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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식 스트리머-12화 (12/57)

〈 12화 〉 적응 (1)

* * *

그녀가 보다 정상적으로 고기방패 겸 미끼 역할을 수행해준 덕에,

나무 뒤에 숨어서 고기방패에게 총알을 툭툭 날리던 놈을 수월하게 잡아 조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커다란 대문이 있는 탈출구에 도달했다.

그 망할 도시에서는 탈출구가 아니라 다른 동네로 이동할 때 통과하는 관문 비슷한 것이었으나, 게임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내 경우에는 게임이 현실이고, 그 현실이 원래 세계에서의 게임이었지만.

좀 복잡하긴 한데, 뭐 아무튼 뜻만 통하면 됐다.

그 큼지막한 게이트를 앞에 두고,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고기방패 스트리머를 바라보았다.

“이곳 도달 이전에 안 박살나다. 훌륭하다.”

“어…. 감사합니다…?”

내 말에, 그녀는 약간 미묘한 투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몸통에 바람구멍이 몇 개 뚫리고 사지가 한두 군데 박살났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해는 간다.

하지만 안 죽이고 살려서 여기까지 데려와준 사람에 대한 태도라기엔 좀 불순했으므로,

나는 AK소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슬쩍 기울여 보였다.

“무엇? 칭찬 불만 존재하다?”

“아니, 아니에요! 감사하다니까요!”

그제야 예절이 주입된 상대가 황급히 손을 내젓는다.

그 모습에 피식 웃던 나는,

이제 그녀와 헤어질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탈출 시간이다. 신속 퇴장하다.”

한국 서버의 수많은 유저들 중에서 그녀와 또 만나게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겠지.

그 쪼만한 년을 빼다 박아서 꽤나 반가웠던 인간이었기에,

웬만해선 그녀를 다시 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입맛이 씁쓸해졌다.

아니, 씁쓸할 게 뭐 있다고. 쟤가 지금 죽기라도 하냐.

그 년이랑 닮았든 안 닮았든 간에, 저 사람은 그냥 지나가다 만난 유저일 뿐이다.

누가 보면 오락에 과몰입하는 줄 알겠네. 개 같은 게임 같으니라고.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고, 탈출구로 걸어간다.

살짝 울적함을 느끼며 보드카 병을 들어 한 모금 들이킨다.

그래. 내 친구는 이거면 됐다. 보드카와 함께라면 뭔 짓거리를 하든 즐거우니까.

40%의 알코올로 나 자신을 위로하는 동안,

내 캐릭터는 이제 탈출구까지 한 발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등 뒤에서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저기…. 오이늅 님!”

방금 전까지 고기방패였던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아? 호출하다?”

“혹시…. 친구 추가 받아주실 수 있나요?”

그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알코올이랑 러시아어에 쩔어 있는 대가리가, 저 한국어를 제대로 해석한 게 맞나?

본인을 고기방패로 만들어서 끌고 다닌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친구 추가?”

“네!”

“…왜?”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슬쩍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아니 뭐….

님이랑 같이 하면 재밌을 거 같아서 그렇죠!

이런 인게임 보이스 말고 원래대로도 하면 좋고….”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자신과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 목소리.

그에,

나는 피식 웃었다.

거지같은 도시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인연이란 놈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서 이어지려고 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이 것을 인연이라고 판단하기엔 이르다.

그녀는 평범한 유저가 아니라 스트리머였으니까.

동료나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방송 컨텐츠로 이용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

묘한 기분이다.

울적함은 어디로 가고,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나를 이용해먹으려는 인간은 수도 없이 많았고, 하나같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뭔가 이번만큼은 느낌이 나쁘지가 않다.

목숨 달린 일이 아니라 관대해진 건지,

아니면 그 년을 닮아서 그런 건지.

뭐가 됐든 상관없다.

정 아니다 싶으면 게임 내 친구 목록에서 치워 버리고 무시하면 되니까.

목숨의 위험 없이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다니. 역시 원래 세계답다.

후환 없이 사람 하나 손절하려면 꽤나 골치가 아팠던 그 곳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입을 열어 그녀의 닉네임을 묻는다.

“별명. 무엇이다?”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내 물음에,

상대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진다.

“아…! 저 달퐁이에요! 디에이엘피오엔지(Dalpong)!”

“기억하다.

이제 퇴장하다, 카레얀카.”

“친추 꼭 받아주셔야 돼요!”

달퐁의 외침을 끝으로,

조금 특별했던 이번 게임은 탈출 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팔을 위로 쭈욱 뻗어 기지개를 잠시 켜 준 뒤,

나는 내 친구 컴플릿 보드카와 함께 창고를 열어 전리품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는 하단의 알림 아이콘을 클릭하여,

상당한 양의 친구 추가 요청을 빠르게 죽 훑으며 요청자 닉네임에서 Dalpong을 찾아보았다.

목록의 거의 마지막, 그러니까 최신에 가까운 쪽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친구 추가 요청을 한 듯 했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아무도 없던 친구 목록에 그녀가 첫 발을 내디딘다.

