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귀환 (4)
* * *
역시 5년, 약 1800일이라는 시간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애써 그 곳에서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5년 동안 내게 축적되었던 여러 가지 습관들이 나도 모르게 하나둘씩 드러나게 된다.
그 거지같은 도시를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방금 전만 해도,
두 손이 바쁘다고 겁나 자연스럽게 문짝을 발로 걷어차려 들지 않았는가.
보드카 병을 하나씩 손에 쥐고 내 집의 방 문을 시원하게 걷어차 열던 버릇이,
이곳으로 넘어와서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편의점 점원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유리 문 하나 작살내고 정신이 아득해졌겠지.
문 값으로 보드카를 수십 병이나 물어줘야 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상황에 고개를 도리질 치며,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나아갔다.
아까 전에 나왔던 건물의 출입구로 다시 들어가, 계단을 올라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한 손으로 봉투 두 개를 한꺼번에 조심스레 쥐어들고,
도어락의 움푹 파인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자 문이 열린다.
뒤진 놈 손모가지 가져다가 갖다 대면 열리는 허술한 방식이지만,
이번만큼은 지문인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이 놈에게 키패드만 달려 있었다면,
비밀번호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집을 잃어버렸겠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냉장고의 냉동실 문을 열어젖혔다.
꽤나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컴플릿 보드카 두 병을 집어넣기엔 충분했다.
보드카는 역시 차가워야 제 맛이지.
하지만 그 때까지 손가락 빨면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한 병은 지금 바로 해치워 버릴 것이다.
보드카 2병이 들어간 냉동실 문을 닫고,
손에 들고 있는 투명한 유리병을 잠시 휙휙 돌리며 살펴보았다.
굵은 영어 대문자로 새겨진 COMPLET VODKA 문구가 인상적이다.
그 밑에 뭐 어쩌고저쩌고 뭐라 적혀 있긴 한데,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보드카 병에서 알아내야 할 정보는 알코올의 비율뿐이다.
병의 하단에 기입된 ‘40% ALC./VOL.’ 부분을 손가락으로 사악 훑는다.
그래, 이거지.
러시아가 인정한 보드카 도수. 40%!
약간 조급한 손놀림으로 은빛 뚜껑의 비닐 포장재를 벗겨낸다.
병뚜껑을 빙빙 돌려 연 뒤, 그대로 병 입구를 입에다가 꽂으며 한껏 기울였다.
무색, 무미, 무취의 혼합물이 벌컥벌컥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뜨뜻하게 올라오는 알코올의 존재감. 깔끔하고 부드러운 뒷맛.
“후우.”
보드카 병을 입에서 떼고,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쉰다.
역시 컴플릿이다. 이게 바로 컴플릿이다.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안정적인 맛!
그렇게 고급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싸구려 유사품들과 결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퀼리티의 녀석이다.
40%짜리 생명수가 몸속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제야 좀 대가리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다.
그래. 어디 보자.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드카를 홀짝거리며 주변을 빙글 둘러보던 나는,
내 발에 아직도 다이아스 슬리퍼가 신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Cyka.”
맞다. 여기서는 실내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현관으로 돌아가 슬리퍼를 벗어 두었다.
아까 마실 것 찾다가 싱크대 아래 서랍에서 튀어나온 휴지에 물을 대강 묻혀,
바닥을 더럽히고 있는 다이아스 슬리퍼의 자취를 닦아낸다.
슬라브 스쿼트 자세는 청소를 할 때도 유용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쭈그린 채 엉금엉금 냉장고 앞까지 기어가며 바닥 청소를 마친 뒤,
싱크대 옆의 쓰레기통에 더러운 휴지 덩어리를 던져 넣는다.
좋다. 성실하고 깔끔한 나에게 상으로 보드카 한 모금.
컴플릿 보드카를 또 한 번 들이킨 나는,
모자를 벗어 옷장 옆으로 튀어나온 거치 봉에 걸어 두었다.
그리고는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 컴플릿 보드카 동무도 책상 위에 턱 하고 안착시킨다.
“흐으음.”
그렇게 콧소리를 흘리며,
나는 책상의 공간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전부 보드카였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다.
스마트폰보다 훨씬 큰 화면에, 빌딩같이 생겨먹은 각진 케이스.
초콜릿마냥 각진 녀석들이 줄지어 박혀 있는 키보드와, 쥐새끼를 하나도 닮지 않은 마우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녀석의 이름은 컴퓨터였다.
물론 컴퓨터 자체는 그 좆같은 도시에서도 간간히 보이기는 했지만,
비싸게 팔린답시고 본체 부품들을 다 뜯어가서 멀쩡한 놈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네모난 케이스의 본체를 잠시 살펴보다가,
동그란 문양이 새겨진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위이잉 하고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방금 내가 눌렀던 버튼에도 푸른빛이 들어왔다.
“가브노...”
(이런 미친...)
