 더 존재해도 안 이상해.’
유저들은 국가와 사회의 입장에서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불순분자에 불과했다. 그들 역시 과거에 같은 인간이었고, 개개인이 큰 힘을 지니고 있기에 장단에 맞춰 주는 것일 뿐. 당장 우리가 힘을 되찾기 전에 받은 취급만 봐도 국가가 유저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원하는 대로 조종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면... 아마 비밀스럽게 실천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몸의 변이 이후 주변인과 관계를 끊어, 인간관계가 굉장히 미약해 실종되어봐야 신고조차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