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브식 스트리머-2화 (2/57)

〈 2화 〉 귀환 (2)

* * *

언제 내렸는지도 모르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얗다.

방금 그 개자식이 쏘아낸 빛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간에 충분히 하얗다는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 존나게 하얀 천장이다.

먼지도 얼룩도 없이 아주 그냥 깔끔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내 은신처의 천장은 이따위로 생겨먹지 않았다.

그것을 인지한 시점에서,

대가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르게 누운 자세에서 재빠르게 몸을 비틀어 포복 자세를 취한다.

그와 동시에 바지춤의 홀스터에 꽂혀 있던 마카로프 권총

이 없다.

그 전에 홀스터부터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내 손은 공허하게 다이­아스 레깅스의 옷감을 짚어낼 뿐이었다.

곧바로 반대편 손을 뻗었다.

그저께 손질해 놓아 아주 날이 잘 드는 군용 대검을

꺼내들지도 못 했다.

이 새끼는 또 어디로 간 거야.

“아후옐...?”

(뭐야 시발...?)

아주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엎드린 상태로 두 손을 바쁘게 움직여 온 몸을 더듬어 보았다.

껴입고 있던 방탄조끼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다이­아스 트레이닝 집업과 레깅스를 제외하면, 아니 시발. 군화도 없어졌네.

아무튼 간에 기본적인 의류를 제외하고는,

내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무장이란 무장은 싹 다 압수당한 상태였다.

짧은 순간에 공간을 이동하는 것으로 모자라,

무장해제까지 당했다고?

그에 혼란을 넘어 등골이 오싹하게 될 무렵,

그 빛나는 개자식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원래 세계.

가물가물한 한국어들 속에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그 단어.

그것을 기억해 낸 나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몸을 포근하게 받쳐 주는 침대의 존재가 그제야 느껴진다.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

망할 도시에서는 절대로 누리지 못 할 혜택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멀끔한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책상과 의자. 작은 탁자와 의자.

싱크대. 선반. 옷장. 냉장고.

잠금장치 달린 문. 또 다른 열린 문. 베란다.

빠르게 탐색을 마친 결과,

사람 한 명이 생활하기 적절해 보이는, 그냥 평범한 공간이었다.

아이보리빛 벽지는 총알 자국 따위 하나도 없이 깨끗하기 그지없다.

거지같은 도시에서는 구경조차 하지 못 할 평화로운 공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원래 세계.

나는 결국 돌아왔다.

그 엿 같은 곳에서 5년 동안이나 구른 끝에,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이다.

감격이 밀려들어온다.

지옥에 떨어졌다가 기어 올라오는 데 성공한 느낌이다.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그냥 기쁘다. 존나게 기쁜 거 같다.

눈물에 시야가 흐려지는 일 같은 건 없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그 좆같은 도시에 다 버려두고 왔다.

그냥, 그냥.

시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냐. 이게 아니야.

오늘은 그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날이다.

존나게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좀 더 기뻐해야 한다.

기뻐할 수 있다.

허나 어떻게?

뭘 어떻게 해야 존나게 기쁨을 표출할 수 있는 거지?

이 푹신한 침대 위에서 방방 뛰어야 하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코사크 댄스라도 한 바탕 추어야 하나?

그딴 짓을 한다고 내가 기뻐할 수 있을까?

가슴 속에 답답하게 얹혀 있는 듯한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응어리라는 게 존재하기는 했던 건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열린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예상대로 화장실이다.

깨끗한 타일. 변기. 세면대. 샤워기.

욕조는 없지만 상관없다. 그딴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세면대 위에 붙어 있는 망할 놈의 거울이다.

대리석인지 세라믹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하얗고 매끈한 세면대.

그 놈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대충 짧게 자른 생존형 머리스타일의 백금발 머리카락.

그 밑으로 뭔가 고급지게 생긴 이목구비가 사납게 일그러진 채 이쪽을 노려본다.

존나게 흐리멍텅한 잿빛 눈동자에 시뻘건 광기가 스며들어 있다.

5년 전부터 내가 뒤집어쓰게 된 껍데기의 모습 그대로다.

그 때보다 키가 좀 자라긴 했나? 모르겠다.

신체에 뭔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쓸 만큼 그곳에서의 삶이 평화롭지는 못 했다.

그래.

비록 몸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 했지만,

그 좆같은 삶을 벗어나게 됐으니까, 이젠 기쁘다. 행복하다.

기뻐해야 한다.

꽐라 마녀가 들어가 있는 거울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거울 속의 빌어먹을 년이 웃었다.

아니.

아니야, 시발.

저건 웃은 게 아니다.

입꼬리만 위로 히쭉 끌어올리면 뭐 하나.

저 무채색의 눈깔은 이미 맛이 가버렸는데.

웃어야 한다.

존나게 우스웠던 일을 불러오기 위해 머릿속의 기억을 뒤적거린다.