인사해라, 보드카. 새로운 친구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저 사람이, 지금 이 현실 세계에서 나랑 제일 친한 녀석이다.

그 어이없는 사실에 픽 웃으며, 보드카를 또 한 모금 들이켰다.

투명한 병 속의 내용물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나름 아껴 마시려고 한 건데, 역시 750ml짜리 편의점 에디션은 감질맛이 난다.

돈만 있으면 주류 전문점 같은 곳이라도 가서 1리터 넘어가는 놈으로 한가득 사 오는 건데.

“….”

돈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보드카와 게임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 감각이 급작스럽게 닥쳐온다.

나는, 이제부터 뭘 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음악보다 총성에 더 익숙해진 몸과,

감각이 무뎌져 제대로 웃지도 못 하는 반쪽짜리 정신으로,

과연 원래 세계의 일원이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여기 있는데, 내 원래 몸은 이 세계에 남아 있을까?

원래 몸과 얽혀 있던 인간관계는 어떻게 됐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나간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원래 세계로 돌아오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갑자기 찾아오게 된 평화가 두렵다.

내가 진정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한가롭게 침대에 누워 유유자적하는 삶을 원하고 있었던가?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그리움을 느낀다.

저주받은 도시가, 사람들이, 멍청이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하얀 붕대를 둘둘 감은 내 모신­나강이 보고 싶다.

보드카 한 잔에 취해 깔깔거리던 그 개년을 만나고 싶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총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저 빌어먹을 게임에서 나는 소리인가?

내가 지금 헤드셋을 벗었나?

조끼. 내 방탄조끼는 어디로 갔지?

군용 대검은? 군화는?

“Cyka…!”

억눌린 비명과도 같은 욕지거리를 토해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보드카. 보드카를 마시자.

5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내 친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다.

거친 손길로 보드카 병을 집어 들어 입에 꽂는다.

그 안에 남아있던 내용물을 단숨에 전부 비워 버린다.

꿀꺽. 꿀꺽.

40퍼센트의 알코올이 담긴 증류주가 화끈한 인사를 건넨다.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잘도 넘어간다.

아.

고맙다, 친구야.

“흐흐흫.”

쓸데없이 고운 음색으로 실실 웃으며,

텅 비어 버린 보드카 병의 표면을 살살 쓰다듬다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현실이니 돈이니 머리 빠개질 것 같은 문제는 뒤로 제쳐두기로 하고,

나는 눈앞의 모니터에 집중했다.

Dalpong.

달퐁이 내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면 구석에 띄워진 메시지 창에, 그녀가 보낸 문구가 여러 개 쌓여 있다.

[Dalpong : 안녕하세요^^7]

[Dalpong : 안녕하세요?]

[Dalpong : 즈기요?]

[Dalpong : 모지 이 사람 어디갓서]

내가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 이쪽과 대화를 시도하려 한 모양이다.

키보드 자판을 살펴보며 한글을 느릿느릿 입력해, 그녀에게 답장을 건넨다.

[5Ynoob : 안녕하ㅔ요]

[5Ynoob : 한글 입력 어렴다]

[Dalpong : 아ㅋㅋ 계셨넹]

[Dalpong : 어렴다 ­> 어렵다]

[5Ynoob : 어렵다]

[Dalpong : ㅖ]

[Dalpong : 않이 그 세글자 치는데 왤케 오래걸림요]

너도 5년 동안 다른 언어 쓰고 굴러다니면서 컴퓨터 한 번 안 잡아보면 이렇게 될 거다, 새꺄.

라고 보내고 싶었지만,

내 손가락과 대가리의 한계로 인해 겨우겨우 6글자로 줄여 쓸 수밖에 없었다.

[5Ynoob : ㅂ]

[5Ynoob : 키보드 어렵다]

[Dalpong : 앆!!!!!]

참으로 느릿한 그 답장에, 달퐁의 인내심이 금세 한계에 달한 듯 했다.

아, 그래. 원래 세계에서의 지식이 하나 떠올랐다.

우리나라, 그러니까 한국인은 느린 것을 참지 못한다고 했지.

[Dalpong : 혹시 플챗 가능하세여?]

[Dalpong : playchat]

플레이챗.

그 낯선 단어를 입 속에서 굴려 보자,

이내 머릿속 깊숙한 곳의 지식이 한개 더 고개를 디밀었다.

게임할 때, 인게임 보이스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음성 채팅 프로그램.

그게 바로 플레이챗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좀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5Ynoob : playchat]

[5Ynoob : 안 설치하다]

[Dalpong : ??]

[Dalpong : 시오루 고인물인데 플챗이 왜 없음요]

[5Ynoob : 계정 또한 안 생성하다]

[Dalpong : ??????]

[Dalpong : 않이 5년 뉴비라더니]

[Dalpong : 5년동안 어디 이세계 갔다오셨나]

그녀가 보낸 마지막 문구를 한 박자 늦게 해석한 나는, 순간 몸을 크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미친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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