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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귀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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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지같은 게임 속에 갇히게 된 지도 벌써 5년째다.
그동안 꽤나,
아니.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고 좁은 골목을 숨어 다니며, 쓰레기를 뒤져 깨진 병으로 무장했다.
알맹이가 사내새끼인 여자애를 덮치려 드는 미친놈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힘껏 꽂아 버리며 첫 살인을 저질렀다.
그 충격에 벌벌 떨며 웅크리고 있다가,
놈이 가지고 있는 수통 속 보드카 한 모금에 기운을 차렸다.
술기운에 힘입어 총 든 또라이들의 소굴에 잠입했다.
그때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이 육체의 재능으로 한 놈씩 멱을 따 버렸다.
당시에는 명칭조차 제대로 알지 못 했던 모신나강이라는 방망이 하나를 손에 넣었다.
뒤통수에 개머리판을 휘두르기도 하고 배때지에 총구를 쑤셔 박아 불을 뿜기도 했다.
여자애 하나한테 전멸당하는 멍청이들의 아지트를 차지하자,
그 뒤로 제 몸 하나 정도는 간수할 수 있을 정도로 사정이 괜찮아졌다.
넝마 하나 걸친 여자애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 했다.
하지만 방탄복을 껴입고 총칼로 무장한 여자애, 그것도 무장세력 하나를 홀로 씹창내버린 여자애라면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물론 소문을 믿지 않고 애새끼 대하듯이 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 중 한 놈을 본보기로 삼아 예절을 주입해 주면, 나머지는 저절로 공손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멍청이들을 만나 참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아주 가끔 정상인들과 조우하여 그들과의 거래로 멍청이들에게 총질을 하기도 하고,
이따금씩은 ‘바깥’에서 찾아온 사람들과 접촉하여 함께 멍청이들의 소굴을 털어 버리기도 했다.
그 시점에서 나는 이 망할 도시를 벗어나 바깥으로 탈출할 능력이 충분히 되었다.
그러나,
마치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나는 결코 바깥의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갇힌 이 게임의 배경은 이 도시뿐이라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막연히 추측하며,
이 거지같은 게임을 실컷 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게 되자, 내게는 어느새 별명이 하나 생겨 있었다.
꽐라 마녀.
솔직히 말해 억울했다.
맨 정신으로 있기 불편해서 보드카 병을 옆구리에 끼고 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축복받은 무색무미무취의 음료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작전 수행 능력이 증가했다면 증가했겠지.
컨디션 난조? 어림도 없다.
술에 취해 헤롱대는 모습 따위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건만,
그저 내 주위를 항상 감도는 알코올의 향 때문에 이런 거지같은 별명을 만들었으리라.
차라리 내 머리칼이 백금색이니까 그런 쪽으로라도 하나 지어 주면 덧나나.
하얀 마녀, 백금 마녀 이런 괜찮은 거 다 냅두고 꽐라 마녀라니.
“Cyka...”
(씨발...)
이제는 입에 착착 달라붙게 된 이국의 언어로 걸쭉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군홧발로 내 앞에 드러누워 있는 멍청이의 다리를 툭툭 걷어차 보았다.
별 반응이 없다.
싸구려 츄리닝에 너덜너덜한 방탄조끼 하나 걸친 멍청이는 침묵을 유지했다.
마빡에 바람구멍이 하나 뚫린 채, 멍청이였던 것으로 퇴화해 버린 것이다.
하얀 붕대가 둘둘 감긴 모신나강인지 뭔지 하는 방망이를 어깨에 걸쳤다.
스코프 같은 건 없어도 상대의 뚝배기를 털어버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에,
총신의 위쪽에 아무 것도 달려있지 않아서 어깨에 턱턱 걸치기 좋은 모양새였다.
투명한 내용물이 찰랑거리는 보드카 병을 입에 대고 병나발을 불었다.
