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귀환 (3)
* * *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좁은 복도가 나왔다.
복도의 끝으로 걸어가니, 방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계단이 드러났다.
슬리퍼 신긴 발을 움직여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갔다.
층계참 하나를 거쳐서 내려오니, 출입문이 보인다.
바깥세상을 맞이할 수 있는 입구다.
“...”
솔직히,
약간 망설여지기는 했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잘 꾸며진 가짜인 것은 아닐까.
빛나는 개자식이든 뭐든, 죄다 내가 보았던 환상일 뿐이고,
나는 여전히 그 좆같은 도시에 갇혀 있는 상태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의심은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건물의 출입문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바깥공기.
그것을 들이켜는 순간에, 이미 답을 얻은 것이다.
냄새가 정돈되어 있다.
격전지에서 흘러들어오는 매캐한 화약 냄새.
술 취한 멍청이가 골목에 싸갈긴 암모니아 냄새.
폐허에 바람이 들 때마다 풀풀 날리는 답답한 먼지 냄새.
이 모든 것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마치 현실의 평화로운 일상을 표현하듯이,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휘감은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밖으로 나왔다.
반쯤 부서지고 여기저기 스프레이 칠이 되어 있는 건물들은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멀끔하게 지어진 것들이 여기저기 우뚝 세워진 채,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현실감을 일깨워 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파랗다.
뭉게구름 한 조각이 둥실 흘러가고 있다.
색이 반쯤 빠져나간 듯한 그 도시의 하늘과는 상당히 분위기 차이가 있었다.
끝내준다.
내 대가리만 정상이었어도 좀 더 괜찮은 방식으로 이 기쁨을 만끽했을 텐데.
내가 빠져나온 건물의 위치를 잘 기억해 두고,
나는 골목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살아오며 체득한 걸음걸이로 인해,
슬리퍼임에도 내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물론 지금 신고 있는 다이아스 슬리퍼가 내 발에 꼭 들어맞아서 가능한 일이다.
며칠 신으면 맛탱이가 가는 짝퉁 삼선으로 발소리를 죽이려 할 바에야,
차라리 맨발로 걷는 쪽이 낫다.
아무래도 이건 정품인 것 같구만.
발바닥에 착착 감기는 맛이 심상치가 않다.
역시 다이아스야.
되도 않는 슬리퍼 예찬을 하면서 길을 걷다 보니,
맞은편에서 행인이 걸어온다.
“...!”
지금 내 수중에 무장이 없음을 깨닫고 순간 움찔 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허나 상대는 내게 신경조차 쓰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아. 그렇지.
여긴 모르는 놈을 만나면 일단 총부리부터 겨누고 보는 곳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스마트폰이라니.
내가 5년 동안 봤던 것들은 이미 부서져 있거나, 곧 부서질 놈들뿐이었는데.
저리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니 신기할 따름이다. 역시 현실 세계가 최고야.
게임 속에 갇히기 전에 어떤 기종을 사용했는지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래 뭐, 알아 봐야 뭔 소용이겠는가. 똑같은 걸로 사다 쓸 것도 아닌데.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 보니,
지금껏 걷고 있던 골목보다 조금 더 큰 길이 나왔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도로였다.
그리고,
실제로 자동차들이 바퀴를 굴리며 지나다니고 있었다.
어디 박으면 바로 구겨질 것 같은 모습인데,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히 돌아다니다니.
튼튼한 군용 차량도 지뢰와 함께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에 위협받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Cyka.”
아니.
자꾸 게임과 현실을 비교하면 안 되는데.
정신 차리자.
비록 그 안에서 별 거지같은 일이 다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 현실 세계에서 아주 합법적으로 판매하는 보드카를 사러 나온 거다.
인도 쪽에 가만히 서서, 앞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너머의 길에 들어선 건물들 중, 어느 하나의 1층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 곳은 길가 쪽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으며,
안쪽에 들어서 있는 진열대가 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을 지키듯이 가만히 서 있는, 형형색색의 조끼를 입은 사람.
아하.
느낌이 온다.
머릿속 깊은 구석에 처박혀 있던 현대 지식 한 줌이 다시금 고개를 내민다.
저게 그 뭐냐,
아. 그래. 24시간 운영하는 상점.
다시 말해 편의점이었다.
신난 발걸음으로 당장 길을 건너려다가,
“!”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빼애앵 하고 경적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곧장 커다란 철 덩어리가 코앞을 쌔앵 스쳐지나간다.
지나가던 행인들 중 누군가가 그 아찔한 순간을 목격했는지,
등 뒤에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거센 바람에 캡 모자가 들썩거린다.
꼴사나운 생존형 머리스타일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는 없었기에,
집업 앞주머니에서 한 손을 빼내어 모자를 푹 눌러썼다.
아. 맞다.
이 곳은 개방된 도로에서 자동차들이 마음껏 굴러다니는 세상이었다.
하마터면 귀환 1일차부터 저 세상 갈 뻔했네.
아직 보드카도 못 마셔봤는데 그럴 수는 없지.
횡단보도를 찾아, 안전하게 길을 건넜다.
걸음을 재촉하여 아까 봐 두었던 편의점을 향해 나아간다.
설마 보드카가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도어벨이 딸랑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말을 내뱉었다.
그는 폰을 계산대 아래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편의점 안에 들어온 손님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이내 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다이아스의 로고가 새겨진 캡 모자.
어깨와 팔의 라인을 따라 특유의 하얀색 삼선이 그어져 있는 트레이닝 집업.
마찬가지로 다리 바깥쪽에 삼선이 그려진 레깅스.