웃긴 기억. 뭐가 있을까.

멍청이 둘이 도망가다가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에 내가 방아쇠를 당겨가지고 일타쌍피로 머리가 뚫린 일?

거울 속 병신의 눈꼬리가 슬쩍 휘어진다.

효과가 있다.

또 뭐가 있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르는 대전차지뢰 갖다가 온 몸을 두르고 나 쏘면 좆될 거라면서 협박하던 거?

그 새끼 정작 대가리엔 아무것도 안 둘러가지고 마빡에 바람구멍 뚫려 뒤졌는데.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이것도 효과가 있다.

신나서 다음 기억을 열심히 뒤져보던 나는,

이내 머릿속 기억 서랍장을 거칠게 밀어 닫았다.

이렇게 실실 쪼개면 뭐 하나.

이건 그냥 웃긴 거지,

행복이랑은 거리가 먼데.

거울 너머의 년은 한심하다는 듯이 냉소를 띄어 보인다.

쳐 웃지 마. 니 얘기니까.

스스로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푹신푹신한 침대에 털푸덕 몸을 던진 뒤, 깨끗한 흰색 천장을 바라보았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원래 몸만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대가리까지 반쯤 나가리당한 모양이다.

신체와 정신이 50퍼센트씩 나라는 놈을 이루고 있다면,

나는 이제 25퍼센트짜리가 된 건가?

쩜오도 아니고 쩜이오?

지랄 났네.

그 개 같은 곳에 보드카만 두고 온 줄 알았더니,

내 4분의 3도 거기다가 내버려 뒀을 줄이야.

아. 그래. 보드카.

아까 마시던 보드카가 간절해지는 순간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구석을 여기저기 뒤져 가며 마실 거리를 찾아보았다.

없다.

입에 처넣을 수 있는 거라곤 냉장고 속의 생수 한 병밖에 없다.

기껏 돌아와 놓고 굶어죽게 생길 판이다.

“Cyka...”

그렇게 죽으면 진짜 억울해 뒤질 거 같은데.

아니지. 이미 죽었으니까 더 죽을 수가 없나?

자꾸 머릿속에서 별 개소리들이 판치는 것을 보니, 알코올이 필요한 시점이다.

집업 앞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아까 마실 것을 찾다가 책상 위에서 발견해 꿍쳐 두었던 놈이다.

열어 보니 지폐들과 카드 두 개가 들어 있다.

지폐를 모조리 꺼내 보니 초록색 열 장과 노란색 두 장이다.

한국 통화가 원이었나. 그러면 초록 10만원에 노랑 10만원. 20만원이다.

물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정도면 보드카 한 병은 살 수 있겠지.

카드 두 장도 꺼내서 살펴보았다.

한 장은...

시발, 뭐냐 이거.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겠는,

무표정한 백금발년의 면상이 카드에 박혀 있었다.

심지어 머리 스타일도 지금과 다르게 매우 단정한 상태다.

그 옆에 큼직하게 적혀 있는 글자는... 이거 뭐라고 읽더라.

“주...밍. 긍록증.”

주밍긍록증. 주밍긍록증...

아. 주민등록증.

이게 있어야 술을 살 수 있댔나. 아마 그랬을 거다.

그래도 내 대가리가 한국의 기억을 완전히 갖다 버리진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보드카 사먹는 데에 필요한 지식만 남아있는 것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보드카를 들이킬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아무튼 주민등록증, 그러니까 신분증을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이게 이름 같은데.

“이...리나.”

이리나.

꽤나 입에 잘 붙는 이름이라 러시아 쪽인 줄 알았더니,

옆에 한자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 이름이 맞는 모양이다. 어떻게 읽는 건지는 모르지만.

[xx1217 ­ xxxxxx]

[서울특별시 ...]

나머지 정보들은 대충 생년월일과 도시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어차피 신분증이 있으니까 합법적인 성인이고,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기에 멀리 가지 않아도 보드카를 살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의 카드는...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 체크카드일 것이다.

이건 뭐, 나중에 알아보자. 내겐 현금이 있으니.

대충 지갑도 다 뒤져봤으니, 바깥공기를 마실 차례이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에서 사먹는 보드카의 맛이라니.

아아. 너무나도 기대된다. 군침이 싹 돈다.

아까 옷장에서 발견한,

대마초 같은 모양이 그려진 다이­아스 캡모자를 눌러 썼다.

꼴사나운 생존형 머리스타일을 감출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돈 남으면 미용실도 들러야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잠금장치가 설치된 문 앞으로 걸어갔다.

“Oy.”

현관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실소를 흘렸다.

삼선의 디자인이 인상적인 다이­아스 슬리퍼.

이것도 오래간만이네.

거기서는 너덜너덜한 짝퉁밖에 없었는데, 이건 어떨련지 모르겠다.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이­아스로 무장한 나는,

현관문을 열고 바깥세상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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