알코올의 기분 좋은 온기와 함께 목구멍으로 깔끔하게 넘어가는 청량감이 느껴진다.
"후..."
이게 바깥세상 보드카 맛이지.
어디서 중기관총 포드 하나 손에 넣었다고 나대는 미친놈 하나 정리하느라 약간 미지근해져 있기는 했다.
허나 그렇다고 무미 무취의 투명함이 어디로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한 모금 마시면 하수구에 흘려버리고 싶어지는 싸구려 증류주.
보드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그것들과 비교하면 아주 그냥 천지 차이였다.
이게 보드카고 이게 섹스다.
물론 남정네 좆맛 따윈 본 적도 없고 맛볼 생각도 전혀 없지만,
어쨌든 내 애인은 5년 전부터 이 무색투명한 놈이었다.
인생의 동반자를 한 모금 더 들이키며, 나는 잠시 쉬어갈 겸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공수해 온,
3선의 시그니처 디자인을 소유한 다이아스(Daias) 레깅스를 이런 더러운 폐허 바닥에 더럽힐 수는 없었다.
발바닥을 완전히 땅에 붙인다.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으며 엉덩이를 발뒤꿈치에 가까이 한다.
슬라브식 스쿼트.
어디든 앉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법의 자세다.
옥상 난간에 이러고 앉아서 멍청이들의 우두머리에게 슬라브식 저격 맛을 보여준 적도 있었다.
멍청이들답게 얼빠진 표정으로 내 빵댕이를 올려다보는 모습들이 아주 걸작이었는데.
슬라브식 저격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기에 더 이상 그 면상들을 보지 못 하게 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니. 사실 아쉽진 않다.
그 새끼들은 내가 단골로 드나들던 양조 집을 박살내 버린 놈들이니까.
맛대가리는 드럽게 없어도, 질보다 양이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해서 좋았던 곳이었는데.
술이 맛이 없으면 딴 데로 갈 것이지 왜 멀쩡한 집구석을 부수고 지랄이야. 개 같은 자식들.
기분이 나빠졌을 땐 보드카다.
내 최고의 파트너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
조끼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싸구려 해바라기 씨를 한 줌
바스락.
꺼내들기 전에,
어깨에 걸쳐 두었던 모신나강의 총구를 아래로 내림과 동시에 견착 자세를 취한다.
주변에 이 새끼 친구가 남아 있었나?
내가 전부 다 저세상 술자리에서 건배할 수 있게 만들어줬을 텐데.
처음에 계산한 머릿수도 딱 맞았었다.
그럼 제 3자인가?
사방에 묵직한 중기관총 탄환을 흩뿌려대는 미친놈 근처에서 버티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보통 또라이가 아닐 듯하다.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소리가 들려온 저 구석탱이 너머에 집중한다.
어깨든 대가리든 어디든 들이미는 순간, 멀쩡하게 다시 집어넣을 생각 마라.
그렇게 잠시 슬라브식 조준을 유지하고 있자,
이내 소음의 주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삭. 타닷, 탓.
“...허?”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고 있던 나는,
그 정체를 확인하게 되자 무심코 허탈한 목소리를 내뱉게 되었다.
개새끼였다.
욕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개자식이었다.
더 순화하면 강아지. 더더욱 상냥한 말로 멍멍이였다.
그것도 보통 개새끼가 아니라,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새하얀 슈퍼화이트 개자식이었다.
저 귀티가 줄줄 흐르는 녀석은, 이런 반쯤 망한 도시에 있을 법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깥 세력?
바깥에서 데려온 사냥개 같은 놈인가?
실전에 투입하기엔 좀 많이 작아 보이긴 하는데.
그런 생각에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점차 나에게 다가오는 하얀 강아지를 주시했다.
총구를 계속 겨누고 있음에도 그것을 위협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순진한 얼굴로 어느 새 내 발치까지 다가온 녀석.