세상에. 제대로 작동하는 컴퓨터라니.
이게 대체 얼마만이냐.
잠시 이런 저런 로고를 띄우던 모니터가,
이내 로딩을 마치고 바탕화면을 드러낸다.
컴퓨터 모양과 휴지통 모양 아이콘, 그리고 e처럼 생긴 녀석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방금 컴퓨터를 사다가 설치한 것 마냥 텅텅 비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5년 동안 사용하지 않고 대가리 구석에 박혀 있던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한다.
역시 컴퓨터 게임에 미친 한국인의 정신은 어디로 가지 않았는지,
맨 처음 생각나는 것이 게임 이름이다.
시티 오브 루인(City of Ruin).
“...”
사실 한국인이고 뭐고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시티 오브 루인은,
내가 5년 동안 갇혀 있었던 바로 그 게임이었으니까.
“후...”
기분이 좆같을 때는 역시 보드카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컴플릿 보드카를 집어 들어 다시금 병나발을 분다.
좋아. 기운이 난다.
젠장맞을 놈의 게임 같으니라고.
고개를 한 차례 푸르르 털어낸 나는,
마우스를 붙잡고 어색한 움직임으로 커서를 움직여 e 모양 아이콘을 두 번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 가득히 무언가가 채워진다.
이내 정중앙에 드러나는 심플한 문구, 고글(Goggle).
아하. 이것도 기억난다.
만인의 검색 도구. 못 찾는 것이 없다는 그 놈.
검색창에 커서를 갖다 대고, 키보드를 들여다보며 떠듬떠듬 타자를 쳤다.
[city of ruin]
“...!”
무심코 만들어 낸 그 단어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 시발.
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갑자기 제 발로 지옥에 걸어가려 들어?
살짝 떨리는 손으로 다시 보드카 병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황급히 백스페이스키를 연타하여 그 거지같은 게임 명을 지워 내고,
일단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알아가기로 했다.
[today date]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다.
좋은 소식은,
내가 게임 속에 갇혔던 그 날의 시간대로 돌아왔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망할 놈의 게임도 멀쩡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냥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대박이 나 있었다.
게임에 마약이라도 섞어 놨는지,
아주 그냥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내심 망했기를 기대했지만, 망한 것은 나였다.
내 몸뚱이와 대가리를 씹창내 놓고,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존나게 잘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손에 쥐고 있는 보드카 병을 집어 던져서 모니터를 박살내고 싶었으나,
우리 보드카 동무에게는 죄가 없다.
“Cyyyyyka...”
그저 걸쭉한 욕을 내뱉으며, 보드카를 한 모금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절망적이다. 절망로 정말적이다.
대체 나한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내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개발사 동무?
왜 말로 하지 않고, 그런 지옥이나 진배없는 곳으로 끌어간 겁니까? 위에서 시키덥니까?
의자 등받이에 추욱 몸을 기대어,
루인 오브 시티에 대한 정보가 적힌 러시아 위키 사이트를 아무렇게나 클릭해 댄다.
휙휙 넘어가던 페이지는,
어느 순간 지도 같은 것을 화면에 출력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
이내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머리를 모니터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 지도에 표시된 구조.
어딘가 낯이 익다.
아니. 시발.
이건 낯이 익은 정도가 아니다.
5년 동안 내가 쏘다니던 동네잖아, 여기.
서둘러 게임의 다른 맵 지도들도 살펴본다.
마찬가지다.
내가 갇혀 있던 그 거지같은 도시를 구획별로 나누어 놓은 것들뿐이다.
“Blyat...!”
무언가, 무언가가 떠오르려 한다.
기발하면서도 내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뭔가가!
맹렬하게 작동하는 대가리 속 내용물을 응원하기 위해 다시금 보드카를 입에 쏟아 붓는다.
40%의 축복에 힘입어, 마침내 대가리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았다.
따지고 보면,
저 망할 게임의 맵은 내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다.
그저 지도를 참고하고 좁은 화면 너머로 도시를 파악하는 것과,
5년 동안 직접 두 발로 뛰고 구르며 온 동네를 쏘다니는 것은 분명 큰 차이가 있다.
그래.
저 게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적어도 그에 걸맞은 복수를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다 죽여 버리자.
이 좆같은 게임에 학을 떼고 도망쳐 버리게,
전부 대가리에 바람구멍을 내 주는 거다.
흥이 마구마구 솟아난다.
알코올의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안심하는 것인지.
“흐, 흐흐흫!”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흘러나온다.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서 기쁘다고?
미친년아.
원래 세계는 여기인데 대체 어디가 니 홈그라운드라는 거냐?
다시금 보드카를 기울여 병나발을 분다.
영광의 액체가 곧 전장으로 떠나게 될 전사에게 황홀한 축복을 안긴다.
기다려라, 씹새들아.
플레이 타임 5년.
43,800시간짜리 뉴비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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