진열대 뒤쪽으로 사라지며 언뜻 보인 삼선 슬리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이아스로 무장한 손님이었다.
하얀 양말에도 검은 삼선이 그어져 있던 거 같던데. 설마 아니겠지.
다이아스 풀세트의 강렬한 존재감 때문에 묻힌 감이 있지만,
레깅스에 감싸인 다리의 각선미 또한 심상치 않았다.
그렇다 하여 여자의 다리를 대놓고 내려다보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 지 두려웠기에,
아르바이트생은 그저 상대의 동향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백금색의 머리칼이 모자 밑으로 흘러내려 목어깨 위까지 내려온 그녀.
무언가 이국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그 손님은, 주류가 진열된 곳을 서성이며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그에 찾는 게 있으시냐고 물어보려던 그는,
자그맣게 들려온 상대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Ooy, Blin...!”
(오오, 시팔...!)
오호이, 블리엔.
고운 음색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거친 느낌이 드는 감탄사였다.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그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어느 새 다이아스 풀세트의 그녀가 계산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투명한 병들을 하나씩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아르바이트생은 계산대 위에 3병이나 올라온 그것들 중 하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푸른색의 굵은 대문자로 깔끔하게 새겨진 상표명.
COMPLET VODKA.
진열대에 재고를 채워넣을 때마다,
Complete에서 E가 하나 빠져 있는 것이 신경 쓰이던 그 녀석이었다.
그리고, 보통 자신은 진열대에 컴플리트 보드카를 3병씩 놓는다.
다시 말해,
상대는 보드카를 있는 대로 죄다 가져 온 것이다.
보드카에 한이 맺혔나.
저도 모르게 진실에 접근한 아르바이트생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바코드를 찍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아.”
그리고는 주류를 판매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대사를 읊었다가, 순간 후회했다.
이국적인 분위기. 정체 모를 감탄사. 백금발.
거기에 보드카.
아니 보드카는 상관없나.
아무튼 상대는 외국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기에 외국인 온 적이 거의 없는데, 관광 왔다가 들린 건가?
아르바이트생은 그런 생각과 함께, 갑작스럽게 떠올리려니 잘 생각나지 않는 영어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애썼다.
“신분증, 이것.”
허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상대는 꽤나 또렷한 발음을 구사하며 그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한국어 할 줄 알았구나.
순간 머쓱해진 그가 상대에게서 카드를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한복판에 새겨진 주민등록증이라는 글자와 함께,
그 밑에 적힌 ‘이리나’가 그를 반겼다.
아니, 심지어 귀화한 외국인이었네. 한자까지 적혀 있고.
그는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 옆의 사진을 확인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백금발이 어깨 밑으로 내려오고,
또렷한 이목구비가 무표정을 자아낸다.
무언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소녀의 모습이다.
성인이라기엔 꽤나 동안이었지만,
위조방지용 홀로그램 마크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가짜 신분증은 아닌 듯 했다.
아르바이트생은 대조를 위해 고개를 들어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허나 그녀, 이리나의 얼굴은 다이아스 모자챙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 죄송한데 얼굴 좀 보여 주실 수 있으신가요?
신분증 확인을 해야 해서.”
“얼굴? 신분증 확인하다?”
“네. 확인이요.”
미숙한 문법으로 이루어진 물음에,
그는 이리나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지 약간 염려가 되었다.
허나 다행히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며 한 손으로 모자챙을 살짝 젖혀 주었다.
“아, 감사합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이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무표정한 이목구비는 사진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현실의 모습이 더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허나,
잿가루가 곱게 도포되어 있는 듯한, 그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그것을 직시한 아르바이트생을 잠시 얼어붙게 만들었다.
가련하지만 난폭하고, 굳건하면서 희미했다.
고운 속눈썹 안에 담긴 잿빛의 눈에서 일말의 모순이 느껴진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그의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네. 확인했습니다. 결제 도와드릴게요.”
이내 정신을 차린 아르바이트생은 서둘러 이리나에게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5만원권 2장을 받아 거스름돈을 치르고, 봉투 2장에 각각 2병과 1병을 나눠 담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방금 그건 뭐였지.
스스로에게 그리 되뇌이며,
아르바이트생은 다시 다이아스 모자를 눌러쓰고 문으로 다가가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가 순간 아차 했다.
이리나는 양 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기에 스스로 출입문을 열고 나가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그에 문을 열어 주기 위해 계산대를 빠져나오려던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눈을 의심했다.
“...?!”
그녀가 아주 자연스럽게,
한 발과 두 손으로 균형을 잡고,
다른 발을 들어 올리며 발바닥이 문 쪽을 향하게 한 채,
무릎을 몸 쪽으로 쭈욱 당긴 것이다.
속된 말로 문을 까버리기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하는 이리나의 행동에,
그가 다급히 손을 뻗으며 외쳤다.
“손님?! 발로 차면 안 됩니다!”
“...아?”
아르바이트생의 외침에 흠칫한 그녀는,
이내 발을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작게 저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아아, 피즈뎩(시발)...!”
그러더니,
뛰쳐나오다 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목례를 했다.
“미안. 죄송하다.”
그런 사과의 말을 남긴 채,
이리나는 몸을 옆으로 틀어 어깨로 부드럽게 문을 밀치고 나갔다.
딸랑거리는 도어벨이 울린 뒤에도 아르바이트생은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약간 기운이 빠진 듯한 얼굴로 계산대에 몸을 기댔다.
“...뭐였지, 진짜로?”
그의 공허한 목소리가 편의점 안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