그에 나는 견착을 풀고, 장총을 허벅지 안쪽에 걸쳐 놓았다.
놈이 허튼 짓을 하는 순간 손을 뻗어 입을 막아버릴 생각이었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새하얀 강아지.
녀석과 미묘한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나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찾았다.”
놈이,
말을 했다.
개자식의 탈을 뒤집어쓰고,
사람의 언어를 내뱉은 것이다.
“?!”
내가 더욱 놀라 뒤집어질 뻔한 것은,
이 새끼가 러시아어가 아니라 한국말을 했다는 점이다!
하도 거지같은 일을 수없이 겪으며 멘탈이 깎여나간 부작용으로 머릿속에서 모국어가 점차 지워져 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개새끼가 뱉어낸 말이 어느 나라 것인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정신이 혼란해져 있는 동안, 놈은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설마 5년 동안이나 이 안에서 버티고 있을 줄은 몰랐어.”
“...무엇? 너 무엇 [개]이냐?”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를 해 보는지라,
대가리 속에서 한국말이 반쯤 탈출한 내가 느끼기에도 이게 맞나 싶은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심지어 ‘개’는 러시아어다.
내 엉터리 질문을 들은 그 강아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놈은, 몹시 슬픈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모국어도 제대로 못 하고... 그동안 엄청 힘들었구나.”
대충이나마 그 뜻을 알아먹은 나는,
내가 5년 동안 개고생을 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새끼 때문에,
내가 이런 몸으로 변한 채 이 거지같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놈의 정체에 대해 따져물으려 했지만, 머릿속에서 단어가 제대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Cyka! 너 무엇이다! 정...정츠...”
“그래. 내 정체가 뭐냐고?”
녀석은 그렇게 되물으며, 점차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슨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새하얀 몸이 빛을 발하며 내 시야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널 구하러 온 관계자야.”
“무엇! 내 눈! Blyat!”
“너무 늦게 온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원래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편의를 봐 줄게.”
원래 세상.
그 단어의 의미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나는 드디어 이 거지 같은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법보다 총알이 가까운 이 미친 세상에서, 평화로운 현대로 귀환하는 건가?
“세상! 원래 세상 돌아가다?! 종말?!”
“종말이 아니라 정말.
그래. 정말이야. 부디 행복하게 살길 바래.”
“[왜 이렇게 늦게 오고 지랄이야! 씨발 내가 5년 동안 얼마나!]”
눈앞이 점차 새하얘지는 와중에, 나는 감격과 분노가 반쯤 섞인 러시아어를 마구 지껄여 댔다.
“아...?”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감과도 가까운 그 불안한 느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게임에서 벗어나면 이제 총이고 나발이고 모두 소용없어질 터인데.
뭣 때문에 이토록 불편한 거지?
잠시 후 시야가 완전히 하얗게 물들고 나서야,
나는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보드카! 내 보드카! 집에 모아놓은 컬렉션!!]”
바깥에서부터 보수 대신 받거나 멍청이들의 윗대가리를 처치하고 은신처를 털어갈 때,
가끔씩 발견할 수 있었던 고오급 보드카들.
조금씩 아껴먹으려고 꿍쳐 두었었는데, 주인을 잘못 만나서 그대로 버려지게 생겼다.
그게 다 얼마짜린데! 안 돼!
“[내 새끼들 두고 왔다고! 아직 보내지 마!!]”
허나 그 새하얀 개새끼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져 버렸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Нет(안 돼)!! Нет!!!”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던 도시 한쪽에 갑작스레 나타난 백색 섬광.
근처 무장세력에서 파견된 정찰조가 섬광의 발생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 곳에서 발견한 것은,
하얀 붕대가 둘둘 감긴 모신나강 한 정과,
내용물이 반쯤 비워진 보드카 한 병뿐이었다.
무법의 골목에 알코올 향을 퍼뜨리고 다니던 마녀는,
그렇게 도시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